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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Photo Theory 2

Equivalence

Minor White

by 노용헌

Equivalence: The Perennial Trend

Minor White, PSA Journal, Vol. 29, No. 7, pp. 17-21, 1963


우리가 경향에 대해 말할 때, 여기에서 저기까지 그리고 원래대로 스타일에서 변화와 더불어, 우리는 변화에 관계한다. 경향Trends은 말초적peripheral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너무나 맹목적인 관심에 넋을 잃을 수 있다. 그 변화들에서 중심적인 것은 그밖에 무언가이다. 만일 우리가 이 중심적 역할centrality에 이름을 붙여야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한다고 생각하면, 하나의 이름은 "정신Spirit"이다. 모든 패션, 모든 경향, 모든 스타일은 만일 개인이 고집한다면 미적인 경험의 주요한 의미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할지도 모른다. 즉, 우리가 경향을 따르거나 시류에 편승하지만 우리는 항상 영원한eternal 의미, 정신Spirit으로 향할 수 있고 시작할 수 있다. 최고의 스타일과 경향과 패션들은 어떤 예술의 존재이유raison d'etre를 위해 옷을 입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에는, 패션, 스타일과 경향은 경솔한 사람들에게 함정으로서 기능을 한다. 나는 전통, 개념과 훈련에 대해 여기에서 다룰 것이다, 즉 그 개념 또는 이론을 "등가물Equivalence"이라고 불렀다, 그것에 의한 어떤 스타일, 패션 또는 경향은 경쟁의 순응conformism을 넘어 무엇인가에 연결해 작업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픽쳐-메이킹picture-making 사진에 이제까지 나타내는 가장 성숙한 생각은 Alfred Stieglitz가 1920년대의 초기에 이름을 붙였던 Equivalence의 개념이었고 그의 인생의 나머지를 실천했다. 그 아이디어는 몇몇 다른 사람들에 의해 계속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Aaron Siskind와 Harry Callahan의 아래의 시카고의 디자인Design 학교Institute에서, 그리고 오늘날의 저자의 노력의 아래의 샌프란시스코의 순수예술Fine Arts의 이전의 캘리포니아 학교에서. 결과로서 그 이론은 아마추어와 전문가 사이의, 이제까지 증가하고 있는 많은 헌신적이고 진지한 사진가들에 의해 지금 숙련되고 있다. 실제로는 Equivalence의 개념과 훈련은 표현-창조의 매체로서의 사진의 단지 등뼈와 중심이다.

등가물Equivalence은 함축성 있는 훈련이다. 그러므로 그 훈련practice에서 발전하는 사진은 이론 또는 접근의 성질을 이해할 만큼 충분히 성숙하게 되는 사진적인 비평에 관해 사진가들과 작가들과 함께 변화하고 발전할 것이다. Equivalent는 그것을 탐구하는 사람들의 재능과 노력에 의해 성장하는 훈련에서 그 아이디어 중의 하나이다.

이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우리는 거의 그것을 논의할 지면이 없다), 우리는 Equivalence의 "수준levels"을 언급할 것이다. 그 용어는 1차 정의를 위해 너무 많은 문제를 포함했다. 하나의 수준에서, 그래픽 수준, 단어 "등가물Equivalence"은 사진 그 자체에 관계한다, 그 자체 사진과 더불어 어떤 잠재적인 시각적인 경험의 분명한 근거들. 이상하게도, 이것은 어떤 현상, 또는 스타일, 또는 경향, 또는 패션을 가진 Equivalent로서 기능을 하는 사진을 의미하지 않는다. 등가물은 기능이고, 경험이다, 대상thing이 아니다. 어떤 사진, 출처에 관계없이, 어떤 사람,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서의 Equivalent로서 기능을 다할지도 모른다. 만일 개개의 뷰어viewer는 그가 그 자신 내부에 무언가에 대응하는 사진을 보는 것을 깨닫는다 -- 즉, 그 사진은 그 자신에게 무언가를 반영시킨다 -- 그때 그의 경험은 Equivalence의 어느 정도이다(적어도 그와 같은 것은 우리의 현재의 정의의 작은 부분이다).

우리가 20피트 떨어져서 Equivalent를 관측할 수 있는 것에 의한 이정표나 약간의 규칙을 주지 않는 것에 의한 독자를 실망시키는 것이 내키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왜곡하는 것보다 오히려 상황의 사실에 충실할 것이다. 그래서 Equivalence의 이 그래픽 수준에서 어떤 설명specifications도 리스트되지 않을 것이다.

다음 수준에서 단어 "등가물"은 그가 그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무언가 유사에 대한 특별한 감각을 그에게 환기시키는 사진을 보는 것처럼 뷰어의 마음에서 계속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제3의 수준에서 단어 "등가물"은 질문question에서 그 사진이 보이지 않고 난 후에 그가 그의 정신적인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는 동안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적인 경험에 관련한다. 기억되고 있는 이미지는 또한 어떤 유사의 느낌이 느끼게 될 때만 Equivalence에 관계된다.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고 싶은 이미지를 기억한다. 우리가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고 싶은 이유는 변화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그것을 좋아한다", 또는 그것이 강제적이게 될 만큼 강하게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또는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들 자신에 관해 무언가를 우리에게 깨닫게 했거나, 또는 우리에게 약간의 변화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아마 그 독자는 약간의 이미지를 생각나게 할 수 있다, 그것을 보고 난 후, 그는 그렇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의 등가물의 그래픽 수준으로 잠시 돌아오자. 우리가 그 현상을 기술할 수 없지만, 우리는 그 기능을 정의할 수 있다. 어떤 사진이 Equivalent로서 주어졌던 사람을 위해 작용할 때 우리는 사진 찍혀진 그 주제를 넘어 있는 무언가를 위한 은유metaphor의 역할을 작용하거나 한 상징으로서 작용하는 그 사진을 그 사람에게 그리고 그 순간에 이야기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또 다른 방식에서 이것을 말할 수 있다; 사진이 Equivalent로서 기능을 할 때, 그 사진은 즉시 카메라 앞의 무엇인가 기록이고 동시에 임의의 상징이다. ("임의의 상징"은 그 순간의 욕구need를 채우기 위해 자동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나무의 껍질의 사진은, 예를 들면, 개인적인 것 내에서 특성의 거칢roughness의 유사한 느낌을 갑자기 유발하게 할지도 모른다.)

한 사진가가 그에게 무엇이 Equivalent인지를 우리에게 나타낼 때, 그는 사실상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무언가에 관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에서 그 느낌의 나의 은유는 있다". 여기에서의 중요한 차이는 그가 사진을 찍었던 주제에서가 아니라, 그 밖의 무언가에서 그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구름의 사진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그것의 형태는 어떤 사람에 관한 그의 느낌에 의미심장하게 대응한다. 그가 구름을 보았던 것처럼 그는 어쨌든 그 사람을 생각나게 되었다, 그리고 아마 그는 우리가 파악할 것이기를 바란다, 구름 형태의 표현이 풍부한 품질에서, 그가 경험했던 그와 같은 느낌. 만일 우리가 느끼고 우리의 느낌이 그의 것과 유사하다면, 그는 그가 이미 알고 있는 느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서 불러일으켰다. 이것은 만드는데 반드시 쉬운 구별이 아니다. 그래서 아마 우리는 재차 경험할 수 있다. 사진가가 Equivalent라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줄 때, 그는 느낌의 표현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 느낌은 그가 사진 찍었던 대상에서 가지고 있었던 느낌이 아니다. 정말로 일어났던 것은 그가 그 형태의 시리즈나 대상을 인지했다는 것이다, 사진을 찍었을 때, 뷰어를 그 자신 내에서 독특하고 이미 알고 있는 느낌, 상태 또는 장소로 느끼게 할 수 있는 특정의 암시적인 힘과 함께 이미지를 낳을 것이다. 물, 또는 구름이나 얼음, 또는 셀로판위의 불빛과 유사한 물질들, 형태와 형체의 무한성, 그와 같은 끊임없이 변형metamorphizing하고 있는 물질과 함께, 반영과 색은 지적인 사고와 촉각의 조우와 감정의 태도와 모든 종류들을 암시한다. 그것은 그 물질에 의해 형성되고 입증되지만 그것은 사진가가 나타내고 싶어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독립적인 독자성을 주장한다.

등가물equivalent의 힘은, 표현-창조적인expressive-creative 사진가가 관계하고 있는 한, 그가 사진을 찍을 수 없거나 사진에 찍히지 않는 다른 것들이나 어떤 이유를 위한 이벤트나 상황들과 대상에 관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전달할 수 있는 그 사실에 있다. 그 비밀, 그 포착과 그 힘power은 그들의 표현-환기expressive-evocative시키는 품질을 위해 카메라 앞에서 대상의 형태와 형식을 사용할 수 있는 것에 있다. 또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것을 말하기 위해, 실제 Equivalency는 사진가의 표현 목적을 위한 조형적인 재료로서 시각적인 세계를 사용하는 능력에 있다. 그는 매체의 기록하는 힘을 사용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진, 그리고 도큐멘트document에서 강력한 것이다. 또는 그는 그 변형시키고 있는 힘을 강조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똑같이 강력하다, 그리고 또한 또 다른 것을 그 주제로 하여금 나타내게 할지도 모른다. 만일 그가 의식적으로 그리고 고의로 Equivalency를 사용하고,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그리고 그의 이미지에 대한 신뢰성responsibility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표현의 자유 못지않게 예술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구체적이기 위해, 잠시 이론을 멈추고, 우리는 위에 언급되는 구름의 사진으로 돌아올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 사진가에게 질문한다면, 그는 그가 특정한 여성, 즉 그녀의 여성다움femininity에서 발견하는 어떤 품질을 나타낸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 사진은 부드러움, 섬세함, 둥그스름함, 솜털처럼 가벼움을 나타낸다, 그래서 그가 그녀에 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적어도 하나의 느낌에 대응한다. 만일 그가 그녀 자신을 직접 그 여성의 사진을 찍지 않는 이유를 우리가 묻는다면, 그는 그녀가 거의 사진에 적합하지 않다, 또는 그가 사진을 매개로 하여 그의 직접적인 느낌과 그의 외면적인 표현 사이의 어떤 미적인 차이를 확립하고 싶어한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즐거운 것이다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한 사람의 너무나 친밀한 사진은 뷰어의 즐거움의 방법에 있어서 종종 얻는다.

하나의 수준에서 구름의 이 사진은 단지 기록이다, 그러나 다른 수준에서 그것은 어떤 계획된 감각과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작용할지도 모른다. 실제적인 면은 정확히 그 사진에 속하고 있다; 불러일으키는arousable 암시는 누군가 그것을 감응하여sympathetically 보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Equivalency의 또 다른 견해는 이것이다: Equivalency, 그런데 그것은 뷰어의 마음에서 자극 기능의 근원을 위해 그 자체 사진에 아주 좌우된다. Equivalency는 다음의 방정식equation이 사실이다라고 하는 가정에 작용한다:


Photograph + Person Looking Mental Image


우리가 방정식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Equivalence는 양방향의 반작용이다. 또한 우리는 포함된 내적인 이미지에서만이 떠오르는 은유적인 기능의 어떤 가능성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뷰어의 정신psyche에서 Equivalent로서 작용하는 사진에 의한 기법mechanisms은 심리학자가 "투영projection"과 "감정 이입empathy"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예술 세계에서 유사한 현상은 "표현이 풍부한 형식과 형태"라고 불린다. 사진의 세계에서 뷰어의 광대한 대다수는 그들이 형식과 형태의 "표현이 풍부한expressive" 품질을 모르게 하기 위해 주제-동일시 범위에 남아 있다 또한 즉, 회화적인pictorial 경험의 디자인적인 면, "표현이 풍부한" 형태와 컬러에 반응하고 있고 그들 자신이 가진 그들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한다. 그럼에도 다행히, 또는 불행하게도, 경우에 따라, 사진에 대한 현대의 뷰어는 사진들에 깊이 간직되는 디자인에 잠재의식적으로 대개 반응한다. 이것은 그가 거의 도울 수 없다, 능숙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위업exploits을 광고하는 세계로서. 독자는 틀림없이 "숨겨진 설득자persuaders"에 대해 들었다. 만일 광고주가 제품을 파는 것을 돕기 위한 사진에서 디자인의 잠재의식의 효과를 사용할 수 있다면, 총명한 사진가는 더 계발된 미적인 목적을 위한 그와 같은 외관의 디자인을 사용할 수 있다.

Equivalence의 더 깊은 수준에서, 그 용어는 Equivalent로서 작용하려고 생각하는 사진의 독특한 효과를 언급한다. 지금까지 이 글article에서 그것은 Equivalence에 관련한 사진을 보고 있는 뷰어에 의한 미러링mirroring의 어떤 인지awareness인 것처럼 보인다. 지금 우리는 Equivalence의 느낌이 독특하다는 것을 다소 나타내기 위해 정의를 수정할 수 있다. 문학에서 이-독특한 느낌은 "시적poetic"이라고 불리는 Equivalence와 관련된다, 매우 폭넓고 보편적인 감각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 사진에서 "시적인poetic" 단어를 위해 정확한 등가물equivalent을 가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시각sight뿐만 아니라, 통찰을 의미하고 있는, 그 단어 "시각vision"을 암시할 것이다. Equivalence와 관련되는 것처럼 보이는 그 효과는 이렇게 말로 나타내게 될지도 모른다: 주제 문제와 표현 방법사이에서 능가할 때, 모든 수단을 이용해, 주제matter인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정신spirit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된다.

Equivalence의 제3의 수준은 더 일찍 언급되었다. 이 수준은 "기억하고 있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삼는다. 한 남자가 시각vision에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왜곡이 생기기 때문에 특히 항상 그 자신의 것이고 최초의 자극이 지나간 후에 그의 회상recall 이미지를 바꾼다. 오리지널original로부터의 이 변화는 단지 개인적인 그 자신에서 나올 수 있다. 만일 뷰어가 그의 마음에서 기억되고 있는 이미지를 연구하게 된다면, 그가 도달할지도 모르는 Equivalence의 정도 또는 경로trajectory가 무엇인지 아는가, 또는 어디까지 그가 그의 기억되고 있는 이미지에 들어갈지도 모르는가? 한 사진이 들어갈 수 있는 거울mirror속으로 변화할 때 그 순간, 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 있을 때든, 그것을 기억하고 있든, 그 경험이 개인 내에서 완전히 있기 때문에 항상 비밀인 채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것은 개인적이다, 그 자신의 사적인 경험, 말로 나타낼 수 없고, 번역할 수 없다. 이 경험에 대해 전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눈 앞에 문자 그대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한 사진에서 그들은 또 다른 것으로 바꿔놓기 위해 페인트가 벗겨진 것을 알고 있다.

이 순간을 선택하기 위해 사진을 만드는 것은 거의 생산적인 카메라워크camerawork를 만들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이 순간으로서 비밀secret은, 소수의 사진가들은 다른 것에서 유사한 감정 상태에 도달하거나 야기시키는 사진을 만들기 위해 그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감정 상태에서 시작하려고 신중히 오늘날 작업하고 있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Equivalents로서 기능을 하기 위한 사진들을 만든다. 우리는 콜로라도의 Arnold Gassan, 오레곤의 Gerald Robinson, 뉴욕의 Walter Chappell, 매사추세츠의 Paul Caponigro, 아리조나의 Frederick Sommer-- 몇몇의 이름들을 더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도 있다.

그런 방식으로 작업하기 위해, 사진가들은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운동 감각적kinesthetically으로 민감하게 하는 세계에서 그 사람들 앞에 그들의 작업을 얻을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 확실히 다수의 독자가 아니라, 비록 광범위할지라도. 품질이 항상 사진과 그림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일반성은, 그런 사진가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은 중요한 그들의 노력이다, 개인적으로 의사전달-환기communicate-evoke에 있어서 사람과 정신 둘 다에 공통의 일반성의 중심과 더불어 조화되고 있다.


Equivalence, Mirror of the Psyche

영속적인perennial 경향은, 예술에서 아주 오래된 사람만큼, 금세기의 초기에 사진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 그것은 뉴욕의 Edward Steichen과 스티글리츠Stieglitz 주위의 포토-시세션Photo-Secession 그룹의 작업과 저술에서 약간 애매했었다; 그 때 그것은 이름 불리어졌고, 20세기 초기의 Stieglitz에 의해, 말하게 되었다. 영속적인 경향은 여전히 사진가들 또는 그들의 비평가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도 불구하고 사진에서 그들 자신을 만난다라고 지적하기 위해 사진에 관한 현대 사상가들에 의해 빈도frequency가 커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스트만 하우스Eastman House의 보조 디렉터, Nathan Lyons는, 그들이 본 것을 믿든, 그들이 믿는 것을 보든 그의 개인적인 사회 구성원들에게 묻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우리는 우리가 사진이나 그 밖의 다른 것에서 보기를 원하는 것을 본다 -- 실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카메라는 그들의 소유자와 사용자보다 훨씬 더 공평하다. 다른 단어 투영과 감정 이입에서, 사람의 본래의 특성은,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보는 어떤 것에서 거의 자동적으로 우리들 자신의 무언가를 보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이 일부 뷰어의 최소한의 거울mirror로서 항상 기능을 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로체스터Rochester 기술 연구소에서 했던 사진들에 반응하는 독자에게서 광범위한 조사로부터,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첫 번째로 그들 자신의 무언가를 보는 사진으로, 그리고 두 번째로 카메라 뒤의 사진가를 보는 것은 명백하다, 적어도 그렇다면. 꽤 의미 있는 젊은 사진가, 순진한 사람에게, 그의 사진에 반응하는 독자는 경험을 실망케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무엇을 보길 원하는지에 관해 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것은 그가 그것들을 보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약간의 미러링mirroring의 정도는 어떤 사진이라도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은 비문학적이나 형식화된 방식에서 표현되는 사진들과 함께 특히 강하다. 미러링은 디자인의 존재가 카메라 앞에서 그 주제의 존재의 감각에 대신하거나 동일한지에 있어서 또한 사진들에 강하다. 이것은 미적인 대상의 기록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표현이 풍부한 효과와 디자인을 포함하는 "회화적인pictorial" 사진의 흔히 있는 출현이다. 그 주제의 문제가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애매하거나, 분명치 않은 그런 방식으로 표현될 때, 그 이미지에의 반응은 완전히 다른 견해를 띤다. 우리가 추상적이거나 비구상적인 회화에서 보는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우리가 유사한 이미지들의 어떤 경험도 갖지 않았으므로, 마치 그것들이 그림들이고 그림과 조각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오랜 친숙함이 있는 디자인의 특성의 모든 것과 가치 관계 또는 같은 품질들을 찾는 것처럼 우리는 그런 사진들에 반응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 주제를 확인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우리 앞의 그 이미지가 우리가 결코 보지 못했던 일부 세계의 도큐멘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잊는다. 때때로 예술과 자연은 그런 사진들에서 만난다. 그들이 우리에게 유사한 그림들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그들에게 "추상 개념abstractions"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그것들은 종종 문자 그대로의, 외견appearances의 세계로부터의 "추출" 또는 "격리"이다. 이것은 한 사진에서 애매하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제에 다른 관계를 더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그린 "추상"과 직면할 때 외견의 세계와 더불어 다른 만남에 직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보통의 경향은, 만일 우리가 주의를 끌려고 한다면, 거부하기보다 오히려, 사진에서 한 주제의 애매한 표현은, 그것을 위한 주제를 꾸며내는 것이다. 우리가 꾸며내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내용과 재료에 있다. 우리가 주제를 꾸밀 때 우리는 그 사진을 우리들 자신의 일부의 거울mirror로 바꾼다.

인피니티 잡지Infinity Magazine의 Ralph Hattersley, 또는 Aperture의 나 자신과 같은 편집자는, 사람들은 반대를 위한 그들의 항의에도 관계없이 사진들에서 그들 자신을 만난다라고 지적하고, 그들이 그림 퍼즐을 풀고 싶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글과 기사에 익숙하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무언가를 해결할 감정적-지적인 장비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한다. 또는 그들의 글letters들은 그들이 곧고, 정직한 남성이나 여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자성(自省)적인self-searching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전혀 필요 하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다. "병적이다Morbid"는 것은 뷰어의 순수한 성질에서 드러낼지도 모르는 것을 위해 사진의 숙련된 연구에 가장 자주 적용되는 단어이다. 그것은 어떤 정신을 음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또는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가 많은 현대 미국인에 의한 일종의 병sickness이라고 간주되는 것에 의한 플라톤Plato이 의미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항의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자신의 심리학은 외관appearances의 세계에서 그것이 무엇을 보길 원하는 지를 보는 방식을 발견한다. 이것은 어렵고 마음이 아픈 점이다; 따라서 나와 나의 학생들 중의 대부분은 사진들에 사람들의 반응들을 관찰했었고, 많은 종류의 사진들에 많은 종류의 사람들의 반응 뒤에 대상의 성질을 조사하고 평가하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나 자주 어떤 상상도 가지지 않고 "병Sick, Sick, Sick"이라고 우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또는, 그것들을 모호하게 하는 이유들을 위해, 그들은 그들의 근본적인 불안을 어지럽힐지도 모르는 시각적인 경험들에 그들 자신을 신중히 눈멀게 한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환기communication-evocation의 사진적인 가능성의 최대한의 범위는 그들에게 닫힌 세계이다.

때때로 애매한 사진에 대한 불평은 진술된다, "예술은 결코 미화시킨 로르샤크Rorschach 테스트가 아닐 것임에 틀림없다!" 피암시성Suggestibility은 인간 특성의 근거의 일부다. 대부분의 우리의 삶은 피암시성, 특히 예술에 의존한다. 사진에서 다큐멘터리안documentarian은 그의 카메라가 가진 중요한 정보를 전달할지 모른다; 암시의 그 힘과 디자인을 의식하고 있는 회화적 사진가pictorialist는 치료therapy에서 유용한 로르샤크Rorschach 얼룩을 만드는 우리에게서 그 특성에 크게 의존한다. Equivalence의 이론은 의식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방식에서 인간의 피암시성을 다루는 사진가를 위한 방식이다. 피암시성이 예술에서 영속적인 경향으로 가는 바로 그 문이기 때문에 그것은 미화시킨 로르샤크 얼룩의 어느 정도가 매체에도 이로운 것으로 사진이나 그림에 대해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문gate이 정원garden과 상당히 같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관찰해야만 한다.

몇몇 현대 사진가들은, 이미 유명한 그것들과 같은, 사진들이 뷰어의 내부에서 느낌의 어떤 상태를 비춘다라고 하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들은 그들이 선택하는 그 주제의 뷰어들과 그들 자신의 사진들의 뷰어로서 그들 자신을 여기에 포함한다. 그들은 사진이 촉매로서 역할을 하는 진리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따라서 과정에서의 단계이고, 최종 결과product가 아니다. 그들은 뷰어의 마음에서 정신적인 이미지가 그 자체 사진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사진이 한 대상thing 대신에 기능인 것은 Equivalent의 아이디어에서 매우 흥미있는 발전이다; 만일 정말로 이것이 발전이라면 그리고 스티글리츠Stieglitz가 그 단어에 의해 의미했던 것의 뒤늦은 이해가 아니다. 심리학에 관한 유명한 생각들의 프로이트Freudian, 융Jungian과 아들러Adlerian 효과에 있어서 어떤 잠재적인 변화를 반영하기 때문에 그것은 흥미 있다. 아마 많은 속인의 사람은 아직도 심리학이 불쾌하다dirty라고 생각한다, 그 단어와 함께 그 자신의 불쾌한 면들을 연상시켰다. 사람의 내적인 작업workings은 더럽든dirty 깨끗하든clean 분명한 사실이다 -- 다른 남성들에 관한 그의 외적인 것이다. 예술은 전통적으로 남성의 순수한 충격과 새로운clean 동기와의 관련을 주장한다, 그럼에도 많은 현대 심리학자는 이 모든 것이 순수한 수법hokum 이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래서 일부 사진가들이 한다. 그리고 항의에서 그리고 사실에서, 정신의 음미와 우리의 자멸적인self-destroying 시기의 인진에서, 현대 예술에서 많은 사람들은, 특히 현대 사진의 Frederick Sommer, 만일 뷰어가 조금이라도 그 이미지에 끌린다면 그런 특별한 방식에서 의도했던 이미지들을 느끼게 된다, 그때 그 뷰어는 그 자신의 무언가를 볼 것이다. 만일 그가 보는 것이 불쾌하다면, 그 자신의 일부가 불쾌하다는 것이 약간의 사실일지도 모른다 -- 만일 더럽고, 병적이라면 그래서 만일 그가 공포를 대단히 좋아한다면, 아마 그는 그가 두려워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만났다. 만일 그가 장엄한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그가 과장했던 아름다운 무언가 때문이다.

4개의 사진들은 저자에 의해 여기에 나타낸다. 그것들에서 당신이 그들에게서 얻는 것이 당신의 것이다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저자는 그자신의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또한 그것들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이 사진들은 이미 알고 있는 감정 상태에서 생긴다. 그들은 자기 표현적이 아니거나, 자성(自省)적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기반self-found을 둔다.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중요성도 없다, 대수롭지 않은 환기evocation, 존재하지 않는 경쟁. 그들은 Equivalence가 나올지도 모르는 것의 이벤트로서 보여주게 된다. 그 자신의 무언가와 직면하고 있는 독자의 가능성은 재현되고 있는 것을 위한 그들의 단 하나의 이유이다. 그들은 뷰어의 거울로서의 기능을 다할 것이다, 그가 그것을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행복을 식별할 수 있는 이미지 중의 어떤 것을 지적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분노를 식별할 수 있고, 또는 사진들에 대한 뷰어가 그들 자신의 느낌들에서 신념faith을 배우는 기회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슬픔을 식별할 수 있다.

Equivalence의 이론과 함께, 사진가들은 도처에서 정신, 마음, 내장viscera과 인간의 정신에 관련해서 카메라를 사용하여 배우는 방법을 느끼게 한다. 영속적인 경향은 사진에서 숨김없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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