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내가 먼저 다가오길 바란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다가갔다.
“저도 이제 당신 옆이 제일 좋아요.”
사람은 잃어야 안다고 했던가? 나도 그랬다. 그를 영영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이 현실이 되어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리 어려운 말도 아닌데, 너무 힘들었다. 기다려준 그는 얼마나 듣고 싶었을까?
“맞아요. 그게 정답이에요.”
그의 말대로 서로를 믿기로 했다. 지금 그거 말고 다른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는 캠핑하는 내내 어머니와 통화를 한다고 힘들어했지만, 그것만 빼면 우리의 여행은 즐거웠다.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면서 서로에게 기대 보고, 처음으로 그가 자는 것도 보았다.
새벽, 빗소리에 잠이 깼다. 갑자기 내린 비로 행여 그가 춥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번데기 같은 침낭에 몸을 넣고, 잠든 그는 추운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감기 들까 봐 차에서 담요를 가져와 그를 덮어주었다. 그대로 돌아가기엔 그가 더 보고 싶었다.
“생각보다 잘 생겼네. 처음 봤을 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내 남자라 생각해서 그런 건가?”
웃음이 났다.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인데, 모든 게 달리 보였다. 잠이 든 그를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도 좋았다. 본격적으로 그를 보기 위해 의자를 가져와 옆에 앉았다. 아기처럼 잠든 그를 보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다. 텐트 위로 토닥토닥 떨어지는 빗소리도 너무 좋았다.
“아, 커피 마시고 싶다.”
괜히 혼잣말하며 문득 찾아오는 잠을 쫓아냈지만, 그렇게 앉아 결국 잠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그가 나를 위해 만들어 준 텐트 속 또 다른 침대에 누워 있었다. 두 개의 침낭을 깔고, 덮고서 말이다. 비는 계속 오고 있었지만, 아침마다 산책하러 나가는 습관이 있는 그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다음엔 나와 같이 가자고 해놓고, 또 혼자 갔네.”
“혼자 안 갔어요!”
공동으로 쓰는 공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놀랐잖아요.”
“놀라게 해주려고 했으니까요. 성공했네요.”
“치. 못된 사람이야.”
세수도 하지 않는 내가 뭐가 예쁘다고 다가와 외투를 걸쳐준다.
“산책 가요. 비 오니까 지퍼 잠가요. 아니 제가 채워줄게요. 그냥 있어요.”
그와 결혼한다면 이런 소소한 행복을 매일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의심하지 않으려 하지만,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이별의 예감이 나를 슬프게 했다.
“왜 또, 우울해하실까?”
“아니에요. 우울해 안 했는데.”
“알았어요. 가요. 여기 장화 신고.”
“아기 다루듯 하지 마요.”
“아기를 아기 다루듯 하는데 뭐가 문제지?”
얄미운 그의 등을 세게 때렸다. 아프다며 도망가는 그가 그늘막으로 세워둔 곳에서 비를 흠뻑 맞고 말았다.
“아, 꼬시다. 벌 받은 거예요.”
“너무 하네. 벌이라니…, 에취.”
나는 수건을 가져와 그의 머리를 말렸다. 자신이 하겠다는 말 대신 몸을 숙여 내가 머리를 말리기 쉽게 했다. 어느 정도 머리를 말리고 옷에 묻은 물을 닦아주려 했지만, 그럴 사이즈가 아니었다.
“옷 갈아입어야겠어요.”
“네. 그러네요.”
텐트 안으로 들어간 그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따뜻한 커피를 내렸다. 오늘의 산책은 무산되었지만, 뭐 상관없다. 삶은 우연의 연속이고, 그 연속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니까. 굳이 그걸 탓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겨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커피 마셔요. 춥죠?”
“옷 갈아입었더니 괜찮아요.”
“거짓말.”
“아닌데.”
“지금 당신 떨고 있거든요.”
쑥스러운지 콧등만 만지고, 커피를 마셨다. 따뜻한 커피잔을 두 손으로 잡고 의자에 앉아 비 오는 밖을 구경했다. 나무 위로 내려앉은 빗물이 마치 하나의 유리구슬처럼 아름다웠다. 그가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모른 척 그의 손을 마주 잡고, 남은 커피를 홀짝였다. 우리에게 점점 말은 필요 없어졌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부터 몇 가지 과정들은 자연스럽게 생략되었다.
8일의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러갔다. 집으로 돌아온 날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소파 위에서 잠이 들었다. 굳이 깨워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거실 바닥에서 웅크리고 잠들었다. 아침이 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나는 엄마의 방에서 세상 편하게 자고 있었다.
“명호 씨?”
“네!”
뭐가 불안했을까? 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모든 게 불확실해졌다.
“불안해하지 말아요. 저는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당연한 발걸음으로 여기에 올 테니까. 당신은 늘 그랬듯 나를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아셨죠?”
“네. 그럴게요.”
“대답만 하지 말고 믿어요. 아니 제가 믿게 해 줄게요.”
그는 약속을 지켰다. 다음날부터 늘 그랬듯 내 집으로 왔다. 같이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딱 하루 그가 오지 않았다. 나는 새벽까지 그를 기다렸다. 전화벨이 울렸지만, 겁이 나서 받지 못했다. 시계가 새벽 두 시를 알릴 때 그의 구두 소리가 들렸다. 걷지도 뛰지도 않는 급한 발소리. 그리고 초인종 소리.
“미소 씨? 왜 전화를 안 받아요.”
“무서워서요.”
“뭐가 무서워요? 그냥 회식이 있어서 오늘만 못 간다고 전화한 건데, 문자도 안 봤죠? 뭐가 당신을 그렇게 무섭게 해요?”
“당신 어머니요. 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겁이 났어요. 오지 않을까 봐.”
“갑시다.”
“어딜?”
그는 결심이라도 굳힌 듯 말했다.
“집에 가요. 어머니한테 같이 가요. 제가 어쩌고 있는지 보여 줄게요. 당신 불안이 씻긴다면 저는 괜찮아요. 가서 우리 교제 중이니, 방해하지 말라고 말해요.”
“명호 씨?”
“대신 엄마가 뭐라고 하시든 상처받지 말아요. 다른 건 제가 다 막을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 상처는 제가 막아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저만 봐요. 알았죠?”
주말, 그는 부모님 집으로 예고 없이 찾아갔다. 아버님은 외출 중이었고, 집에는 어머니 홀로 청소 중이었다.
“명호 네가 웬일이냐? 다시는 안 볼 것처럼 굴더니.”
“손님 왔어요. 어머니.”
“손님? 누구?”
그의 어머니는 여느 어머니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아들에게 툴툴대면서도 사랑이 듬뿍 묻어 있었고, 차갑게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러나 나를 보는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뭐 하려고 데려왔어? 나는 안 본다.”
“어머니. 아무리 그러셔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만 인정하세요.”
순식간에 어머니의 손이 그의 얼굴로 날아왔다. 그녀도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지 놀란 기색이었다. 하지만 물리진 않았다.
“내가 널 어떤 마음으로 키웠는데, 네가 이러니?”
“어머니, 그냥 미소 씨, 한 번만 제대로 봐주시면 안 돼요. 정말 착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예요.”
“네 눈에는 그렇겠지. 내 눈엔 아니다. 나는 저렇게 우울한 며느리 받고 싶지 않다.”
“미소 씨, 우울하지 않아요. 왜 환경만 보시고 우울할 거라 장담하세요?”
그녀의 차가운 눈이 나를 향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심장이 아파져 오는 눈빛이 나를 간통했다. 그 사이를 그가 가로막았다.
“어머니의 그런 눈빛이 미소 씨를 우울하게 만드는 거예요. 왜 그 생각은 못 하세요?”
다시 어머니의 손이 날아왔다. 두 번째라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를 향한 원망을 쏟아내듯 세 번째, 네 번째 날아왔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여보!”
그의 아버지였다. 어머니를 말리며 대신 내게 사과를 했다.
“윤미소 씨라고 했나요?”
“네.”
“명호 아비입니다. 오늘은 제가 대신 사과하죠. 다른 날 다시 날 잡고 오면 좋겠는데, 오늘은 그만 가는 게 어떨까 싶네요.”
그와 비슷한 목소리가 안정감을 주었다. 나는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그도 돌아서 나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을 나오는 데 다리의 힘이 풀려 그가 안듯이 차로 왔다.
“괜찮아요?”
“아뇨. 괜찮지 않아요. 미안해요. 명호 씨. 매우 아프죠?”
훌쩍거리며 부은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손을 잡은 그는 다시 물었다.
“이래도 나 못 믿어요?”
“아뇨. 믿어요. 믿을게요. 제가 억지 부려서 미안해요. 진짜로 미안해.”
“미안하면 의심하지 말아요. 저는 어떤 경우에도 당신 놓지 않아요.”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의 손만 꼭 잡고, 집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는 동안 서로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다 울었어요?”
코를 훌쩍이는 나를 놀리며 그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우리 노래방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