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가장자리에 만나지는 것들

기억할 수 없는 재회

by 저나뮤나

봄이었다. 햇빛은 나른하게 대지를 덮었고 거리에는 부드러운 초록빛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바람에 실려 고양이 한 마리가 가볍게 내 앞을 지나갔다. 고양이는 무언가를 아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가 곧 이내 흥미를 잃은듯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순간 무언가 잊어버린 듯한 불안감을 느꼈다. 주머니를 더듬었다. 전화기가 없었다. 집에 두고 나온 게 분명했다. 불안은 점점 더 뚜렷해졌고 나는 결국 버스 정거장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이상하다. 이 기시감.


집으로 가는 길이 평소보다 길게 느껴졌다. 집 근처에 이르렀을 때 집 앞에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머리칼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보는 그녀는 절대적으로 그녀를 필요로 하는 자리에 서 있는 듯했다.


그녀는 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화기를 잊어버렸죠?"


나는 순간 당황하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미소가 진해졌다. 뚜렷해진 그 미소가 봄날의 초록 바람처럼 투명하고 부드러웠다.


"저도 자주 그런 걸 잊어버리곤 해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를 기다렸다고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었요. 정확히 말하면 오늘 이 순간 당신이 여기에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니까요."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봄볕은 여전히 따뜻했고 초록 바람은 여전히 불었지만 그녀의 등장으로 세상이 순식간에 낯설어졌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빛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우리 잠깐 걸을까요? 전화기는 잠시 잊어도 괜찮아요. 어차피 이제부터는...중요한 게 따로 있을 테니까요."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와 나란히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록 바람이 다시 한 번 우리 곁을 지나갔고 고양이는 어느새 우리 뒤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거리의 사물들이 경계를 잃고 희미해져갔다. 눈 앞에 풍경이 흐릿한 수채화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환히 웃고 있었다. 이 미소...


"기억나요? 우리 처음 만난 날이요."


나는 멈춰 섰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와 처음 만난 적이 있기나 했던 걸까? 그녀는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지 않는 것이 당연해요. 우리는 늘 그렇게 서로를 잊고 다시 만나는 일을 반복했으니까요."


그녀의 말은 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 꿈에서 본 장면을 다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초록빛 바람이 다시 한 번 내 뺨을 스쳤다. 내 뒤를 따르던 고양이는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무수한 기억들이 천천히 춤을 추고 있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문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