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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

김영하 작가의 강연을 들으러 가던 날

by 에뜨랑제

한 10분 정도 늦었나? 워낙 인기강좌로 객석에는 남은 자리가 없었다. 밖에서 어렴풋이 보기에도 복도까지 청중들이 빼곡히 않아있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공간의 여지가 없었다. 입구에 서 있던 행사 관계자는 이제 출입구를 잠가야겠다고 괜한 으름장을 놓았다. 앞에 서 있던 여성 일행들이 그냥 들어만 가게 해달라고 사정하자, "오늘은 사진촬영, 싸인 그런 거 다 없습니다. 그만 강의만 들을 수 있어요." 하며 선심 쓰듯 극장 문을 열어주었다. 역시 줄을 잘 섰던 것일까? 대기 줄의 맨 끝에 있던 나는 공손한 자세로 조심스럽게 입구를 넘었다. 혹은 이런 게 바로 커트라인인가? 예전 대학입시 때 뉴스에서는 요란스럽게 대학의 합격선이 몇 점인지를 시끄럽게 떠들어댔었다. 요즘에도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문 열고 대학 들어가는 애는 제일 불행하고, 문 닫고 대학 들어가는 애가 가장 운이 좋다는 식의 이야기를 남들은 신경 쓰지도 않고 이야기하고는 하니 말이다. 예전과 다음 없이 현재 한국사회도 아직 경쟁이 극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 열고 들어간다는 것은 최고점으로 대학에 합격한 경우이고, 문 닫고 들어간다는 것은

최저점으로 대학에 합격한 경우를 뜻한다.)


겨우 문을 들어서니, 극장 안은 사람들로 빼곡하고 캄캄해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어 한참을 두리번거려야 했다. 그때 문 바로 옆에 서 있던 여성분이 나에게 하는 이야기가 "저기 앞으로 가서 바닥에 앉으세요."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제가 오늘 스커트를 입어서 바닥에 앉기가 그러네요, 그냥 저도 문 앞에 서있어도 될까요?" 하며 살짝 양해를 구했다. 그 뒤에도 몇몇 분들이 출입문을 통과해 들어오기는 했는데, 진행자들의 통솔로 일단 들어온 관객들은 어디라도 바닥에 앉아야만 했다.


잠깐의 클래식 삼중주 연주가 끝나고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정말 연주를 즐겨서 박수를 쳤는지, 이제야 연주가 끝나고 보고 싶은 작가를 만날 수 있겠다는 기대 어린 박수였는지 그건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아무튼 별다른 시간 지체 없이 오늘의 주인공 김영하 작가가 바로 등장했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본 그의 모습. 내 눈에도 보였던 무대 위 그의 후광에 쿵 하고 심장소리가 느껴졌다. 그는 전혀 긴장한 기색도 없이 바로 강연을 이어나갔다. 연청바지에 연하늘색 남방을 무심히 걸친 그의 모습에서 자유로운 감성이 물씬 풍겼다. 작가는 무대 위를 자연스럽게 걸어 다니며 오늘의 주제인 공감과, 소통, 그리고 이야기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정말 타고난 스토리텔러라고 해야 하나? 그의 이야기에 청중들은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중간중간 폭소가 터지며 연신 청중을 압도하는 그의 모습에 나도 탄복했다.


그렇게 한참을 재미나게 듣고 있는데, 무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움직임이 있는 강연자와 달리 한자리에서 가만히 서서 듣고만 있어야 하는 나는 슬슬 다리, 골반, 엉덩이 할 것 없이 쑤시고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바로 앞쪽에 앉아있던 양복 입은 젊은 남성 청중이 일어나더니 출입구로 고개를 숙이며 걸어오는 게 아닌가. 내 옆에서 출입구 벽에 붙어 계속 서있던 여성 관계자 분이 그에게 물었다. "아예, 나가시는 거예요?" "네"


짧고도 간결한 대답을 들은 그녀는 바로 나를 보며 말했다. "저 자리에 가서 앉으세요."


그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눈치 볼 것 없이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지만, 그녀는 바로 나를 지목해 내가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인도해 준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가벼운 목례와 눈인사를 보내고 다른 사람 눈치 볼 것도 없이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 자리에 앉았다. 마침 그 옆자리 여성분이 내가 좁은 공간으로 힘겹게 들어오는 것을 보고, 세워져 있던 의자를 내려 붙잡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도 가벼운 목례와 함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짧게 전했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잠깐 스친 인연들의 도움으로 내 하체의 고통은 바로 종식되었다. 미리 이 상황을 설계해 놓은 것도 아니고 그냥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재빠르게 정리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전세는 역전된다.


나는 들고 온 메모지에 그의 어록을 적으며 보다 더 진지하게 강의에 임할 수 있었고 그 시점부터가 그날의 하이라이트라고 본다. 이전의 강의내용은 듣고 웃으며 소비되었다고 하면, 이제는 나부터 강의에 심도 있게 집중하고 주제도 확실하게 이해하며 필기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주제는 다음과 같다. 바로 과거의 나는 타인이라는 것.


타임 슬립처럼 과거의 나로 가서 당시 상황을 이해해 본다면 어떨 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해 소설 속 인물을 투영해 나 자신을 만나기와 진정한 자아는 잘 만들어진 이야기를 통해서 만나게 된다. 등 내가 평소에 글을 읽으며 어렴풋이 느꼈던 오묘한 감정을 거침없이 정의 내려 준 것이다.


참, 강연 전 미리 받은 관객들의 질문 코너도 있었는데, 젊은 세대들의 호기심과 궁금증이 그대로 질문으로 드러나 그에 대한 답변으로 관객들도 같이 수긍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AI의 창작활동에 대한 견해부터 자녀출산 문제 등이 생각난다. AI의 창작활동은 이미 시작되었다면서 법, 의학 분야 등의 전문분야는 누군가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므로 접근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와 앞으로 예술 분야에서 더 왕성해질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그래서 요즘도 의대 열풍이 광풍처럼 이어지고 있구나 하고 수긍할 수 있었다.


마침내 강의가 끝나고 미리 고지한 데로 사진촬영, 싸인 요청 등은 받지 않았다. 그는 사인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는데, 만약 50명에게 사인을 해주면 대략 1시간 정도 걸리고 행사가 끝나도 공무원들이 퇴근을 못한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에 관객들도 모두 공감을 했는지 마지막 멘트 "감사합니다."에 청중들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찬찬히 극장 안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나는 맨 뒷줄이라서 금세 극장 안에서 나올 수 있었다. 회관 안의 후끈한 열기와는 달리 바깥공기는 시원했다. 아직은 많은 인파가 나오지 않아 한산한 주차장의 넓은 공간을 가로질러 거침없이 걸었다. 캄캄한 그 늦은 시간에 안전하게 밤거리를 활보하는 나 자신에게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아마 발걸음에도 리듬감이 묻어났을 것 같다. 마침내 주차되어 있는 내 차에 도착했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켜니 안도감이 밀려왔다. 저 멀리 주차장을 천천히 빠져나가는 밀려있는 차들을 자리에서 지켜보며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카오디오를 켜 핸드폰 안에 내장되어 있는 내 플레이리스트의 음악을 들었다. 첫 번째 곡은 스티브 원더의 'overjoyed' 나는 그때 기쁨에 넘쳤다. 겁이 많아 밤 시간에는 외출도 잘하지 않는 나에게 갑자기 주어진 선물 같은 시간. 많은 젊은이들이 빼곡한 그 북콘서트 장에서 그들과 열정을 나누고 누릴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곳 어디에도 무기력한 청춘은 없었다. 앞으로도 전주시에서 이런 문화행사의 기회를 보다 더 많이 주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음 곡은 Olivia Dean의 'Dive'.

정말이지 그때 기분으로는 여건만 된다면 나는 바로 다이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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