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하지만 들려주고 픈 내 이야기
그 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나갔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며 노래를 마치고, 평생 못 볼 사이처럼 진하게 부둥켜안으며 먼 미래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주고받은 뒤 각자의 길로 향했다.
사나이들의 뜨거운 우정이 넘치는 이 곳,
여기는 천안에 위치한 모 초등학교다..
어두운 뒷골목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부를 것만 같은 노래가 초등학교의 복도에서 울려 퍼져 간다.
밝은 웃음으로만 가득 채워도 모자랄 이곳에서,
순수함 가득 머금은 아이들이 있는 이곳에서 ,
어찌 이런 노래가 불러지고 있는 것일까..?
때는 2007년 봄,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의 아이들은 친하게 지낼 친구들을 물색하느라 정신이 없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자연스레 친해진 거라 생각이 들지만 결과가 있기까지 수많은
눈치싸움과 노력이 숨어있다.
올해 6학년이 되는 나도 그중 한 명이다. 작년에 친했던 친구들과 같은 반이 되지 못하여 눈알을 부지런히 움직여 이리 끼고 저리 껴가며 남은 초등학교 생활을 함께 할 친구를 찾고 있었지만 이미 친해질 데로 친해져 있는 그들의 틈에 끼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때 구석에 앉아 나와 같은 외로운 느낌을 풍기는
그를 발견하였다. 또래 친구들보다 큰 키, 우락부락한 외모를 가진 그였기에 그 당시 재밌게 보았던 김수미, 탁재훈, 신현준 주연의 영화 '가문의 영광'의 조폭들이 떠올라
"형님, 백호파 아니십니까?"
라는 뜬금없고 다소 유치한 첫인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그의 대답이 내 남은 초등학교 생활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시발점이 되었다.
"나? 백호파가 아니라 배고파인디;.."
TV 예능 프로그램에서나 나올 것 같은 대사가 자연스레 귀에 들리니, 미친 듯이 웃음이 났다.
재밌는 친구를 만났다는 기쁨에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고 어느새 주변을 둘러보니 꽤 많은 친구들이
모였다. 아마 그들도 나와 같은 외로움을 느낀 동지 들이었겠지..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냐는 질문에
"여기 이 분은 배고파의 회장님이시고, 나는 회장님을 모시는 윤부장입니다"
라는 농담으로 너스레를 떨었는데 어린아이들의 시선에는 어른스러운 직급 놀이가 재밌어 보였는지 너도 나도 끼워달라며 하나씩 몰려들었다. 어렸던 나는 잘 알지도 못 하는 회사 직급을 하나씩 부여해가며 서열을 정리해나갔다.
그 결과 8인의 배고파 멤버가 확정되었으며 배고파를 만든 주역이자 직급을 수여할 만큼 권력이 있었지만 처음 부장으로 소개한 탓에 뒤에 부여한 사장, 이사에 밀려 나는 서열 4위의 애매한 자리로 추락하게 된다.
배고파는 어린아이들이 장난으로 만든 조직이었지만 상명하복과 내리 갈굼이라는 엄격한 규율과 함께 빠른 속도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상명하복과 내리 갈굼, 옛날 군대에서나 들어보았을 법한 무서운 단어지만 호기심 많고 쓸데없는 걸로 웃는 초등학생들의 재미를 충족하기 충분하였다.
여기에 엄격하기만 한 규율이 아닌 종종 하극상이 일어나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어우러져 철없는 초등학생들의 취향에 딱 맞는 우리만의 놀이가 된 것이다.
또한 회장의 심기에 거슬리면 사장에서 사원까지 강등될 수 있고 회장에게 잘 보이면 사원에서 사장까지 올라갈 수 있는 파격적인 인사체계도 가지고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어린아이들이 앞으로 겪을 사회를 극단적이지만 잘 표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부적으로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면 외부적으로는 배고파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든 음식을 먹을 때 잔반을 남기지 않는다'라는 마인드를 갖추고 있어 급식실 영양사님과 이모님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배고파는 날로 몸을 불려 나갔다.(조직을 불린 게 아니라 조직원들이 살이 찐 것이다..) 급식에서 나물무침이 나오면 젓가락도 안 대었던 나는 나물을 꼭꼭 씹어 먹으며 맛을 즐길 줄 알게 되었고 요플레를 먹지 못 하던 친구는 급식으로 요플레가 나온 날 내리 갈굼을 견디다 못해 억지로 먹게 되었는데 현재는 요플레 뚜껑까지 핥아먹는 긍정적인 식성으로 바뀌었다.
최근 그 친구를 만나 맥주 한 잔 마시며 추억팔이를 하다 그때를 회상해 보았는데 치를 떨다가도 갑자기 요플레가 당긴다며 편의점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