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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훈 May 16. 2016

브루클린

자유와 인간 됨, 사랑으로의 여정

브루클린(2015)

 영화 <브루클린>은 1950년대 브루클린으로 이주 온 아일랜드 여성 에일리스 레이시의 이야길 다룬 영화이다. 영화는 아일랜드에서 언니인 로스의 조력으로 더 나은 삶,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에일리스가 이곳에서 향수병을 앓고, 새로운 삶을 견뎌가며 공부와 일, 연애를 병행하면서 브루클린에서의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과 언니인 로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급거 아일랜드로 돌아와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리고 돌아온 아일랜드에서 에일리스가 내린 어떤 결정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많은 이들은 영화를 잔잔한 멜로 드라마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렇다. 영화는 분명 멜로적 요소를 가지고 있고, 영화의 멜로적 속성은 이 영화의 포장지이며 동시에 중요한 매력 포인트 중 하나이다. 토니와의 우연한 만남과 에일리스가 다니는 야간 대학 정문에서 기다리던 토니와 에일리스의 대화는 사랑스럽고 귀엽기 그지 없다.(작가와 번역가가 이 사랑스러움을 잘 살렸다는 생각이다.) 처음 겪어온 사랑이란 감정에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중간에 아일랜드 귀국에서 흔들림을 겪는 과정(그 흔들림의 대상이 무려 어바웃타임의 팀이다! 그러고 보니 시얼사 로넌과 도널 글리슨은 둘다 아일랜드인이다 ㅋ)은 이 영화가 어느 여성이 자신이 놓인 두 세계의 멜로 사이에서 갈등하는 영화인것 처럼 보이게끔 한다. 하지만 <브루클린>이 정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멜로물로 분류 가능한 영화일까? 솔직히 난 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보고 싶다. 영화를 소개하는 마케팅 전략과 한국판 포스터는 영화의 멜로적 속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영화의 큰 줄기는 사랑의 문제이지만 사실 이 영화는 흔한 멜로영화와 다른 어떤 요소들이 추동하고 있다. 난 멜로가 이 요소들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어떤 감정이입의 기회와 더불어 두 가지 표상체계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설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에 이 영화를 단순한 멜로물로 이해하기 보단 대중적이고 연성화된 젠더 영화로 이해하는 것이 더 많은 설명력과 타당성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영화를 연성화된 젠더 영화, 여성 해방과 자유의 서사로 볼 수 있는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영화 속에서 에일리스에게 아일랜드는 보수적 카톨릭의 전통과 농촌 공동체가 만나 만들어낸 구조 체계이다. 이 아일랜드라는 체계는 폐쇄적이고 관습의 이름으로 연성화된 억압과 제약이 작동하고 있는 공간이다. 극중의 대화를 반추해보면 에일리스는 똑똑한 여성이지만 아일랜드에서 일자리를 갖지 못해 사실상 명예남성에 권위주의와 가톨릭 보수주의에 찌든 켈리 여사의 '시덥잖은 식료품점' 종업원이나 하고 있다. 하지만 회계사로 있는 로스 언니(언니는 이 사회의 일반적인 표상 체계 외부에 있는 인물로 봐야 할것 같다.)의 조력으로 그녀는 브루클린으로 떠난다.

  비록 브루클린에서도 아일랜드 이주민 커뮤니티에 속해 있지만 그곳은 아일랜드 본토의 그것에 비해 훨씬 세속화 되었고 자유로운 공간이다. 여전히 그곳에도 아일랜드인들의 카톨릭 커뮤니티가 존재하고 아일랜드계 이주 여성들의 하숙집을 운영하는 키호여사는 독실한 신자지만 본토의 켈리 여사와는 완전히 비교되는 인물이다. 그런면에서 브루클린이란 공간은 아일랜드와 비교되는 구조가 작동하는 공간이다. 아일랜드에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사랑을 얻지 못하였으며 가톨릭적이고 전통적 농촌 공동체의 구조 속에 잡혀 있었지만, 브루클린에 오며 그녀는 더 나은 삶이 가능한 구조 속에 들어서게 되었다. 비록 가톨릭 교회의 신부와 언니의 조력이 있었지만 그곳으로의 이주와 그곳에서의 생활은 온전히 그녀의 선택의 결과였다. 즉 브루클린으로의 이주 자체는 억압적이고 숨 막히는 생활에서 선택을 통한 벗어남이었다.

  당장 켄 로치의 <지미스 홀>과 같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20세기 초중반 아일랜드 농촌 사회의 현실에서 여성, 그것도 더 나은 삶을 갈구하는 여성의 삶이 어떠하였을지 반추해보길 바란다. 만약 켄 로치가 재현해낸 그 공동체의 현실이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전제하면 앞에서 말한 구조 체계, 표상 체계로 <브루클린>의 아일랜드를 이해하는 것은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를 통해 영화는 브루클린과 아일랜드라는 두 개의 삶의 구조를 비교하여 보여준다. 아일랜드는 심적으로 안온한 봄햇살 같다. 가족과 친구가 있고 익숙하고 그리운 공간이지만 여전히 그곳은 그녀를 억압하고 제약하는 관습과 장치들로 가득하다. 그곳에서는 시선들 조차 그녀를 제약한다. 하지만 브루클린에서는 자유로운 사랑과 더 나은 삶의 기회가 존재하며 동시에 그곳에선 그녀가 져야할 책임들이 존재한다. 마을로 돌아와 다시 만난 켈리여사에게 에일리스가 말한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잊었었다."라는 말은 친구와 가족이 주는 안온함과 버무려져 그녀의 삶을 다시 잠식하려던 이 아일랜드의 구조에 대한 자각이 아니었을까? 아일랜드-브루클린-아일랜드 그리고 다시 브루클린으로 돌아가는 이 '신화적 여정'은 에일리스에게 주체적 인간, 생동하는 욕망이 있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이 과정에서 에일리스는 종교와 세속, 은근한 강요와 제약-자유로운 선택과 책임, 관습과 자유, 표상 체계 내에서의 소극적이고 대상화된 여성-자유롭고 욕망을 가진 주체 사잉서 투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에일리스의 모습은 한편 동시대 뉴욕이란 배경을 공유하는 영화 <캐롤>에서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의 모습과도 묘하게 비교된다. 세 사람 모두 당시 주류 사회가(단 그들이 놓인 주류 사회가 공간적으로 다르다.)가 요구하는 표상체계에 대해 맞서는 사람들이다. 케이트 블란쳇에서 그것이 남편과 루니 마라 사이였다면 에일리스에게 그것은 아일랜드와 브루클린 사이에 있을 것이다. 이런 구조와 구조 사이에서의 내적, 외적 갈등의 구조로 이 영화를 풀어 본다면 이 영화는 마냥 잔잔한 멜로물 보다는 그 잔잔함 속에 뭔가 큰 에너지가 응축된 '자유와 주체성을 위한 저항의 과정'이 담지된 영화로 보는게 좀 더 온당하지 않을까?

  한편 영화는 19세기 후반 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아일랜드나 이탈리아 등으로 부터 미국을 향해 전개된 거대한 이주의 역사를 반추하게 해준다. 에일리스가 브루클린의 아일랜드 교회 커뮤니티에서 우리가 아는 현대 뉴욕의 초석을 닦은 아일랜드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과정에서 한 아일랜드 노인이 구성지게 부르는 아일랜드 민요, 영화 초반 브루클린에서 적응을 위해 분투하는 에일리스의 모습 같은 장면들은 이 영화가 충분히 당시 미국 문화사이자 이주사의 한 장면을 반추하게하는 부분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내겐 이주의 경험이 없다. 내 인생에 내 고향이자 삶의 터전 대구를 떠나 가장 오랜 시간 체류한 것은 16년 전 병으로 입원한 서울대 병원에서의 만 2달여가 전부이다. 그런 나이기에 이주의 경험은 언제나 동경과 탐구의 대상이다. 문득 영화를 보며 브루클린에 처음 도착한 에일리스의 모습에서 몇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당신들이 그곳에 처음 발 디뎠을때 그 마음은 어땠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덧. 원본에서 영화 <브루클린>에 담긴 ‘연성화 된 젠더물’의 속성과 이주와 이산을 다루는 영화라는 두 속성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하지만 이주와 이산의 문제에 대해 추가적인 언급이 필요하다 판단되어 아래의 보론을 첨한다.



에일리스의 고향은 어디인가?




영화 <브루클린>의 극 속에서 에일리스는 고향을 등 진 자이다. 비록 고향을 등지는 과정, 언니와 엄마와 이별하는 과정, 자체는 비록 적극적인 억압과 배제의 산물은 아닐지언정 어쩌면 그 이주는 극 중에서 묘사되는 아일랜드의 보수적 가톨릭-촌락 공동체가 주는 어떤 질서와 구조가 만든 필연성의 결과에 가깝다. 즉 에일리스는 똑똑하고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여성’이지만 보수적인 이 촌락의 대면사회의 관습과 구조 체계는 에일리스에게 한 사람의 주체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지 않았다. 아 그녀에게 허락되는 공간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주체적 인간의 공간이 아니라 이 보수적인 가톨릭-촌락 공동체의 표상 체계 내에 존재하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공간일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언니 로스의 조력으로 공간을 떠났다. 기차를 타고 생애 처음인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여객선을 타고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녀가 정착한 뉴욕의 브루클린은 그녀에게 사실상 어떤 연고도 기반도 없는 타지이다. 비록 아일랜드계 커뮤니티가 존재하고 우리가 아는 현대적 뉴욕의 외형을 아일랜드계 이주자들의 노동이 빚어냈을지언정 브루클린은 아일랜드가 아니었다. 비록 아일랜드계 커뮤니티의 보호를 받고 그곳 신부의 도움으로 직장과 거주지(아일랜드계 여성들의 집단 하숙집)를 획득하고 (언니 로스를 이어) 회계와 경리를 배우는 대학에 다니게 되다. 물론 여전히 그녀는 이산과 이주가 주는 괴로움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녀의 공간은 어디인가? 우리는 물어 보아야 한다. 그녀는 어디에서 인간으로, 주체로 설 수 있는 공간을 받았는가? 그건 아일랜드가 아니라 브루클린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 그동안 제약받고 외면 받아온 자신의 잠재성, 사랑, 주변의 진심 어린 환대를 경험하였다. 물론 그것이 타자를 향한 절대적 환대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여러 의미에서 에일리스는 브루클린, 미국이란 공간이 주는 어떤 환대 체계 내에서 주체로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것이 그녀가 회계에 재능과 뜻이 있고, 훌륭한 문자 해독능력과 쓰기 능력을 가졌으며(놀랍게도 그의 반려자 토니는 거의 문맹에 가깝다), 머리가 좋고 적응력이 좋기 때문에 얻은 환대이며 기회일지 모른다. 즉 아일랜드에서 그녀를 제약하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가톨릭-촌락 사회의 구조와 지금 브루클린의 구조 사이에서 그녀가 기입되는 어떤 사회적 의미와 값이 다르기 때문에 그녀가 환대 받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를 미국으로 올 수 있게 한 로스 언니와 신부 그리고 이곳에서 정착을 지지하는 키호 여사의 노력과 애정, 토니와 그 가족들의 사랑 더 나아가 미국행 배에서 그녀에게 도움을 준 여인의 호의와 환대는 앞에서 말한 그런 류와 또 구분되는 종류의 환대 아니었던가??

  에일리스는 봄날의 햇살처럼 따사롭고 안온한 고향을 떠나서야 환대 받고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과연 고향이란 어디일까? 그녀가 미국에 발 딛은 초기 그녀의 고향은 아일랜드였겠지만 돌아온 아일랜드에서 떠나 브루클린으로 돌아온 그녀의 고향은 더 이상 아일랜드가 아닐 것이라 짐작해본다. 고향은 마냥 태어난 곳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어떤 계기를 획득한 공간, 주체이자 인간으로 유의미한 삶을 살아가게 된 자존을 획득한 공간 그곳이 바로 고향이지 않을까? 이어지는 맥락에서 아래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이야기의 서사는 "주체로서 사람 됨을 획득하는 과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돈 많은 상인인 욘씨네 집 마당. 한 신사가 서 있고, 그 앞에는 수많은 구경꾼들이 둘러서 있었다. 그 신사는 망원경이건 주단이건 삼두(三頭)마차건 사람들이 희망하는 것은 모두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직 어려서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모르는 실레밀은 그 재주가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부러워하는 모양을 지켜본 신사는 실레밀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지니고 있는 그 멋진 그림자를 내게 주신다면, 이 행운의 주머니를 당신에게 드리지요. 이 주머니는 원하는 것은 아무 것이나 얻을 수 있는 주머니랍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의 그림자 따위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불필요한 것보다는 쓸모 있는 주머니가 얼마나 값진 것 인가. 그렇게 생각한 실레밀은 그 교환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실레밀은 그 회색 신사에게 자기의 그림자를 넘기고, 그 대신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러나, 그림자란 그렇게 쓸모 없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림자가 없는 실레밀은 모든 사람들한테서 놀림을 받게 되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외톨이가 되어 아무도 친구가 되려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쓰라림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아가씨 미나한테서 백작으로 오인되어 약혼까지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전에 그의 하인으로 있던 성질이 비뚤어진 라스칸에게 배반당하여 그림자가 없다는 비밀을 미나에게 들키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미나의 순수한 사랑조차 라스칸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약속 기한이 지나자 그 회색의 신사는 다시금 나타났다. 그는 실레밀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그림자도 그리고 그 행운의 주머니도 드릴 테니까 당신의 영혼을 내게 주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지금까지 자기가 거래해 온 회색의 신사가 사실은 악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실레밀은 그 유혹을 물리치고 말았다. 그는 그 행운의 주머니조차 산골짜기에 집어 던져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되는 것이었다. 실레밀은 자기에게 남아 있던 돈 전부를 털어 헌 장화를 하나 사서 신었다. 그러자 그 장화의 이상한 힘으로 그는 나는 듯이 세계를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실레밀은 자연과학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고, 외롭기는 하지만 고요한 행복을 거기서 발견할 수가 있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림자를 판 사나이 (세계문학사 작은사전, 2002. 4. 1., 가람기획)


2015년 상반기에 나온 인류학자 김현경의 책 <사람 장소 환대>의 서문에서 인용되는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 대한 네이버 지식백과의 요약이다. 문득 여기서 그림자와 악마, 장화의 비유가 브루클린에 왔다가 다시 아일랜드로 간 이후 브루클린으로 돌아오는 에일리스의 여정과 유사하게 읽힌다. 김현경은 여기에서 그림자를 사람됨을 수행하기 위한 스티그마로 유비했다. 에일리스에게 사람됨의 스티그마는 무엇이었을까?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남자는 악마에게 보물주머니를 댓가로 그림자를 팔았지만 에일리스는 그 어머니가 주는, 모국이 주는 안온함과 친구인 낸시, 새롭게 그녀를 설레게 하는 짐 페럴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에게 새로운 삶, 잠재성의 삶, 자신이 선택한 토니와의 사랑이 있는 땅 브루클린을 포기할 뻔 한다.(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그림자를 팔았기에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에 실패한다. 멋진 그림자가 없는 이에게 딸을 내어줄 부모는 없다면서) 그녀가 하나의 유기체로 형성되고  공간은 아일랜드였지만 그녀에게 사람됨을 부여한 공간은 브루클린 아니었을까? 결국 남자가 그 마술 주머니를 포기함으로써 자유로워지고 또 다른 사람됨의 기회를 얻었듯이 에일리스 역시 태어난 곳으로서의 고향을 포기하여 외롭지만 참 된 인간 됨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아 물론 우리의 팀...아니 짐 페럴은 매력적이지만..)

  영화는 이런 맥락에서 어떻게 하나의 게젤샤프트(Gesellschaft)이자 이주자들의 도시인 뉴욕(의 브루클린)이 어떻게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주체성을 획득하게 하는지도 생각해보게끔 한다. 그곳은 도시화된 공간이며 이익과 이해, 필요에 바탕한 사회이기에 누군가의 인신과 그가 위치해있는 표상 체계에 무신경 하다. 오히려 그 적정한 냉담이 있기에 그곳의 사람들은 에일리스가 어느 교회에 다니며, 누구의 딸이며 누구의 여동생인지, 누구의 친구인지와 같은 질문으로 부터 자유롭고 그렇기에 오히려 그녀가 누구이며 무엇을 좋아하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더 천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녀가 토니와 짐 사이에서 흔들리는 과정에서 '어른'들의 상이한 역할은 호혜성과 밀도 있는 관계로 뭉쳐진 아일랜드의 농촌 사회가 호혜성과 윤리, 관습의 이름으로 어떻게 누군가의 삶을 제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오히려 끈끈하고 들러붙은 연대 보다 느슨한 연대와 환대가 인간을 자유롭고 책임 지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브루클린>은 보수적 가톨릭-촌락 공동체라는 공간으로 부터 벗어남으로써 벌어지는 여성 해방, 인간 자유의 이야기를 사랑과 이주, 커뮤니티의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영화이다. 우리는 그 영화의 구조를 드러내는 멜로의 구조에 주목하지만 이 영화는 그 내부의 다양한 요소들로 인해 더 다양한 이해와 해석이 가능한 영화이다. 그렇기에 <브루클린>을 본 많은 이들은 이 영화를 마케잉 된 '멜로'로 부터 벗어나 좀 더 다양한 맥락 속에서 봤으리라 기대해본다. 영화는 그래야 재밌어지는거니깐^^


http://seehun.tistory.com/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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