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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훈 Jan 05. 2022

촛불들의 공화국

(미완성 된 글…)


촛불들의 공화국(2017.01.04)


1.들어가며


  역사는 때론 기시감으로 가득 찬 장면들의 반복으로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차이와 반복의 통사구조가 고대인들이 지녔던 순환론적 역사론이나 인간 존재로부터 기인하는 어떤 법칙론을 곧장 뜻하지는 않는다. 각 컷들을 한 장 한 장 볼 때는 반복 같지만 이 컷들을 하나의 릴에 묶어 살펴볼 때 우리는 이 비슷해 보이는 씬들 사이의 차이를 인식 할 수 있다.

  이번 촛불도 그러했다. 이미 우리가 근래 13년간 봐온 무수한 패배와 좌절의 경험들이 투시되며 이 촛불의 광장은 기시감으로 가득 찬 공간이 되었다. 촛불은 우리 시민사회의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저항과 집회 시위의 양식이지만 동시에 그 아래 깊숙한 곳에는 무력감과 패배의 아이콘으로 촛불이 존재했다. 촛불이 주는 강렬한 시각적 효과, 거친 야성을 제한하며 연성화되고 말랑말랑한 문화제로의 전환, 누구나 쉽게 가벼운 마음으로 나올 수 있는 마당 등 양식으로 촛불의 무수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정작 촛불은 온전한 승리를 거둔 적이 많지 않다. 촛불이 본격적으로 지배적 저항의 양식으로 등장한건 2002년 효순이 미선이 투쟁이었던 것 같다. 비극이 터지고 반년 후 사람들에게 알려진 이 사건은 당대의 진보적인 사회 분위기와 조응하여 한미관계의 재설정을 요구하는 거대한 촛불의 바다를 만들어 냈다. 이후 촛불은 한국 당대사의 중요한 기점 마다 나타났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보수세력의 탄핵폭거 때도, 한미FTA, 미국산 소고기 수입, 용산참사, 쌍용차, 등록금 정국, 국정원의 댓글 심리전,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시민사회와 진보진영은 국가를 향해 촛불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우리는 매 촛불의 가장 마지막 촛불을 기억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경우 촛불의 끝은 이 지구전의 패배였고 해결을 요구한 문제는 전혀 개선되지 않거나 역으로 반동적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2016년의 촛불은 좀 다른 경로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시민들의 저항과 불복종을 통한 직접적인 퇴진을 쟁취하진 못했지만 의회에서의 압도적인 탄핵 표결을 이뤄냈고 공중의 여론과 의회 내부의 분위기 등은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소추안의 인용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탄핵 이후에도 시민들은 비록 다소간 규모는 줄었지만 여전히 광장을 지키고 잇다. 성탄 전야에도 그들은 광장에 모였고, 올해의 마지막 날에도 역시 동료 시민들과 어깨를 마주하고 광장에서 송년과 변혁의 시간을 맞을 것이다.

  자연스레 <포스트 촛불>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나오고 있다. 촛불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성격과 배경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한 이 담론은 향후 있을 대선이나 개별 정당의 경선 더 나가 개헌과 맞물리며 상당히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 대중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본문은 그 가운데 노정태의 경향신문 기고글에 대한 비판을 위해 글쓴이가 생각하는 2016년 촛불의 의미아  이후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을 정리한다.


2.  노정태 비판


  2016년의 광장은 기시감의 구조에서 벗어났을까? 일견 볼 때 촛불은 나선형으로 차이와 반복 사이를 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박근혜 정권은 탄핵 되었고, 1951년 자유당 창당 이후 이어져온 냉전 보수 세력의 정치적 독과점에도 균열이 일어 났다. 그 어느때 보다 야권 대통령 후보들은 그들의 덕성과 인품, 역량을 경쟁적으로 뽐내고 있고 그 누구도 범 여권의 대통령 당선을 낙관하지 않는다. 만약 이대로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인용 된다면 촛불은 87년 민주화, 96년 노동법, 안기부법 투쟁,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에 이어 10여년 만에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노정태의 16년 12월 18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글을 되짚어 보자, 우선 노정태는 무척 길고 별로 의미 없어 보이는 임꺽정과 병해대사의 선문답을 빌어 우리가 모두 법 앞에서 평등하게 살고 있고 모든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며 차별저긴 특권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노정태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오면 우리 사회는 정말 영 받는 이와 영 내리는 이가 같은 존재인가? 노정태는 우리가 법치주의, 민주주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근거로 법적 평등을 강조하는 듯 보인다. 고로 이 원칙 자체가 결국 선출 되지 않은 존재에 의한 권력 행사를 정상적인 법적 체계와 제도를 통해 그 권력 행사를 중단 시키고 끊어 냈으며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영에 따르지 않으면 죽여 버리는 임꺽정 식의 사회적 갈등 해결 방법을 택하지 않고 있음을 강조한다. 결국 이 논증은 박근혜 탄핵이 이뤄지는 이 사태 자체가 결국 우리 체제가 정상적으로 그 법과 제도, 절차들이 작동하고 있음을 방증하고 있고 이것이 어떤 혁명이나 민란 보다 더 급진적 사건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이제야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되었다면서 말이다.

  노정태의 논변은 제법 그럴듯 하게 들린다. 하지만 자문해본다. 정말 우린 법적으로 평등한 세계 속을 살아가고 있을까? 우선 이를 비판하기 위해 몇 가지 정리를 하고 갈 필요가 있다.필자는 지난 16년 11월, 대구 평통사 평화아카데미 강연에서 최순실 사태와 싸드(THAAD)에 대해 강연 하며 공화국에 대해 몇 가지 규정을 내린 적이 있다.

  첫 번째, 공화국은 모두의 것이지만 동시에 누구의 것도 아니다. 고로 공화국은 구성원들 간에 사적으로 전유되어선 안 되는 공공성에 기반 해야 한다.

  두 번째, 공화국의 구성원이 동등하게 공공성을 지니고 누리기 위해선 공화국의 시민들이 동등한 법적 자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주권자들에게 빈부, 연소, 남녀, 귀천 등을 이유로 주권의 몫을 차별하거나 차등적으로 부여해선 안 된다.(여기서 주권자가 누구냐의 문제는 오랜 역사성 속에서 변화했다.)

  세 번째, 공화국은 동등한 주권자들 모두의 것이고 동시에 그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왕국이나 공국 등과 달리 특정한 인격에 의해 통치되고 운영되지 않는다. 구성원 전체를 위한 공공성과 공공복리를 위해 구성된 법과 절차, 제도에 의해 통치되어야 하고 인격적 요소는 억제되어야 한다. 모든 결정과 집행은 공공과 대중에 책임져야 한다. 자연히 이 국가의 법과 제도는 주권자(역시 이 주권자의 범위는 역사 속에서 변화한다)를 차별해선 안 된다.

  이 세 가지 조건들은 역사에서 최초로 나타난 근대 국가로써 공화국의 경우들을 살펴서 만들어 본 조건들이다. 조건들의 내용은 노정태에서도 일부 확인 되는 부분이 있다. 요컨대 노정태는 법적 평등과 법치주의를 이야기 하였는데 이는 각기 2번과 3번 조건들과 그 내용이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노정태의 글은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사실 노정태가 범한 오류는 매우 단순하다. 인식 수준의 낮음과 문제를 너무 조악하고 허술하고 안이하게 바라보는 것이 문제이다. 그는 이번 일이 법과 절차에 의해 해결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정말 이번 최순실과 비선에 의한 국정 농단, 권력 사유화는 법과 절차, 제도들로 해결되고 있는가? 인식 수준이 너무 형편없고 순진한 소리 아닌가? 이 증언은 명백하게 우리의 직관에 위배되고 있다. 사태가 해결되고 그 권력을 중단시키는 과정은 법과 제도의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그 내부에는 이 권력을 중단 시킨 새로운 권력이 존재했다. 그것은 패배의 아이콘이었던 촛불이었고, 나날이 추워지는 계절에도 거리로 광장으로 백 만, 이백 만씩 모여든 주권자들이 만들어낸 권력이었다. 최순실과 박근혜, 비선 집단은 국가를 사유화 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많은 부분은 법과 절차, 제도의 이름으로 이뤄졌고 그 법과 절차, 제도들은 박근혜라는 미성숙자를 둘러싼 인적 관계와 그 인적 관계를 매개로 만들어진 특권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노정태는 이번 사태가 법과 제도로 해결되고 있다고 이야기 하지만 이번 사태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유효한 문제 해결 접근은 법과 제도, 절차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이들과의 사적 관계와 그로부터 파생하는 특권임을 폭로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법과 절차, 제도로써 해결 하였다고 하면 이것이 과연 온당한 말일까? 이번 사태의 핵심은 법과 절차, 제도를 인적 관계를 통해 장악한 집단과 이에 맞서 “국가의 최저선”을 지키기 위한 국민들의 궐기 아니었던가? 최순실과 비선 세력의 권력 행사를 중단 시킨 것은 법과 제도가 아니다. 법과 제도를 견인하고 추동한 것은 법과 제도의 내적 합리성과 운동이 아니라 대중이고 광장이며 거리의 정치였다. 87년의 여름의 항쟁이 전두환으로 표상되는 법과 절차, 제도를 대항적인 폭력과 담론으로 중단 시켰고, 96년 겨울의 저항과 04년 봄의 궐기가 의회와 법적 기구에 압력을 넣는 방식의 저항이었다면 16년 가을겨울의 저항은 사실상 장악되고 마비된 법과 제도, 절차를 끌고 나온 저항이다.


3. 촛불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근대 국민국가들이 성립 되는 가운데서 비교적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헌법 체계를 가지고 국가 만들기를 시작한 사례에 속한다. 조소앙 선생께서 작성 한 임시정보의 임시 헌장의 첫 장에는 앞으로 만들어질 나라가 왕정이어선 안 되며 민주공화국의 형태와 이념이어야 한다고 적시되어 있다.(조소앙 선생이 계시지 않은 새에 신익희가 쓴 임시정부의 첫 헌법에는 이 부분이 삭제되고 이를 온건하고 중의적으로 풀어서 기술하고 있다.)

  우리의 20세기 후반의 역사는 민주적인 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의 역사다. 해방 정국에서 우파 권위주의 세력과 미군정이 산파 역할을 맡아 만든 나라는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미와 제헌 헌법의 선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편향되고 권위적이며 억압적 국가로 나아갔다. 자신이 대통령의 간판을 단 왕이라 생각했던 이승만과 반인반신 박정희를 거쳐 독재와 권위주의 통치가 현대화(?) 되는 만큼 그에 대한 저항의 역사 역시 발전하고 체계와 이론을 갖춰 갔다. 87년 여름의 수동 혁명은 민주주의와 온전한 자유주의 국가 수립이라는 부분적 승리를 이뤄냈고 군부를 병영으로 퇴각시키는데 성공했다. 민주화 투쟁은 끝난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해 여름 노동자들이 본격적인 변혁 운동으로 노동운동의 출발을 실천으로 선포하였다. 사회 변화의 기운은 고조되었으나 온건 보수 야당의 분열과 내전은 이런 열망을 새로운 정권, 변혁적인 헌법, 새로운 민주공화국 수립으로 이끌어 가지 못했다. 이후에도 군부 권위주의 정권의 상속자들과 진보 세력은 대립했고, 어느 순간 우리 곁에 다가온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조에 맞서며 자본으로부터 위협 받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싸워왔다.

  이 과정에서 고민과 모색이 필요했으나 논의가 유보되고 망각되며 결핍된 주제가 있다. 바로 공화국이다. 우리는 실천과 이론의 영역 모두에서 50년에 걸쳐 민주주의를 고민했다. 군부 권위주의 독재 체제를 어떻게 민주주의로 이행 할 것이며 어떻게 민주주의를 정착 시키고 어떻게 민주주의를 공고화 시키고 심화 시킬 것인가? 우리가 정치를 고민하는 기저에는 이와 같이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과 그 시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통찰이 전제되어 있다. 민주주의가 도대체 무엇이고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무수한 고민과 논의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이와 동시에 우리 군부 권위주의 통치체제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한 국가 이론 역시 폭발적으로 언급되었다. 하지만 그런데 공화국, 말 그대로 공적인 국가로 <Res publica>에 대한 고민은 그 자리를 찾지 못했고 자리를 얻지 못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민주-공화국이라 하지만 그래서 도대체 공화국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았다. 자연히 우리에겐 공화국의 전통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의식 속에서 공화국을 지워버렸다.

  우리는 최순실과 박근혜의 사적 집단에 의해 자행 된 국가 권력의 사유화를 이런 공화국 전통과 공화국 의식의 부재로부터 설명해야 한다. 이건 민주주의나 자유주의의 문제 이건에 공공성의 실체로 국가를 사적인 관계가 장악한 사건이다. 그리고 민주공화국의 절차와 제도에 의해 선출 된 리더가 자신의 지극히 사적인 친소를 바탕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자신에게 친한 이들을 비제도적이고, 비법률적인 공간에서 특권적 지위에 있을 수 있도록 하여 그 관계로부터 발현 된 힘이 제도와 법, 절차들을 압도하였다. 국민들이 이 겨울에 촛불을 들고 일어난 것은 박근혜가 프랑코나 이디 아민과 같은 천하의 독재자여서도, 박근혜가 그저 무능하고 부패하기 그지 없는 정권이라서 나온 것이 아니다. 국가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규범과 원칙들을 이 특권 세력들이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 아니었던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방해하면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기업인들을 핍박하고 관료를 해임하며, 한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공정해야 할 기회배분의 장인 대학입시도 조작하여 입학 부정, 성적 평가 부정을 자행하였고, 국가의 공적인 자원과 역량을 개인적 동기와 이해관계로 소진시켰다. 누구인지도 모르고 검증되지 않은 개인이 국가의 중요한 외교 안보 대소사에 개입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 삶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대통령은 이 환관과 사적 집단에 둘러싸여 진도 앞 바다의 차가운 4월의 심해에 300명의 시민들이 죽도록 방치하였다.

  이는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좌우와 보혁을 불문하고 가지고 있는 최소한, 최저선을 넘은 일이다. 우리는 그간 정치에 많은 특권과 재량을 양해하고 수용해왔다. 그것은 근대적인 국가의 수립, 경제적 빈곤으로 부터의 탈출과 성장, 냉전 구조에서 국가의 안보, 민주화, 번영과 성장, 평화와 통일 등의 이유로 양해 받고, 이해 된 특권이었다. 이 과정에서 우린 정상적으로는 있어선 안 되는 일(부정과 부패, 비리, 국민과 반대세력에 대한 도감청과 사찰 등)들 역시 통치 행위에 따른 불가피 한 일이라 한편 이해하려 노력해왔다.

  하지만 공화국에서 그런 특권과 특권에 대한 양해는 존재해선 안 된다. 법과 제도 앞에서의 평등과 동등함은 결국 예외의 없음이지만 우리는 모든 것에서 예외와 특권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오죽하면 친구 중에 변호사와 의사가 있으면 삶이 편하다 할까? 이는 결국 법리 문제와 대형 병원, 제도와 절차 속에서 원리와 원칙을 따르고 절차와 제도를 밟아 가는 것 보다 자신에게 제도와 절차에 앞서 편의를 줄 수 있는 사적 관계가 더 중요함을 보여준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2)에서 최민식이 분 한 비리 세관원 최익현의 “10억 짜리 수첩”이 상징하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가 인맥으로 불리는 사적 관계까 특권이 되고 편익이 되는 세태 아니었을까?

  최순실과 박근혜 그리고 그 일파가 자행한 일들은 그들에게 더 나가 우리 모두에게 공화국 경험, 공화국 의식, 공화국 문화의 부재를 폭로한다. 그리고 최순실과 박근혜로 대표되는 그 집단들을 축출하고 공적 세계에서 제거하는 일은 사실 우리 속에 내재화 되고 의식에 베여 있는 이런 특권 사회에 대한 단절이고 변화여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문재인이 이재명이 안희정이 대통령이 되어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치적으로는  이 특권 사회의 바스티유를 무너트리는 일이며 우리 스스로의 의식에 대한 거대한 자각이며 자기 혁신의 길이다. 공화국의 시민은 갈등을 단순히 법과 절차, 제도로 해결함으로써 만들어지지 않는다. 공화국의 시민은 부당하고 인신으로 권력을 수렴하는 절대자의 목을 끊고, 그 특권적 체제를 수호하는 방어선을 무너트리며 시작한다. 내가 우리들의 나라라는 말이 단순한 소속의 표현을 넘어 주권에 대한 자각이 되고 공공에 대한 자각이 되며 그것이 공공과 대중의 요구와 소망을 받아 국가와 그 운영 과정에 요구되는 법과 제도, 절차르 탈인격화 시키고 이를 통해 특권의 여지가 들어갈 공간을 무너트리는 일이 이 공화국 혁명의 요체다. 그리고 우리는 특권의 망령들이 다스리는 나라, 그들을 옹위하는 권력과 폭력들을 광장과 공중의 힘으로 중단시켰다. 이제 우리는 웅장한 바스티유의 요새를 무너트렸고 절대 군주를 유폐했다. 지금 우리의 상황과 위치는 여기에 있으며 이것은 바로 박근혜를 법과 절차로 탄핵시키고 최순실을 법과 제도로 구속시켜 처벌하는 것이 공화국이라는 노정태의 인식의 조야함이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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