17화
내가 말만 하면 웃는 남자, 오명호, 이제 내 남자가 된 사람이다. 여름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밤공기는 시원했고, 평소 사람이 없다던 공원은 더위에 지친 사람들의 쉼터가 되어 주고 있었다.
“여름엔 사람들이 많네요? 미소 씨, 우리 이번에는 길게 캠핑하러 갈까요? 혹시 장박 해봤어요?”
“해봤죠. 2박 3일.”
“그러면 일주일 어때요?”
그와 단둘이 일주일 동안? 왜 심장이 쿵쾅대는지 모르겠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은 차에서 저는 텐트에서 잘 거니까. 당신을 위해 가끔은 텐트에서도 잘 수 있게 마련해 둘게요. 어때요?”
가고 싶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그 긴 시간을 뺀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당신 시간 괜찮아요?”
“직장생활에는 휴가와 월차가 있습니다. 당신만 허락한다면 제가 9월쯤에 10일 휴가를 얻지요. 어때요?”
직장생활을 7년이나 했는데, 그새 잊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눈치가 보여서 10일씩이나 휴가를 빼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관리자가 아닌가? 나 때문에 무리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걱정스러운 표정 짓지 마요. 저 회사 다닌 일에 월차 한 번도 쓴 적 없고, 휴가도 이번에 처음 가요. 그러니까 분명 결재해 줄 겁니다.”
“알았어요. 갈게요.”
우린 9월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처럼 준비했다. 자주 캠핑 가는 그도 긴 장박은 처음이라 영상을 찾아보며 메모하면서 공부했다. 필요한 것들을 사고, 장박지를 알아보는 것으로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그였다. 나 역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미니 캠핑카로 일주일 이상의 장박은 과연 가능하기나 할지 궁금했지만, 그를 믿기로 했다.
9월 중순. 그의 휴가 날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큰 차를 몰고, 나는 내 차를 몰고 장박지로 향했다. 그는 생각보다 크지 않는 텐트를 설치했다. 그저 두 사람이 사용하기에 불편함 없는 것으로 했고, 장박지는 그의 친구가 운영하는 산속 캠핑장으로 했다.
“자, 우리가 앞으로 일주일 동안 보낼 집입니다. 여긴 산속이라 벌레가 많아요. 당신은 가능하면 차에서 자요. 진짜 날 좋을 때만 내려와서 자고 알았죠?
“비 오면 어떡해요?”
“이 텐트 튼튼해요. 제 친구 유명한 캠핑러거든요. 그 친구가 추천해 줬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텐트의 한쪽은 차에 단단히 고정했다. 다른 한쪽은 고정핀을 박았고, 그늘막과 자는 곳이 분리되어 투 룸에 거실이 딸린 집 같아 마치 룸메이트가 생긴 기분이었다.
“배고프죠?”
“아뇨. 그냥 목말라요.”
“맥주 한 잔 어때요?”
“음, 좋아요.”
그가 건네는 맥주를 마시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9월은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웠다. 그는 담요를 가져와 내 어깨에 덮어주면서 저녁 메뉴에 관해 설명했다.
“오늘은 뭐 먹을까요? 자요. 여기 중에 메뉴 정해봐요.”
핸드폰 액정에 보이는 식단은 8일 치였다. 만일을 위해 준비했다고 말했다.
“뭐든 가능해요?”
“네. 당연하죠.”
“저 그럼 통닭 먹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통 구이로 주문받았습니다. 손님, 이것은 대략 2시간이 걸리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오래 걸려요?”
“그동안 제가 쉬지 않고 놀아드릴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깨끗이 씻은 닭을 마늘과 소금 후추 등으로 여기저기 마사지하듯 바르더니 쿠킹 포일에 돌돌 감았다. 그러고는 은근하게 숯불이 된 불에 턱 하니 올려 두었다.
“이제 준비는 끝.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아, 오늘은 당신 이야기해 주면 어때요?”
“제 이야기할 것 없는데.”
“무엇이든 좋아요. 당신 이야기해 줘요.”
정말 할 이야기 없었다. 하지만 기대에 찬 그를 보고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이야기 들을 준비가 다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하게 할 말은 없었지만, 기대감에 차있는 그를 위해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저 어릴 때 가수가 꿈이었어요. 엄마 말로는, 저는 말을 떼는 순간부터 노래를 불렀대요. 발음도 되지 않는 아기가 엄마 앞에서 TV 속에 나오는 가수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대요.”
“진짜 귀여웠을 것 같아요.”
“또 어릴 적 사진을 보면 엄마 구두 신고, 입술에 빨강 립스틱을 바르고 찍힌 사진이 있어요. 엄마가 아주 잠깐 외출한 사이에 립스틱 부러뜨리고, 색조 화장품은 다 떨어지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대요. 그러고 보니 저도 참, 말썽꾸러기였네요.”
“그 사진 저도 보고 싶네요.”
“집에 가면 있어요. 보여 줄게요.”
“그리고요?”
조용히 기다리는 그를 위해 나는 기억을 헤집었다. 처음엔 말할 게 뭐 있나 했던 것이 이것도 저것도 생각나 어느 것부터 말해야 하나 고민이 될 정도였다. 문득 떠오른 게 하필이면 엄마였다. 서두를 시작하고 후회했으나, 그냥 이어가기로 했다.
“엄마는 돌아가시기 9개월까지 분식집을 했어요. 제가 4학년 때부터 했으니까 꽤 오래 하셨죠. 저는 4학년 때부터 엄마 일을 도왔어요. 중학생이 된 후엔 아르바이트했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공부와 일을 병행했어요. 그러고 보면 저도 매우 바쁘게 산 것 같아요.”
“힘들지는 않았어요?”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러기엔 시간도 여유도 없었거든요.”
언제부터 내 손을 잡고 있었는지 그가 손등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손잡아주는 것뿐인데, 마음이 편해졌다.
“엄마가 아픈 건 말하지 않으셨어요. 꽤 오랫동안 아프셨는데, 저는 몰랐죠. 아뇨, 어쩌면 모른 척했는지도 몰라요. 그러는 와중에 엄마가 쓰러졌죠. 아마 엄마와 함께한 시간 중에 가장 오래 함께 있었던 시간이 바로 호스피스 병동에서였을 거예요. 그때 생각하면 좋으면서도 무섭고 아프기만 해요. 매일 옆 침대에 주인이 바뀌었어요. 엄마는 태연하기만 했지만, 저는 아니었어요.”
잠시 크게 숨 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울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쉼은 좀 길었다.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사라진 거예요. 병원을 다 뒤져도 안 나와서 울고 있는데, 담당 간호사님께서 오셔서 교회에 가셨다는 거예요. 생전에 한 번도 간 적 없는 곳을 왜 갔을까 싶어 뛰어갔더니 기도하시고 있었어요. 병원 내 작은 교회이고, 밤이라 엄마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렸어요. 그 기도가 너무 간절해서 있잖아요? 그 기도. 그 기도가 제 마음에 아직도 응어리로 남아….”
결국 울고 말았다. 참고 싶어 엄마의 목걸이를 만지며 진정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눈물은 이미 터졌고, 목소리는 흐느낌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나를 안으며, 등을 연신 쓰다듬어 주었다. 흔하디 흔한 괜찮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괜찮지 않을 나에게 그 말은 독이 될 걸 알았던 모양이었다. 장작은 다 타고 불씨만 남아 있었고, 우리가 기다린 음식은 시꺼멓게 숯이 되어갔다. 긴 시간 서 있어 다리도 아플 텐데, 투정 한번 없이 안아주었다.
“엄마가 가시고, 제 손으로 장례식이며 하늘공원에 모시기까지 했어요. 사망신고도 제가 했는데, 그런데도 저는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당신을 본 그날 집에 와서 처음 느꼈어요. 엄마의 부재를 말이죠.”
그의 품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을 하는 나를 그는 말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