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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JUN E Dec 14. 2020

여름이었다.

돋움 하는 글

11시가 지나면, 책상에 앉아 향에 불을 붙인다. 연기가 한 움큼 피어 나와 사라질 때 즈음, 스탠드를 딸깍 하고 켠다. 오래된 스탠드의 색 바랜 노란 불빛이 좋다. 방안을 가득 채운 향기가 몸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개인 작업이나 취미생활을 즐기는 시간이다.


    얼마 전, 밀린 외주 작업으로 루틴한 저녁을 시작해서, 꽤 늦게까지 일을 하던 밤이었다. 커피와 담배로도 잠을 쫓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잠을 깰만한 영상물로 만화가 주호민 씨가 진행하는 개인 라디오를 틀었다. 기분 좋은 중저음이 들려왔다. 영상을 틀었을 때, 이미 웃음소리가 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어떤 말이 건  ‘여름이었다.’라는 말을 뒤에 붙이면 한 편의 시나 소설 따위가 된다는 우스운 이야기였다. 

‘눈이 온다, 여름이었다.’,‘내일은 월요일이다, 여름이었다.’와 같이 그럴듯하지만, 실없는 소리를 들으며 피식하고 웃었다. 신기하게도 며칠이 지나도 이 말은 잊히는 것이 아니라, 내 귓속에 맴도는 것을 넘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적인 몰입을 좋아하는데, 특히 영화나 음악을 들으며 빠르게 감정이 이입되는 순간을 즐긴다. ‘여름이었다.’라는 맴도는 한 마디로, 나는 한동안 잊고 있던, 잊으려 했던 그 어느 여름에 다시 빠져들게 되었다.


    그 해 여름은 유독 더웠다.라고 시작하는 어느 소설의 문장처럼 나는 너를 만났다. 너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애정과 희망 그리고 좌절을 품게 되었던, 그 여름의 틈을 나는 기억한다. 8월의 중간 그 더웠던 여름 밤하늘 아래, 내가 가진 것은 낡은 반바지 속 숨기고 있는 진심이 전부였다. 한 손에는 진심을, 남은 한쪽은 너의 손을 잡으며 그렇게 여름을 걷기 시작했다. 함께 걷고, 웃는 그 특별하고 평범한 시간을 보내며 나는 행복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 여름과 밤, 무더운 도심 속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의 아지랑이 따위를 보았다.


    가을은 무더운 더위의 끝자락에서 갑자기 다가온다. 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갑자기는 없다는 것을. 장마가 지나고, 태풍이 지나고 매미가 울기 시작하면 여름은 그제야 마지막으로 타오르고 이내 곧 사그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너의 장마를, 너는 나의 태풍을 보지 못하고, 매미처럼 자신의 목소리로만 울었다. 서로가 놓친 찰나의 순간은 갑자기라는 말이 되어 둘을 마주했다. 누구나 겪는 사소한 순간이 쌓이고, 저마다 다른 이별의 전조를 밟으며 한순간에 나는 너에게 이별을 고했다. 너는 나에게 갑자기라고 물었고, 나는 목놓아 울음으로 대답했다.


나는 늘 기다렸다. 

돌아오는 너를 안아주었다.

나는 그런 니가 미웠다. 


너는 늘 나를 통제했다.

다가가는 나를 밀어냈다.

너는 그런 나를 좋아했다.


스물아홉 번의 여름을 보냈듯, 이제는 뜨거움을 보내는 것이 그리 힘겹지 않다.

여름이었다.




보고, 듣고, 말하고, 맡고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좋아합니다.

가끔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곤 하지만, 이런 나 자신이 부끄럽진 않습니다.

솔직한 나 자신과 마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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