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끝.
스페인에서 돌아오자마자 이사 준비를 했다. 큰 캐리어에 옷가지를 마구 우겨담았다.
학원에서 준비해 준 픽업택시를 탔다.
이삿날은 영국 답지 않게 아주 맑았다. 하늘이 파랬고 햇살이 좋았다.
“학원을 2월 첫쨋주까지만 다니겠습니다.”
처음으로 들어가 본 학원 원장실.
원장선생님은 단호하게 말하는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곧이어 설득하려고 나섰다.
“무엇이 힘드니? 힘든 게 있다면 도와줄게. 여기까지 와서 아깝지 않니.”
내가 힘들 다고 했을 때 당신들은 뭘 했죠.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잖아.
이제야 내 발을 잡으려는 게 너무 화가 났다.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설득은 끝없이 이어졌다. 듣다못해 한마디를 꺼냈다.
“전 여기가 싫어요.
영국이 싫고 브리스톨이 싫습니다.”
원장은 나를 가만히 보더니 그만 나가봐도 좋다고 했다.
학원을 관두겠다고 말한 후 2주 만에 학원을 나왔다. 레벨테스트를 치고 수료증을 받기 위해서였다.
레벨테스트를 치고 내려오는 계단에서 같은 반 스페인 남자애를 만났다. 내가 관둔다는 소식을 이미 들은 모양이었다.
“관둔다며? “
홀가분한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끄덕였다. 남자애는 부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관뒀어? 나도 관두고 싶어. 너무 돌아가고 싶어.”
아. 너도 힘들었구나.
반년을 같은 반에서 지냈다. 어린아이들이 가득한 반에서 유일하게 나잇대가 비슷했으며, 항상 유쾌해서 친하게 지냈다.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는 아이였다.
힘들어했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우리가 진즉에 이런 이야기를 나눴으며, 나는 좀 더 여기 오래 있을 수 있었을까.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 일주일간 런던에서 머물렀다. 일주일 간 무얼 했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단 하나는 기억난다.
밥을 잘 챙겨 먹으려고 했다. 세끼를 꼬박꼬박 잘 먹으려고 했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끔 책상에 앉아있으면, 브리스톨 냄새가 코 끝을 스친다. 자연스럽게 오후 해가 넘어가는 시간의 서늘한 파란색의 브리스톨 시내가 떠오른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잔상이 지나가기 만을 기다릴 뿐이다.
아직도 아이유의 ‘가을방학’을 듣지 못한다.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오르막길을 오르내릴 때마다 ‘가을방학’을 들었다. 나를 위로해 줬던 노래가 지금은 가장 깊숙이 숨겨둔 아픈 곳을 건드려 꺼내보지 못한 지 벌써 몇 년 째다.
취업을 준비하던 기간,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뭔가요?‘ 라는 질문엔 항상 이 시기를 꼽았다.혼자 답변을 연습할 때면 언제나 눈물이 왈칵 터졌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몇 번이나 울었다.
이 글에서보다 더 비참했고 더 힘들었다. 내 마음이 견디지 못해 글로 다 옮길 수 없었다.
글을 쓰면서, 뭐가 이렇게 힘들었던 걸까. 다시 돌아가면 잘 지낼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만 금방 접었다.
뭐가 힘든지 정확히 알 수 없었기에 더 힘들었던 거고, 다시 돌아간다 한 들 잘 지낼 자신도 없다. 다만 그때는 나 빼고 다 잘못된 것 같았지만 지금은 나 또한 내 우울의 원인이었음을 알 뿐이다.
그저 이 시기가 있었기에, 다른 힘든 시기들을 잘 넘길 수 있었음에, 그저 그것만으로 그때의 우울은 제 역할을 다 한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