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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층아줌마 Jan 14. 2016

어머니, 우리 어머니

어머니를 처음 뵜을 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여자친구에서 결혼할 사이로 관계가 발전하던 그 즈음, 남편은 집에서 어머니를 만나서 인사를 드리겠느냐고 조심스레 나의 의견을 물었다.

결혼이 단순히 두 남녀간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나 또한
어머님을 뵙고 인사드리는 과정이 당연히 거쳐가야 하는 통과의례라 생각하고 있었고, 
평소 어른들과의 만남이 별로 어려워하는 타입은 아니었어서 별 이견없이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했다.
다만 남편이 입버릇처럼 어머니가 무척 쎄고 무서운 분이시라는 것을 얘기해 왔기에 만나기 전에 조금 겁이 나기는 했다.


어머니를 뵙기로 한 날.
가지고 있는 옷 중에 얌전하지만 불편하지는 않되 나만의 센스를 보일 수 있는 옷을 골라서 순천으로 내려갔고, 첫 방문 예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예쁜 꽃다발을 한아름 준비했다.

어머니와 만난 자리.
어머니는 별 말씀 없이 나를 한참 살피셨다.
그리고는 첫 말씀은 이랬다.
"네가 내 식구가 될려는지 나는 네가 참 이쁘다"

그 한 말씀으로 나는 어머님의 허락을 '득'한 것이었다.

긴장 속에서 눈물을 한바탕 쏟을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까다로운 어머니가 나를 받아들이셨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얘기를 한참 나누다 집을 나왔고, 그 뒤로도 결혼전까지 이따금씩 전화통화를 하며 어머니와 마음을 나누어갔다.




어머니는 채 마흔이 되기도 전에 혼자 되셨다.
1984년. 국민학교 6학년이던 남편과 나는 당시 한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가을 언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버지가 위독하다며 담임선생님이 남편을 데리고 나갔다. 나중에 결혼해서 알고 보니 추석전날이 시아버님의 기일이었다.

쌀을 마당 한가득 쌓아두고 살았다는 방앗간집에서 자란 어머니는 어려울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그러다 위로 치이는 무능한 오빠들이 너무 보기 싫어서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고, 졸업한 뒤에는 선이나 보라고 건네받은 사진 속 그 남자가 나름 깔끔하게 생겼길래 결혼을 결심하셨단다.

시골에서 출판사(아마도 지역 대리점 같은)를 하셨던 시아버지는 어머니께 너무도 다정하셨지만 무능한게 탈이었다고, 사업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사람좋아서 어떻게 돈을 벌었겠느냐고... 어머니는 한탄스레 말씀하곤 하셨다.

그러다 아버님의 간에 문제가 생기셔서 광주에 있는 전남대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병원가는 길에 점심이라도 사먹고 오라고 용돈을 드리면 그 돈을 모아서 어머니 옷을 한번씩 사오셨단다.

165cm가 훌쩍 넘는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어머니는 어떤 옷을 입어도 멋지게 소화하는 편인데, "왜 또 옷을 사왔느냐고" 잔소리 하시는 어머니 앞에서 아버님은 사오신 옷을 어머니께 입혀보고 이쪽으로 돌아보라 저쪽으로 돌아보라 하시면서 예쁘다고 만족스러워 하셨단다. 
남편은 여러 모로 아버님을 그대로 빼닮았다. 만약 살아계셨다면 큰 며느리인 나를 참 아끼셨을 것 같다.

그러나 아버님은 끝내 병을 이겨내지 못하시고 투병생활 끝에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셋과 빚만 잔뜩 남긴 채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하셨다.
아버님이 종손임에도 불구하고 해남에 있는 본가에서는 혼자되신 어머니를 본채만채 해서 단칸방에서 한참 나이의 아이들 셋과 함께 생활해야 했다.

딸사랑이 유별나셨던 아버님이 떠나신 뒤 큰딸인 누나는 방황을 멈추지 못했고 그런 누나가 안쓰러웠던 착한 남동생들은 집에 돈만 생기면 자기들은 괜찮으니 누나 필요한 것 사주라고 어머니께 얘기하곤 했단다. 그 힘든 시기에도 자식들이 기죽는 것이 싫어 자식들 도시락만큼은 엄청 챙기셨다고...

한참 민감하던 시기에 한방을 쓰는 것이 불편했던 남편도 집에 들어가는 것이 불편해서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 집을 전전하곤 했다 하니 얼마나 숨이 막히는 생활이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머니께 지난 긴 시간동안 재혼할 생각이나 기회는 없으셨는지 여쭤봤던 적이 있다.
"왜 없었겄냐.... 나 좋다는 남자 많았다. 어떤 남자랑은 같이 살아볼까 하고 그집 가서 잠깐 지낸 적도 있었는디, 정도 안 가는 이 남자 밥해주느니 내 새끼들 밥해주면서 평생 사는게 낫겄다 싶드라... 그래서 짐싸갖고 집에 와뿌렀다."  
어머니의 성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씀이셨다.

유별나다면 유별난 며느리를 어머니는 참 예뻐하셨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박완서 작가의 신간이 나오면 바로 사서 손편지와 함께 순천으로 부쳐드렸고 그 뒤에 만나면 책에 대해 어머니랑 얘기를 나누기도 했고, 어머니를 한번씩 뵐 때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해가 저무는지 모를 정도로 좋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나는 거침없는 어머니와의 대화가 참 좋았다.

그렇게 좋은 어머니가 무섭다는 선입견을 심어준 남편이 왜 그랬는지 궁금해졌다.
살아온 길이 수월치 않으셨던 어머니가 쉬운 분은 분명 아니었기에 혹시 생길지 모르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려고 그랬단다. 참나... (남편의 전 연애사에서 아마 유사한 일이 있었던 걸로 짐작한다....ㅎㅎ)

어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장애를 갖게된 주언이를 늘 밝은 모습으로 키우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늘 응원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니가 워낙 씩씩하고 현명한께 주언이 잘 키울 것이다...." 이렇게...

그러던 어느날, 영국으로 떠날 계획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렸을 때에도 어머니는 
뒤늦게 모험을 선택한 우리 부부에 대한 우려나 걱정보다도 신뢰와 응원과 함께 재정적으로 지원을 해주지 못하시는데 대한 미안함을 내비추셨다.
오히려 혼자 지내실 어머니를 걱정하는 우리에게 어리석은 소리 말라며....

우리가 영국으로 떠나온 뒤, 
어머니는 노인복지관을 다니시며 제2의 화려한 황혼기를 맞으셨다.
남편이 어머니의 운동신경을 물려 받은 것인지, 어머니는 탁구를 정말 잘 치셨다.
워낙 잘 하시니 복지관의 대표선수로 뽑히시기도 하고, 할아버지들과 한번씩 치시면서 마음에 드는 할아버지랑은 썸도 타며 소위 '로맨스그레이'를 이어나가셨다.
우리가 괜한 걱정을 했다 싶을 정도로 말이다.

얼마나 고맙던지....
어머니가 혼자서 쓸쓸하게 지내신다면 타국살이를 선택한 우리가 얼마나 죄송했겠는가...
그러나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노인복지관의 인기녀'에 대한 흥미진진한 얘기를 듣느라 한시간씩 전화를 붙들고 있을 때도 있었다.




작년 가을 10일 정도의 짧은 일정으로 무리해서 한국을 다녀왔던 것은, 
지난 4월 췌장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 투병하고 계신 어머니를 뵙기 위해서였다.

더 늦기 전에 어머니를 뵙고 좋은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아버님이랑 지냈던 얘기, 남편 어린 시절의 얘기도 듣고 싶었다.
그러나 같이 지냈던 짧은 기간 동안 어머니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결국 병원에서 인사를 드리고 영국을 떠나와야 했다. 

어쩜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작별 인사를 드리는 그 자리에서도 어머니께서는 
"잉... 일년 좀 넘으믄 들어온다매... 뭣할라고 여기까지 인사를 하러 왔냐... 나중에 돌아와서 보믄 되제....."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평소 멘탈이 무척 강한 편인 남편 또한 투병하시는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나보다 더 의연하시다"라는 얘기를 하곤 한다.




그 뒤로도 입퇴원을 반복하시던 어머니께, 어제 병원에서는 이제 더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시던지 아님 그냥 병원에 있으라고 했단다.
남편은 할말을 잃었고 나또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틀전 통화에서도 "잉... 사람들이 전화 목소리만 들으믄 암시랑토 않다 글드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 목소리는 짱짱하셨다.
그 목소리가 너무 카랑카랑해서 전화를 끊고 나서 오히려 내가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

칠십 가까이 되어서야 어머니는 즐겁게 사는 인생이 무엇인지 아셨고, 그렇게 살아가는 중에 계셨다.
그런데 왜 우리 어머니가 그 인생을 더 즐기시지 못하고 병에 굴복해야 하는지 화가 난다.

부디, 남은 시간, 어머니가 당신의 인생을 차분히 잘 정리하실 수 있길...
그리고 그 사이에라도, 기적이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 어머니께 찾아와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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