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 JUN E May 03. 2021

그 다음의 시간으로

À la prochaine fois

헤어졌습니다. 이렇게 좋은 날인데 말이죠.

연애의 시작으로 사라지고 헤어짐으로 돌아왔습니다. 추운 계절의 끝에 나와 그 사람의 마음에 드는 이름으로 이 관계의 끝이 되길 바랬지만, 글쎄요... 둘 중 하나의 마음에는 들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연애 초반에 20대 연애에서만 느낄 줄 알았던 불타는 연애의 감정을 느끼고서 ”아! 이번에는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빨리 식어 버리는 그 사람의 모습에서 나는 이미 헤어짐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두 자릿수에서 세 자릿수 사이의 연애기간 동안 수 차례의 다툼과 헤어짐 속에서 누군가를 특정할 만큼 큰 잘못을 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성향이 맞지 않았을 뿐, 그러다 보니 이번 에는 정말 빨리 마음이 정리되었어요.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그 사람은, 나를 통해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아주 많이 들었거든요. 


두 세 차례의 이별 비슷한 단계를 거치고, 서로 단단해진 줄 알았던 마지막 데이트에서 서로의 눈만 봐도 마음이 식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평소의 장난에도 기분 나빠하는 표정을, 손 잡자고 용기 낸 나의 말에 싫다고 말하던 당신의 표정을, 그 짧고도 숨 막히는 마지막 대화 속에 당신 마음의 공백을 읽고 난 뒤 날씨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습니다.

비가 내리던 오전이었는데, 그 날 오후는 쨍쨍할 정도로 해가 밝더라구요. 


이별의 감정은 딱 하루가 지나니 멀쩡해지더군요. 싸우고 서로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동안 많이 양보하고 노력하는 서로의 모습을 보기도, 한계를 보기도 하다 보니 아무 의미 없던 마지막 인사 이후에도 크게 미련이 남지 않았습니다. 다만,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던 당신을 위해 준비했던 선물들은 덩그러니 남았고, 내가 받은 선물들은 내 공간을 잔뜩 차지고 있네요. 그래요, 하지만 이렇게 당신과 나의 관계는 깨끗하게 분리가 되었네요. 내가 안녕을 빌어주지 않아도 잘 지낼 당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합니다. 




얼마 전 친한 친구 J를 다시 만났습니다. 몇 년을 일했던 회사에서의 마지막 날 밥 한 끼와 소주를 적시던 J와 오랜만에 해가 떠있는 시간부터 만나 신나는 수다 타임을 가졌어요. 헤어짐의 과정을 알고 있던 J에게 남은 이야기들을 해주고 나서 J는 차분히 듣고, 감성에 젖어있는 저의 이야기에 오점을 하나씩 콕콕 집어주었어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쓸데없는 감정 덩어리에서 팩트와 감성을 뼈와 살로 발라서 딱! 나눠주고는, 이야기를 하나 해주었습니다. J와 오래도록 친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A군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A군은 저와도 알고 지내는 사이입니다. A의 성격을 간단히 말하자면, 본인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감정을 모두 쏟아 사랑을 주는 사람입니다. 예민하고 감정적이지만 솔직한 사람이죠. J와 A는 서로가 기쁠 때는 함께 웃어주고, 힘들 때에는 서로 힘이 되어주는 좋은 친구사이입니다. 최근의 일은 J가 A의 커다란 일을 위로해줬는데, A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조금 가벼웠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둘은 사소한 오해로 시작해 큰 싸움까지 번졌습니다. J가 다시 손을 내밀어 A와 화해하는 과정에서, A와 J는 10년이 가까운 친구 사이이지만, 서로를 배려하는 표현 방식에서 아주 큰 서운함을 느꼈어요.  


J는 그제야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친구로 지낸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잘 통하고 잘 맞느냐로 시작한 것 같아. 이제는 그다음의 시간으로 넘어가야 해. 우리가 얼마나 다르냐를 이해하는 단계를 맞이해야 하는 거지. 다시 그 때로는 돌아갈 수 없어.” 이 말을 들은 A는 다시 신나게 노래방에서 춤추고 놀던 때로 왜 돌아갈 수 없냐고 따지듯 물었습니다. J는 그 말을 A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아 적당히 이야기를 마무리했습니다. 

J의 말을 들은 뒤 아주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최근 헤어짐을 겪은 상황 때문에 더 와 닿기도 했지만, 그런 말을 친구에게 할 수 있는 J의 큰 용기와 마음에 크게 감탄했습니다. J의 말은 서로 좋아하는 것이 같고, 좋아하는 부분들로 관계를 지금까지 유지해왔다면, 이제는 다름을 알고 그것도 서로 깊게 알아가야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겠지요. 이 이야기를 끝으로 J와는 웃고 떠들고 즐겁게 하루를 끝냈지만 며칠 동안 제 머릿속에는 잊히지 않는 문장이었어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같은 것과 다른 것. 비슷 결이지만 명확히 다른 것. 그렇게 상대방을 이해하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생각했습니다. 

숙취는 다음 날이면 잠잠해지지만, 그 고민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감정의 폭탄주를 섞어마신 듯, 지독한 밤이었습니다. 술에 많이 취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그리고는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선, 나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이 났습니다. 


영준, 서른, 감성적인 사람, 정이 아주 많은 사람, 나보다 남이 먼저인 사람, 남자, 디자이너.

좋아하는 것은 향수, 책, 커피와 담배, 글쓰기, 글 쓸 때 듣는 쳇 베이커의 음악과 검정치마의 음악, 일할 때 듣는 침착 맨의 유튜브. 이렇게 나를 나열하고 보니, 예전이랑 변한 것이 없네요. 그래서 이제는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았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감성적인 사람. ‘누군가 힘들어하거나 기댈 곳이 필요할 때’ 정이 아주 많은 사람.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 주는 사람들에게’ 나보다 남이 먼저인 사람. 그리고 이런 표현을 부끄럼 없이 참 잘하는 사람. 이런 스스로의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 


자전적으로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이런 모습이에요.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심지어 가족이라고 해도 저의 이런 모습을 다 알 수는 없을 거예요.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늘 배려심이 많고 헌신적인 사람이라 에둘러 표현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꼭 그런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는 단점을 들여다볼게요. 

‘감정적인 사람.’ ‘감정은 화가 나지만 화를 잘 못 내는 사람.’ ‘그럼에도 얼굴에는 다 티가 나는 사람.’ ‘사소한 일에 말 한마디에 아주 많이 상처 받는 사람.’ ‘예민하고 답답한 사람.’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몸과 마음이 따로 이해하는 사람.’ 정도가 되겠네요.(이것 말고도 셀 수 없이 많겠죠? 혹시 이 글을 보고 있는 저의 지인분들이 있다면 더 말해주세요.ㅎㅎ)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해결된 것이라던, 상담사 선생님의 말처럼 쉽게 해결될 것 같진 않아요. 들여다본 것은 나 자신이고, 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다만 내가 ‘문제라고,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오랫동안 고쳐왔고, 또 고쳐나갈 생각입니다. 오늘의 글은 이 글을 읽게 될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다짐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그리고 언젠가 제가 부족한 모습을 보일 때에는 따끔한 꾸짖음과 따뜻한 포옹으로 안아주세요. 그러면 저는 바로 다시 일어나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날이 좋네요. 후후



작가의 이전글 그런 믿음의 정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