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으로 가는 중입니다

이전 포스팅 퇴고한 글입니다.

by rosa

가끔 청소가 미치게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일정한 주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끌어다 붙일 이유도 궁색하다. 그저 청소가 마려운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집 나갔던 아들이 아무런 예고 없이 다시 짐을 끌고 들어와 방 안에 미로를 만들어 놓았다. 나갈 때도, 들어올 때도 의논 한마디 없이 일방적인 아들에게 내가 뾰족하게 말했다.


“나가는 것도 처음이었고 들어오는 것도 처음이니까 이번만 봐줄게. 두 번은 없어. 그래도 돌아온 건 좋다. 환영해.”


어쩌면 한두 달 사이에 또 나갈지 모른다던 아들, 몇 달 동안 움직이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정리 좀 하자.’ 그렇게 미로 같은 아들방 청소가 시작되었고, 결국 대청소로 번졌다. 청소 중에는 잊고 지내던 물건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버려야 할지, 남겨야 할지 망설여지는 물건들이 쌓여갔다. 비 오면 샐 것 같은 운동화,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책 더미, 오래전 유행 지난 색 바랜 옷들. 하나같이 쓸모없는 것들이지만 그 안에는 아들의 시간이 들어 있었다. 이사할 때마다 따라다니며 공간을 차지한 물건들. 우리는 물건을 쓰며 산다기보다, 물건을 모시며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말끔하게 정돈된 집에 여백이 생기자 내 마음에도 슬그머니 여유가 찾아왔다.

땀을 식힌 아들이 낡은 선풍기 하나를 꺼내왔다. 회전 손잡이가 빠져나가 구멍만 남았고, 겉은 꼬질꼬질 세월의 더께로 덮여 있었다. “못쓰겠다. 버리자.” 말하려는데….

눈에 먼저 들어온 건 안전망에 묶인 금색 철사 끈이었다. 동시에, 아버지가 생각났다.

“안전망이 헐겁네.”


빵 봉지 묶었던 철사 끈으로 선풍기 망을 고정하는 젊은 아버지가 환하게 소환됐다.

1989년 여름, 우리 집에 첫 손녀가 태어났다. 무더위 속에 태어난 아기를 위해 알뜰하기만 하던 아버지가 생애 처음으로 에어컨을 장만하셨다. 근엄하기만 하던 분이 손녀의 배냇짓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함박웃음을 지었다. 담뱃갑을 기준 삼아 아이의 크기를 재어보던 모습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동화처럼 남아 있다. 무뚝뚝하게 담배만 피우던 아버지가 손녀를 앞에 두고는 하루에도 몇 번씩 환하게 웃으셨다. “이 손바닥만 한 게 금세 사람 되겠지.” 하시던 목소리도 귀에 선하다. 그 여름, 손녀를 위해 처음 사온 에어컨은 가족의 자랑이었고, 그 대신 밀려난 선풍기는 구석에 처박혀 오랫동안 묵언수행을 시작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부모님은 산속에서 전원생활을 시작하며 살림살이 일부를 나에게 주셨다. 꼭 필요한 물건이 공짜로 생겼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그 안에 부모님의 체취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내겐 더 소중했다. 오래 쓴 접시, 빛바랜 찻잔, 마루에 놓이던 작은 의자 하나에도 두 분의 시간이 배어 있었다. 그 물건들 속에 선풍기도 있었다. 회전 기능은 이미 고장 나 있었지만, 한 방향으로만 바람을 보내도, 철사로 고정한 덮개가 덜덜거려도 여름을 버티기엔 더없이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선풍기를 오늘 다시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환생한 듯 마음이 달아올랐다. 무뚝뚝했지만 손재주 좋고, 가끔은 촌철살인 유머를 날리던 아버지. “야, 저 선풍기 소리 들어봐라, 아직 힘이 있네.” 하고 웃으셨을 것 같다. 지금 살아 계셔서 증손주 복돌이를 만나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상상만으로도 그리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오랜만에 선풍기 묵은 때를 닦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처음에는 슬로모션으로 힘없이 돌더니, 이내 쌩 하고 바람을 내뿜었다. 모터가 낡아서 저속에서는 비실댔지만 고속에서는 제법 힘을 냈다. 맥가이버 뺨치던 아버지가 하늘에서 보내준 선물 같은 바람. 덜덜덜 소리를 내어도 여전히 선풍기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시원함을 선사했다.

어쩌면 이번 여름이 이 선풍기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나는 차마 이 선풍기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낡은 바람, 세월의 흔적 속에 여전히 아버지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물건은 결국 고장으로 가는 중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기억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선풍기를 바라보다 문득 내 삶도 겹쳐졌다. 나 또한 세월을 따라 조금씩 고장 나가는 중일지 모른다. 허리도, 무릎도,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선풍기가 그러하듯, 아직 본분을 잊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싶다. 자식에게 힘이 되고, 손주를 사랑하며, 세대를 이어가는 본분 말이다.


이제 선풍기는 고장으로 가는 중이지만, 여전히 바람을 보내며 내 곁에 있다. 소곤소곤 다정한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아버지의 목소리와 웃음을 실어 보낸다. 덕분에 내 뜨거운 여름이 다시 즐겁다.

힘내라, 선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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