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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Jun 07. 2024

연애한 지 세 달.  나보다 전여친이 좋다는 남자친구

2019년 05월, 그와의 첫 싸움

 ☑ 남편 한 줄 정보: 김현우. 1990년생. 카메라감독. 무엇보다 추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로맨틱가이. 그래서 전여친과의 추억도 몰래 간직해 두었다가 내게 꺼내 보여주는 배포 있는 상남자^^.


어느 날 이후부터 나는 남편과 술을 마시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남편과의 술자리가 생기더라도 목만 축일 정도로, 맛만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남편보다 친구나 동료들과 술자리를 자주 한다. 평소 술을 즐겨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이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는 누구보다 좋아하고, 그렇다고 주량이 약한 편도 아닌 내가 이렇듯 남편과의 술자리를 멀리하게 된 데에는 아주 슬픈 사연(?)이 있다.


연애 초, 현우 감독과 나는 매일 술을 퍼마시고(?) 동네를 누볐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만나는 때라곤 모든 촬영이 끝난 밤늦은 시각이니 할 수 있는 데이트라곤 술 마시는 것 외엔 없었다. (맞다. 변명이다) 여튼 우리 두 사람은 술을 엄청나게 잘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상대의 기분을 맞춰줄 정도로 마실 줄은 알았고, 술기운이 살짝 올라 신나게 떠드는 그 시간을 유난히 좋아했던 우린 날마다 동네 술집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만난 지 백일쯤 되었을 때다. 남들은 이 시기에 저 깊은 지하에서부터 애정이 샘솟아 끓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어쩐지 이때부터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그날도 우리는 별일 아닌 것으로 투닥거리기 시작해 별안간 크게 싸우기 시작했다. 이유인즉슨 당시 현우 감독과의 연애로 안 그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내 인생이 두 배, 세 배로 바빠져 정신을 못 차린 내게 한계가 왔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휴식하고, 나를 좀 살필 시간이.


하지만 불꽃남자 현우 감독은 이런 나를 잠시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일을 마친 늦은 새벽, 5분만 보자는 현우 감독을 피곤하단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서운함이 밀려왔는지 내게 자신을 위해 그 시간도 못 쓰냐며 투덜거렸다. 평소였다면 그냥 귀엽게 넘어갔을 수도 있지만 (절대 그는 귀여운 스타일이 아니다), 나는 그날따라 밤새 일하고 지친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현우 감독이 미워 예민하게 쏘아댔다. 결국 쉬지도 못하고 한참을 전화로 실랑이하다가 답답해진 나는 그를 집 앞 술집으로 불러냈다.


이미 감정이 상할 만큼 상한 현우 감독과 나는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고 술잔만 비웠다. 늘 웃는 모습이었던 그와 이런 꼴로 싸우게 될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피곤하다고 말하는 나에게 자기 맘을 몰라준다는 둥의 어리광(?)을 부리며 짜증을 내다니. 그 마저도 모자라 뭘 잘했다고(?) 쉬지 않고 종알대던 인간이 입을 꾹 다물고 있다니. 나는 현우 감독이 어지간히 괘씸했다. 그는 보기보다 훨씬 소심한 것이 틀림없다. 결국 나는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누나로서 그에게 먼저 한 발 다가섰다. (나는 그보다 한 살 많다)


우리의 첫 싸움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피곤했던 우리는 금방 취기를 느꼈다. 현우 감독 또한 밤샘 촬영을 마치고 늘 나를 찾아와 동네를 걷거나 카페에 가는 등의 몇 시간을 더 보내느라 늘 수면부족에 시달리던 때였다. 그래서일까. 그날따라 현우 감독은 평소보다 훨씬 빨리, 나보다도 먼저 술에 취했다. 그리고 그때, 그가 그렇게 취했을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어야 했다.


술에 취한 현우 감독은 갑자기 술주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나와 전 연인을 비교하는 위험천만한 주제로.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너무 이기적이고, 나밖에 모른단다. 그에 반해 전연인이었던 친구는 모든 걸 자기에게 맞추고, 자기만 바라봤던 해바라기 같은 사람이란다. 뭔 개소린지. 나는 정말 그 자리에서 현우 감독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지성인답게 꾹 참아냈다. 하지만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기껏 힘든 몸을 이끌고 나왔더니, 하는 소리 하고는. 감히 어디서 절대 금지어인 ‘전여친’이라는 단어를 꺼낸단 말인가? 나는 배신감에 술이 확 깼다.


일그러지는 내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신을 놓고 취해버려 쉬지 않고 지껄여댔다. 그녀는 예뻤고, 자기에게 희생했고, 자기만을 바라보며 기다렸고... 나는 당최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왜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술 취한 사람을 상대로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나만 답답한 것은 매한가지일 터, 나는 모든 걸 포기한 채 그의 말에 최대한 상처받지 않으려 받아쳤다. 그리고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네 말대로 얼마나 예쁜지 한번 보자”


그는 풀린 눈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나에게 전 연인 사진을 보냈다. 그 과거의 사진을 어디에 어떻게 보관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진 속 현우 감독과 그녀는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취한 와중에도 참 예쁜 사진을 골라 보내기도 했다. 두 눈으로 그녀의 존재를 확인한 나는 이미 이성의 끈을 놓았다. 그가 이 사진을 여태 갖고 있었다는 사실도 화가 났고, 나에게 굳이 이런 사진을 보내 내일이란 없는 것처럼(?) 내게 상처 주는 것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버리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현우 감독은 영문을 모른다는 듯 내게 그 친구의 사진이 왜 우리의 카카오톡 대화창에 있는지 물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아 그의 연락을 오는 족족 무시했다. 쏟아지는 메시지와 전화에도 죽은 척했다. 그러자 그는 일을 마친 늦은 새벽, 나를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여간 답답해하는 표정으로 날 마주한 그는 쉴 새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내용인즉슨 마음이 점점 깊어가는 자신과는 달리 내 마음은 전혀 깊어가는 것 같지 않아 불안했다고. 그러던 중 질투심이라도 유발해 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했는데, 술주정으로 그렇게 나온 것이라고. 자신은 정말 전연인에겐 어떠한 미련도 남지 않았다고, 모든 것은 오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미 내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때 처음, 현우 감독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사랑하는 이와의 싸움에 마음이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이토록 나를 비참하게 한 사람은 없었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조차 모르겠는 답답한 심정이었기에. 마음이 복잡한 나는 입을 꾹 다물었고, 현우 감독은 옆에서 이런 나를 채근했다. 쉴 틈 없이 사과를 하며 내가 마음을 풀길 재촉했다. 나는 그의 성화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와의 첫 싸움에서 나는 우리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이란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싸우는 방법도, 푸는 방법도 전혀 달랐다. 나는 결국 답답해 죽을 듯 보이는 현우 감독의 사과를 억지로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침대에 뻗어버린 나는 그와의 연애 3개월 만에 이별을 고민했다.


남편과 함께한 지 7년, 나는 아직도 그와 싸울 때마다 너무 버겁다. 감정이 끓어오르는 순간 말이 없어지는 나와 달리 그는 늘 설명하고 이야기하고 그 자리에서 풀어야 하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그런 그가 나의 멱살을 쥐고 사과를 받을 때까지 흔들어대는 것 같아 어지럽다. 하지만 그는 내가 늘 부탁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내가 자신의 사과를 받을 때까지 끊임없이 재촉하곤 한다. 아마 ‘싸움’이란 걸 길게 끌고 가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 일거라 짐작은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의 속도가 부담스럽다.


현우 감독과 함께한 긴 시간 동안 내가 가장 크게 깨우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연인, 부부사이에서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화해하는 것도 엄청 중요하다는 것. 우리는 아직까지도 종종 미친 듯 싸워대고, 제대로 화해하는 법을 알지 못해 서로에게 더 상처를 주곤 한다. 아니면 두 손 놓고 바보처럼 시간에 맡기거나. 하지만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변화하고 있는 우리를 알기에.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우리가 서로의 속도에 맞춰 따뜻한 포옹과 사과를 건넬 수 있길. 오늘도 바라본다.


☑ 남편과의 연애 세 달 차: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비참함을 느끼며 이별을 고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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