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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JUN E Dec 27. 2020

8월의 나무 아래

Sous l'arbre en août

"처음 향수를 뿌릴 때 코끝으로 올라오는, 시큼한 베르가못의 시트러스향으로 시작돼요.

그리고 이를 감싸주듯 카시스와 라임이 부드럽게 잡아주죠. 그리고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 히아신스와 아이리스의 향이 올라와요. 히아신스는 산뜻하고 청량함을, 아이리스는 강렬함을 보여주죠. 이를 조화시키는 뮤게는 조화제의 역할로 사용될 거에요. 그리고 라스트 노트는 깔끔한 머스크, 달달하고 강렬한 앰버 ,차분한 우디로 마무리합니다. 아 산뜻한 바다를 연상시키는 씨솔트도 빼놓을 수 없죠. 이번 작품의 이름은 Sous:’abre en aout 입니다. ‘8월의 나무 아래’라는 이름입니다."



나는 아마 당신과 함께할 ‘8월의 나무 아래 생각하고  향수를 만들었는지도 몰라요. 그때는  마음이 조금은 녹을  알았거든요. 6 내가 그렇게 좋아한다고 노래를 부르던 조향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때까지는 집과 가까운 곳에 협회에서 운영하는 공방이 있는  몰랐거든요. 당신과의 이별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 무작정 좋아하던 것을 배우고자 했던 것이 이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 되어가고 있어요. 어느덧 함께 지낸 날들보다, 이제는 남으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네요. 나는 당신이 아직도 너무너무 너무 미워서 죽을  같아요.


내가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고 있는 당신인데,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사랑스러웠는지 몰라요. 모든 걸 다 좋다고 이야기하고, 모든 싸움은 내 잘못이었다고 말하는 나를 보며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좋은 생각은 아니었겠죠? 그래서 그렇게 나한테 무례했을까요? 수천 마디의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들을 누군가 다시 읊으라면, 밤새라도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처럼, 아직 나는 그 상처가 선명해요. 누군가는 이 감정을 미련이 남았다고 하지만, 나는 알아요. 미련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미련보다는 미움이 남은 것 같아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거든요. 좋았던 감정들을 천천히 정리하고 나니, 채울 수 있는 게 미움밖에 없더군요. 채우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죠.


우리의 끝이 허무하게 마무리되었고, 당신의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면 난 변하지 않을 사랑을 맹세했을 것 같은데, 그것보다는 당신의 자존심이, 울고 있던 나의 괴로운 시간보다 다른 남자와 여행가는 시간이 당신에겐 더 소중했나 봐요.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당신은 그 행위로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즐겼어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아주 많이요. 내가 정말 용서할 수 없던 것은, 우리의 기념일에 갔던 식당에, 우리가 앉아 사랑을 속삭이던 자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꽃을 받고, 내가 선물한 모든 것을 걸치고 웃는 얼굴로 찍은 사진을 카톡 프로필에 올려놓았던 거에요. 얼마나 화가 나던지… 시간이 조금 지나 이 오해를 풀었던 우리의 마지막 대화 속에서도 저는 화가 나더라구요. 그리고 당신을 믿지 못하게 되며, 당신과 만났던 시간들을 곡해하기 시작했어요. 저주 같은 시간이죠. 행복한 순간도 그저 그 상황으로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은.


20대의 많은 연애 중 나는 그 누구도 나쁜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당신의 이 배신은 어쩌면 당신이 늘 얘기하듯 세상을 너무 좋게만 바라보고, 사람의 좋은 면만 보려고 했던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당신과의 연애는 아마 나의 첫 번째 나쁜 연애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바람을 피웠던 다른 사람과 비교해도 말이죠. 나의 소중한 글감에 당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어쩌면 낭비 같고, 어쩌면 누군가는 또 미련이라 말할 수 있겠죠. 음, 글쎄요.


글쓰기 수업을 듣고 있어요. 3개월 정도 된 것 같아요. 정말 좋은 사람들과 오프라인의 짧은 모임을 지내고, 말로 채울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고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어요. 아, 처음 썼던 글도 당신에 관한 글이었어요. ‘여름이었다.’라는 글이었어요.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어제 향수 샘플들을 정리하면서 이 향수를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번 주 글감은 향수였어요. (웃음)


6월부터 지금까지 아주 많은 향수를 만들었는데, 신기하게도 이 향수와 비슷한 향은 만들지 않게 되더라구요.

당신과 어울리는 향수는 아니에요. 화려하고 담을 수 없는 섹시함이 넘치는 글래머러스한 향이 당신과 어울려요. 그래서 이 향수는 만나지 못한 시간과 같아요. 언젠가 이 향수와 함께 떠날 수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네요.


향은 변해요. 온도와 시간 그리고 사람의 몸에 닿는 체온에 따라 말이죠. 또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도 미세하게 변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연애는 빠르게 달아나는 탑노트 정도였던 것 같아요. 미들노트 그리고 라스트까지 기다릴 수 없는 딱 그 정도. 시간이 지나며 농익어갈 그 매력적이고 황홀한 순간까지는 절대 갈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영준 씨, 이번 향은 굉장히 산뜻하네요. 오래된 가죽 향이나, 나무 향이 취향인 것 같기도, 그런 것만 만드는 것 같기도 했었는데 신선해서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앞서 드린 설명은 노트에 관한 설명이고, 스토리도 있는데 한번 들어보실래요?"




주는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조금 기다려 보기로 해요. 받는 사랑에 당연함을 느끼지 않고 다가가기로 해요.

그리고 순간을 ‘나’보다 먼저 우리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로 해요 .

영준. 나를 더 많이 사랑하고 아껴줬으면 좋겠어요. 충분히 그럴만한 사람이니까.

나에게 미안하지 않을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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