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한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
동거인의 친구와 그의 여자친구가 그녀의 생일을 맞아 우리 집 근처 펍에서 한잔 한다고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친구의 친구, 그리고 이틀 전에 처음 만난 그의 여자친구.
생각만 해도 가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새로운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 가기 전에 큰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다.
스스로를 사회적이지 않은 인간이라고 낮춰가면서 동거인에게 혼자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매번 같은 상황에서 조금 억지로라도 집을 나서서 새로운 사람들 앞에 막상 서고 나면 생각보다 대화를 잘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에게 대견해하면서 집에 돌아왔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오늘의 자리는 집에서 10분 정도만 걸으면 나오는, 야외 공간이 아주 멋진, 평소에 좋아하는 펍이기도 했다. 그래, 거기에 가면 산딸기나무로 맛을 우린 콤부차를 마실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과 어색해지면 상투적인 질문이라도 던질 용기가 이제 나에게는 있다.
펍에 도착해서 동거인의 친구 B와 인사했다. 그와는 같은 직업에 종사하다 보니 대화할 거리가 있는 편이고, 이제 몇 번 만나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알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모르는 사람 사이에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하나 끼어있으면 그 사람에게 무의식적으로 기대기 마련이다. 오늘부로 우리의 내적 친밀감이 조금 더 형성된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B의 여자친구 S와 인사했다. 우리는 이틀 전에 갑자기 별똥별을 보러 같이 떠난 적이 있는 사이다. 별똥별이 많이 떨어지는 밤이라고 B가 넷이서 같이 별을 보러 가지 않겠냐고 제안해 왔다. 우리는 리옹을 벗어나자마자 있는 낮은 산에 올라 모포를 깔고 누워 몇몇 개의 (비교적 일반적인) 별똥별, 한 개의 인생에서 가장 황홀했던 불타는 별똥별, 그리고 멀리서 내리꽂는 선명한 붉은색의 번개를 함께 보았다. 그들을 집에 내려다 주면서 열두 시가 8분 남은 것을 확인하고 S에게 생일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이틀 뒤 우리는 다시 여기 펍에서 만났다.
그들은 펍 마당에서 페떵끄 pétanque를 하고 있었다. S의 친구들로 추청 되는 두어 명의 사람들이 집중해서 공을 굴리고, 그 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세네 명 더 있었다.
그들 중 검은 점프슈트를 입고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린 S 보다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입모양으로 안녕, 인사를 건넸다. S가 우리에게 그녀를 소개해줬다.
내가 페떵끄를 시도하는 동안 그녀는 다시 S와 친구들 그룹으로 가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그 그룹에 있던 한 사람이 다음 차례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나와 공을 잡는다. 사람들 사이의 이 모든 움직임이 강물이 흐르다가 물줄기가 다른 곳으로 새어가기도 하며, 또 다른 강물과 합쳐져서 바다로 던져지는 자연의 움직임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다.
페떵끄에 대한 모두의 열정이 시들해지자 우리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이런 만남에서 '어디에 앉을 것인가'는 정말 중요한 문제다. 앞으로 두어 시간 동안 나의 대화 난이도가 여기에서 갈리는 것이다. 나는 안전하게 동거인과 B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내 앞자리가 하나 비어있었다. 나는 이 그룹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도 내 앞자리에 앉는 것을 두려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고, 예상했듯이 내 앞자리에 용기 내어 먼저 앉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내 앞에는 뒤늦게 도착한, 검은 점프슈트의 여인, M이 자리하게 되었다.
동거인과 B, 그리고 나는 서로 할 이야기가 많다. 우리의 대화 주제가 연기 이야기, 공연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어서 나는 내심 대화에 끼지 못하는 M의 처지를 생각했다.
셋의 대화가 사그라들 즈음에 이때다 싶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S와 같이 언어치료사 교육을 받았고, 9월부터 근처 클리닉에서 일을 시작한다고 했다.
파리 연극학교 1학년 시절, 오전에 수업이 끝나면 오후에 아이들을 돌보는 베이비시터 파트타임을 했다. 일 년 동안 개구쟁이 남매를 돌보았다. 그중 둘째인 다섯 살 반 된 조셉은 귀엽지만 조금 어눌한 발음을 고치기 위해 언어치료사를 종종 보러 가야 했고, 나도 가끔 조셉을 데리고 클리닉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렇게 그 직업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발음을 고치는 직업인가? 조심스럽게 물으니 그녀는 언어치료사가 하는 다양한 일들을 친절하게 알려줬다.
말문을 트지 못하는 어린아이들, 트라우마로 말을 잃은 사람들, 구강암 수술로 예전과 같이 말할 수 없게 된 사람들, 난독증이 있는 사람들, 알츠하이머로 말을 잊어가는 사람들 심지어는 코로나로 후각과 미각을 잃은 사람들도 언어치료사와 함께 재활을 한다고 했다.
말을 되찾아 주다니. 아름다운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입과 목의 근육들을 다루기 때문에 이 일은 '신체적'이면서도 기억과 관련한 '정신적'인 부분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흥미가 갔다.
근육에 기억 새기기, 말하기.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문득 말을 한다는 것은 목 주변과 입 안의 모든 근육에 기억을 새기는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프랑스어를 배울 때 프랑스식 U나 Z 발음이 어려웠다. 헤어질 때 흔히 쓰는, 입맞춤이라는 뜻의 Bisous [bizu]라는 단어와 보석을 뜻하는 Bijoux [biʒu]의 발음을 구분하지 못해 다섯 살 반 먹은 조셉이 답답하다는 듯이 몇 분 동안 차이점을 설명해주려고 했지만 나는 당시에 결코 그 차이를 알아듣지 못했다. 이날 이후 기회가 되면 사람들에게 두 단어의 발음의 차이가 뭔지 알려달라고 물었다. 그리고 입술 모양을 보며 따라 했다. 그 후로 일 년은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맥락도 없이 bisous라는 단어는 내게 찾아와 입 근육에 새겨졌다. 그날 이후로 비로소 나는 Bisous와 Bijoux를 어떻게 다르게 발음하는지 알게 되었다. 보석을 말할 때는 입을 좀 더 크고 동그랗게 앞으로 더 내민다. 오리 입술처럼. 입맞춤을 말할 때는 위아랫니가 서로 미세하게 비벼지며 진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만나고 헤어지며 다음을 기약할 때마다 느낀 윗니와 아랫니의 진동이 내가 만난 사람들의 숫자만큼 내 몸에 새겨져 있다.
비슷한 예로,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고 이 단어 저 단어 물어보는 친구들의 얼굴이 물음표 수백 개로 가득 차는 특정한 순간을 들 수 있다. 자음의 된소리를 설명할 때 그들의 표정은... 미안하지만 너무 재미있다. '사실은 세상 모두가 너 빼고 알고 있었는데, 지구는 타원형이야.'같은 말을 할 때나 나올 법한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기역, 쌍기역, 키읔에서 나는 발음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들은 감지해내지 못했다. 내가 여러 번 반복해서 설명해 주면 되려 나에게 같은 발음을 하면서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다음에 또 이런 친구가 있다면, 내가 너를 놀리는 게 아니라 단지 너에게는 한글의 된소리가 근육에 새겨지지 않았을 뿐이고 그만한 기억이나 추억이 없을 뿐이라고. 언젠가는 된소리 단어 하나쯤은 너의 근육에 우리가 행복했던 기억으로 새겨질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위로해 줘야겠다.
말하기 그리고 기억의 복원.
M이 이야기한 것 중 인상 깊었던 부류의 환자들은 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말을 잃은 사람들은 그것을 되찾기 위해 잃어버린 근육의 감각을 거꾸로 더듬어 간다. 그리고 그 근육에 새겨진 기억들을 되찾아 간다. 단어를 잃어버린 알츠하이머 환자가 특정하고 미세한 근육을 움직이고 훈련하며 소리로써의 단어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되찾고, 구강암으로 입의 많은 근육들을 수술로 덜어내야 했던 사람은 새로운 입의 구조에 다시 한번 말의 기억을 심는다.
이처럼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특정 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는 것뿐만이 아니다. 말로 기억을 되찾고, 기억으로 말을 되찾을 수 있다.
외할아버지의 마지막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각자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연세가 이미 있으셨던 터라 생존을 목적으로 독한 항암제를 쓰기보다 천천히 조금 더 편하게 돌아가실 수 있도록 처방을 받았고, 병원에 모시는 대신 집에서 엄마와 이모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며 간병을 했다. 내가 프랑스에서 보낸 첫 번째 설날, 영상통화로 세배를 드렸고 할아버지는 나의 인사를 기쁘게 받아주셨다. 첫여름방학, 내가 한국에 갔을 때는 이미 혼자서 거동하기 힘든 상태셨고 나에 대한 기억도 잃으셨다. 말씀을 거의 하지 않으셨고 웅얼거리는 소리로 의사 표현을 하셨다. 밥을 씹는 것도 점점 어려워서 죽이나 과일 간 것을 드리곤 했다. 그러던 할아버지가 밤만 되면 침대에 반쯤 걸터앉아 옛날이야기를 중얼거리셨다. 어려운 시절 오리고기를 먹은 얘기, 한국전쟁 때 폭탄 터지던 얘기... 낮에 보던 할아버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정확한 단어들로 이야기를 하셨다. 갑자기 연결된 기억의 회로가 근육들을 옳게 작동시켰던 걸까.
두 달의 시간이 지났고, 나는 할아버지를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확신 속에서 다시 프랑스로 떠나야 했다. 눈앞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내 인생에서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떠난다는 건 너무나 잔인한 일이었다. 할아버지도 내가 곧 떠난다는 걸 아셨던 걸까. 떠나기 이틀 전 점심을 차리고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내 이름을 크게 소리쳐 부르셨다. 기억의 회로가 연결되고 그 기억이 입 근육을 움직이게 하는 기적. 기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큰 사랑의 힘이었다. 서울행 케이티엑스에서의 기억이 아직도 명확하다. 창밖의 날씨는 너무 좋고, 눈물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목에 큰 복숭아 씨가 걸린 것 같은 느낌. 아빠가 문자를 보냈다.
마음 많이 아프지. 근데 살다 보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 그럴 땐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제일 현명한 방법인 것 같아.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고.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한다는 미안함이 크겠지만 그것 역시 담담히 받아들여야 할 거야. 그래야 할아버지도 맘 편하게 가실 수 있을 거야. 의식 없는 상황에서도 너의 이름을 불러준 할아버지잖아. 그러니 너의 현실 충분히 이해해 주실 거야.
나는 그때 아마도 처음으로 '내가 어른이 되어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목에 사탕이 걸린 것 같이 불편한 느낌이 새겨진 것은 그해 여름, 그 기차 안에서였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서울로 돌아가고 곧 숨을 거두셨다. 나는 비행기 타기 전 이틀 동안 빈소를 지키고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살아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깊이 있게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을 내 입과 목의 근육에 새기기 위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눌 것이다. 다음번에 또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어색한 자리에 나가야 한다면 이날의 M과의 대화가 나에게 용기를 줄 것이다.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나눈 시간을, 배우게 된 새로운 말을 몸에 잘 새기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대화를 게을리하지 말고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말라고. 말을 뱉으며 입술의 근육에, 목구멍에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새기라고. 그 힘으로 또 내일을 살아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