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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루하 Oct 30. 2024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사람

18화

그저 등을 쓰다듬으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하라는 듯이 가만히 있었다.


“당신이 제 맘에 들어오는 게 싫었어요. 아직 엄마에 대한 그리움도 다 정리하지 못했는데, 당신까지 들어와 제 마음을 헤집는 것 같아서 너무 미웠어요. 매일 찾아오는 당신이 기다리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는지 솔직히 모르겠어요. 당신이 내는 구두 소리를 기억했고, 현관문 앞에 앉는 소리를 기억했어요. 낮으면서도 듣기 좋은 톤에 목소리가 듣고 싶어 졌고, 당신이 해주는 이야기가 제 귀를 즐겁게 했죠. 하지만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불행의 아이콘이니까. 당신이 저와 만나면 분명 당신도 불행해질 거로 생각했어요.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신을 완전히 떠나기로 한 거였죠.”     


그를 올려다봤을 때 눈을 감고 있었다. 나의 모든 이야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내게 귀를 기울이는 그를 보며 긴 시간 숨긴 말을 했다.


“당신이 문득문득 생각났어요. 엄마가 생각나는 시간보다 당신 생각이 더 많이 났죠. 거부도 하고 그럴 때마다 자신을 탓하기도 했었죠.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어요. 그래서 받아들였죠. 생각나면 나는 대로 그대로 두기로.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고 지워질 거라고 했는데, 착각이었어요. 더 짙어질 뿐이었죠. 어쩌면 말이에요. 저도 당신을….”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눈을 뜨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진지한 표정이 나를 재촉하는 것 같기도 혹은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저 당신을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직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말이에요.”


그의 얼굴이 서서히 내게로 다가왔다.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이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미친 듯이 뛰어 대는 심장과 손끝까지 저리는 긴장감에 도망가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나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멈춰 내 눈을 바라보며 잠시 멈췄다. 그 중압감에 나는 눈을 감았고, 그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 입술은 그의 마음을 대신하 듯 뜨거웠다.


“미소 씨. 사랑해요.”


사랑? 나는 그를 사랑할까? 그럴까? 아직 확신이 없다. 지금은 그저 보고 싶고 그립고 함께 있고 싶다. 이게 사랑일까? 


“아무 말도 안 해도 돼요. 저는 충분히 들었으니까 더 이상 자신을 의심하지 말아요. 당신이 궁금해하는 건 제가 아니까 그걸로 혼란스러워하지 말아요. 그저 제가 주는 거 거부하지 말고 받아요. 지금은 그걸로 우리 만족해요.”


처음이었다. 나, 윤미소라는 사람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들어주는 이도 다 처음이었다. 이 순간이 낯설고, 어리둥절했지만, 그는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더 또렷해진 것처럼 행복해했다. 그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을 나도 알고 싶다고 말한다면 그는 어떻게 설명해 줄까? 그러나 반면에 아직은 묻고 싶지 않다. 도대체 어떤 마음인지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는 오명호, 이 사람에게 관심이 있고 좋아한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내 감정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 결과로 그는 만족했고,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뭐 상관없다. 다 잘 된 것 같으니까 말이다.


“닭이 살아있나?”


갑자기 닭으로 화제를 돌린 그는 다 꺼진 숯불 앞에 앉아 까맣게 타 버린 쿠킹포일을 열었다. 닭 겉면이 완전히 타 버린 줄 알았는데, 그가 여러 번 겹친 덕에 오히려 노릇노릇해졌다. 껍질을 벗겨 입에 넣어주는데, 바삭바삭한 게 진짜 맛있었다.


“음, 어때요?”

“맛있어요.”

“그러면 만찬을 즐겨 볼까요?”


나는 집에서 가져온 김치와 마른반찬들을 나열하고, 그는 햇반을 데워 상을 차렸다. 작은 캠핑용 탁자가 꽉 찼다. 직접 장갑을 끼고 닭을 분해하는 그는 전문가 같았다. 저녁과 함께 맥주를 몇 잔 마셨더니 졸렸다.


“명호 씨, 저 졸려요.”

“이건 제가 치울게요. 먼저 자요.”

“미안해요. 내일은 제가 꼭 도와줄게요.”

“네. 잘 자요.”


그를 두고 차에 들어와 누우니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나름 일찍 일어나는 나인데, 그는 그보다 더 일찍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아 그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는데,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약간에 고성이 있는 것 보니 썩 좋은 전화는 아닌 것 같았다.


“아침은 가볍게 죽 끓일까? 집에서 자투리 야채를 가져왔는데, 여깄네.”


어제 그에게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었으니, 오늘은 내가 할 차례였다. 햇반을 먼저 넣고, 자투리 야채를 넣어 뭉근하게 끓였다. 간은 국 간장을 넣고, 눌어붙지 않게 저어주었다. 어느 정도 걸쭉해진 죽을 내려놓고, 간단하게 상을 차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는 통화 중이었다.


“회사 일인가?”


기다리다 지루하면 노래를 흥얼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옆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쳐다보니 언제 왔는지, 의자에 앉아 내 노래를 듣고 있는 게 아닌가?


“통화 끝났어요? 무슨 일 있어요? 회사 가봐야 해요?”

“하나만 물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뇨. 없어요. 미소 씨, 진짜 노래 잘 부르네요. 다음엔 노래방 데이트해야겠는데요.”

“저 노래 잘 부른다고 했잖아요.”

“그러네요.”


아침을 나눠 먹는 동안 고성이 오갔던 통화는 기억에서 지워졌다. 그러나 오늘 캠핑하는 동안 그는 몇 번씩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때마다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


“진짜 아무 일 없어요?”

“일은 있어요. 근데 미소 씨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명호 씨, 저한테는 솔직해지라면서 당신은 왜 저한테 그렇게 말해요?”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화 풀어요. 진짜 당신이 걱정할 만큼 큰 문제가 아니라서 그랬어요.”

“그건 제가 판단할게요.”

“하하. 당신 많이 변했네요. 알겠어요. 말해 줄게요. 여기 앉아 봐요.”


말을 꺼내기 전에 커피를 내려 서로의 앞에 놓았다. 심각하지 않다고 하면서 쉽게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실은 어머니가 선보러 가라고 사진을 보내왔어요.”

“선? 맞선?”

“네. 그거요. 저는 당연히 싫다고 했는데, 저 모르게 오늘 약속을 잡으셨나 봐요. 당연히 못 간다고 말했지만, 계속 억지를 부리시니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나 봐요.”

“그게 왜 저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의 맞선은 결국 나와 이별을 말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나와 상관없다고 말할까?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이 사람이 영원히 내 곁에 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신 하고 상관없어요. 어머니와 제 문제니까요. 저는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고, 어머니 마음대로 무시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제 마음은 변함없어요. 제가 결혼을 해야 한다면 당연히 당신하고 할 거예요. 다른 사람 누가 반대하더라도.”

“어머니께서 저를 반대하시는군요.”


말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당황했다. 나는 일어나 내 차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이 많아져 그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차 안에서 많은 생각이 났다. 그가 없는 세상에서 내가 살 수 있을까? 다시 혼자가 되는 불행. 이게 결말이었던 것을 나는 왜 아등바등 그를 붙잡았을까? 내가 어머니 입장이라도 결혼을 반대했을 것이다.      


아버지도 없이 자란 아이인 데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우울해하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봤더라면 아마 더더욱 반대하겠지. 


우울감이 극에 달하였을 때 그가 또다시 문 앞에 서서 말했다.


“나 믿어요. 나는 절대 당신 혼자 두지 않아요. 전에 말했죠? 기억나죠? 미소 씨. 약속 꼭 지킬 거예요. 어머니는 제가 알아서 해요. 당분간은 이렇게 서로 싸우고 그러겠지만, 언젠가는 어머니도 포기하실 거예요.”


포기? 나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포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미소 씨에 대해 좀 더 알게 되면 분명 어머니도 미소 씨 좋아하게 될 거예요. 미소 씨 좋은 사람이니까 그건 제가 잘 아니까 당신을 믿고 저를 믿어요. 자신을 다시 불행으로 밀어 넣지 말아요. 당신 불행의 아이콘 아니야. 행복과 불행은 한 끗 차이예요. 제 옆에 있어요. 당신 옆에는 제가 있을게요. 저는 있잖아요. 당신 옆에 있어야 행복한 사람이에요. 미소 씨. 다른 생각하지 말아요. 제발.”


다시 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울다시피 서 있던 그는 두 팔을 벌리고 그냥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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