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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JUN E May 10. 2021

저녁에 하는 샤워처럼

긴장했지만, 그리 우울하진 않았던 나의 20대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눈도 뜨지 못하고 화장실로 향한다. 등판이 빨갛게 익어버릴 정도로 뜨거운 물로 샤워를 시작한다. 그 뜨거움에 눈을 떠도, 화장실이 수증기로 뿌옇게 덮여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있는다. 몸의 엔진을 시작하듯 열을 올리고 난 후, 차가운 물을 마시고 담배 하나를 피우고 출근을 준비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루틴이다. 출근을 하자마자 커피를 내려 한 잔을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멍~~~ 함에서 벗어나 일을 할 수 있는, 아니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아침 샤워파 vs 밤 샤워파로 나뉘어 어떤 것이 더 청결한가 혹은 더 효율적인가 하는 이야기를 종종 하곤 한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둘 다.' 아침에는 샤워를 해야 잠을 깰 수 있고, 저녁에는 샤워를 해야 잠에 들 수 있다. 긴장과 이완의 양면성을 가진 것들이 나에게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샤워다.

두 번째는 향. 아침에 뿌리는 향은 묵직한 우디 계열의 향이나, 시트러스 계열로 시작하는 푸제르 계열의 향수가 감각을 깨운다. 반대로 퇴근해서 집에 들어와 다른 작업을 하거나, 글을 쓸 때면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줄 수 있는 향을 태운다. 루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꽤 오랫동안 있었는데, 이 글을 적다 보니 나도 나름대로 루틴한 부분들이 있구나 하고 머쓱하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긴장과 이완은 내가 꽤 오랫동안, 아니 아주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는 문제이다. 어떠한 상황이라도 긴장이 잘 풀리지 않아서 밥을 많이 먹어도, 잠을 거의 못 자도, 어떤 상황에서도 졸음이 당최 오지를 않는다.

마음의 긴장보다는 습관화된 몸의 긴장이 큰 이유라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호흡법을 찾아보기도 운동을 하기도 가족상담센터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심리적인 안정을 느끼지 못해서 몸이 긴장하고 있다는 가벼운 지식 너머, 몸이 긴장을 기억하고 있어 심리적인 긴장상태가 되고, 이게 다시 몸을 긴장하게 한다는 상담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꽤 오랫동안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이렇게 오랜 긴장상태가 이어진 것은 고3 때 이혼하신 부모님과 함께 살며 시작됐을 것이다. 재수 때까지 장남인 나의 대학 진학을 위해 최대한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같이 사셨던 두 분 덕분에, 나에게 집은 편안함보다는 긴장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대학을 가고 기숙사에 살기 시작하며 20대 중반까지 자취생활을 하며 8평 남짓한 나만의 커다란 방공호에서 평안함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정의해보기도 했다.


그 평안함도 잠시 20대, 아니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꼽으라면, 그 답답했던 고3 시절도 아니고, 군대에서 허리를 다쳐 8개월간 누워있던 시간도 아니다. 25살 여름, 그 여름이 아직도 지옥 같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24살 당시 허리도 많이 치료하고, 불안했던 부모님과의 관계 또한 회복 중이었으며, 대학 내에서의 생활도 열심히 해냈다. 끝없는 디자인과의 과제를 뚫고도 대외활동과 아트 크루 활동을 하며 하루에 2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을 지면서도 행복감을 느꼈다. 인정받고 사랑받는 삶. 그래 거기까지만 했어야 했다.

욕심이 과했다. 열정! 열정! 열정! 열정이 최고라고 생각했기에 돈이 안 되는 일들도 맡아서 했다. 그런 대학생의 알맹이를 돈 없이 홀라당 빼먹으려는 사악한 새끼들이 접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제주도에 있는 P호텔의 초기 브랜딩 작업을 교수님과 대외적으로 함께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J회사 출신의 한 사람과 만났다. J회사는 그 당시 내가 꿈처럼 생각하던 회사였다. 정확히는 교수님의 지인으로 소개를 받았고,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사람의 언변에 빠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사람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자진해서 계약서를 쓰고 들어갔고, 그 계약서는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 그래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노예 계약서였다. 폭행과 폭언, 협박과 현금 갈취 등으로 3개월 간 사람에서 폐인으로 변해버린 나는, 그 당시 25살에 천만 원 정도의 빚을 지고 그 사람의 모든 행사를 다 해주었다. 30명이 해야 할 일을 3명에서 했고, 기획, 디자인, 카피라이트, 무대 설치, 스폰서를 구하는 모든 행위들을 했다. 살은 10kg이 빠지고, 과호흡과 공황장애, 우울증, 불안장애까지 한꺼번에 와버렸다. 물론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나의 이런 상황을 뒤늦게 알고 주위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려 했지만, 그 개 같은 계약서 한 장이 구원의 손길을 차단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행사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었고, 울면서 했던 행사는 그럭저럭 좋은 결과로 끝이 났다. 그 당시 밥 먹는 시간 빼고 3개월 동안 잠을 거의 못 잤는데, 내가 유일하게 잘 수 있었던 시간은 외근 나간 척 만났던 당시의 여자 친구와 있을 때뿐이었다. 21살의 예쁘고 당차고 밝았던 여자 친구에게 나는 매일 죽는소리를 하며 울기만 했고 그 모습에 질려서 그 친구는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참 고맙게도, 행사가 끝난 다음 날 그 친구가 담담하게 이별을 전해주었다. 해준 것도 없고 함께 시간도 많이 보내지 못했던 그 친구가 기억에서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지만, 아주 오래도록 미안함만 남아서, 썩어 문드러졌다. 다행히 그 친구는 비슷한 업계에 있고, 업계에 함께 알고 지내는 형들을 통해 소식을 가끔 듣고 있다. 그럴 때마다, 고집이 강했던 그 친구가 꽃길만 걸을 수 있게, 형들이 잘 도와주시기 바란다며 그 미안함을 쿨한 척하는 가면 뒤에 숨겨, 그 마음이 몰래 전해지길 바랬다.


내가 우울증과 공황장애에서 아주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 정확히는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된 것은 나의 하나뿐인 동생 덕분이다. 4살 어린 나의 남동생 욱이. 당시 동생은 연영과 3수 중이었고, 재수 때에는 대기 1번으로 한예종에서 떨어졌다. 스무 살 이후로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부모님의 말로(*좋은 의미로 독립심을 키우게 하려는 의도셨다.) 우리 형제는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었다. 동생은 몇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연습실을 구하고 개인 레슨을 받기 위해 350만 원 정도를 모아뒀었다. 행사가 끝나고 3달 만에 동생을 만났을 때, 폐인이 된 나는 부모님 모르게 오열하며 울었고, 동생은 나를 안아주며 그 큰돈 350만 원을 바로 나에게 주었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천만 원의 빚을 갚았다. 빚을 갚고 나서 빌려준 사람들에게 상환을 해야 했는데, 몸과 마음을 너무 크게 다쳐 나는 담배를 피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담배를 피울 때만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래 그날도 새벽에 담배를 피우러 본가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노랫소리가 들렸다.


새벽 4시 주차장의 깜빡이는 등불에 악보를 보고 노래 연습을 하고 있는 동생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는 다른 곳으로 도망쳐 피를 토해내면서 울었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울었다. 다음 날 아침에 나에게 힘내지 않아도 괜찮다며 웃으며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동생을 보고 나는 그 자리로 일어나서 일을 구하기 시작했다. 3교대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노가다, 술집, 디자인 작업 그리고 건달들의 행사 일까지 하면서 3개월도 안 되는 시간에 그 모든 돈을 갚았다. 돈을 갚고 일상으로 복귀를 하나 싶었지만, 밥은 먹고 몸은 움직이지만 마음은 굳어져 버렸다. 흔히 말하는 번아웃과 우울감이 뒤섞여 누가 진짜 범인인지 알 수도 없는 미제사건처럼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잊혀 갔다. 그것이 문제였다.


몸이 다쳤으면 그 환부가 보이기도, 고통이 느껴지기도 해 치료할 수 있지만, 마음의 병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냥 숨을 못 쉬겠다, 잠을 못 자겠다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속되자, 비로소 나는 내가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 문제를 최대한 깊게 들여다보려고 한 것은 몇 주 전의 일이다. 최근의 이별의 상처가 너무 커서 상담을 시작한 나는, 앞서 얘기한 모든 원인들 때문에 내가 불안에 갇혀있다고 생각했다. 두 번의 상담이 지나고 스스로 무언가를 깨우치고 그제야 불안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형용할 수는 없다. 다만 불안을 불안 자체로 받아들이고 씹어 삼킬 수 있도록 마음의 턱관절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 작은 근섬유 하나가 마음을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했고, 역설적으로 쉴 수 있게 했다.


이완하기 위해선 수축이 먼저 있어야 한다. 최소한의 수축이 있어야 이완의 끝을 알 수 있으니까. 그래야 튕겨져 올라올 수 있고,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 ‘10년이라는 긴장 속에서 내가 이렇게 불행하고 열심히 살았어요.’라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그 중간의 순간순간 속에서 나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아주 아주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으니 말이다. 하루는 그런 날이 있다.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모두 불태워 일을 해결하거나, 사람과 사랑과 맞서야 하는 그런 날들 말이다. 어쩌면 매일이 그런 날의 연속일지 모른다. 아직 무엇인지 형용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나를 나른하게 만들어주는 봄바람처럼, 저녁에 하는 샤워처럼, 자기 전에 피우는 담배처럼 삶의 순간순간 다가와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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