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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un 05. 2024

성시경이 부릅니다. 웰치스는 감동이었어~

<  D-511 > 2024.06.04

37일 만의 재회를 위해 엄마는 며칠 전부터 마음이 분주했단다.

집안일을 내팽개칠 정도로 바쁜 시기였지만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장을 보고 먹고 싶다는 도넛을 시간 맞춰 주문하는 일에는 짬을 내었다. 너를 만나기 전날 미역국을 끓이고 갈비찜을 했으며 밑반찬을 했다. 덕분에 네 형과 아빠도 오랜만에 집밥을 먹었구나.  


군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것을 의식했는지, 연병장 대신 강당 수료식을 택한 훈련소. 땡볕 아래 서 있다가 쓰러지는 훈련병 발생 시 생길 민원보다는 강당 밖 유리창으로 아들을 보느라 답답했다는 민원이 차라리 나았다고 판단했나 보다. 창문에 몇 겹으로 다닥다닥 붙어서 보라고 우리를 부른 거냐, 이럴 거면 수료식을 왜 개방하느냐고 투덜거리던 부모들은 아들들의 등장과 함께 조용해졌다. 심지어, 오늘 같은 날씨에 연병장에서 수료식을 했다면 쓰러지는 훈련병이 있었을 것이라며 혹시 있을 민원을 일축했다. 자식의 고난보다는 자신의 불편을 기꺼이 감수한 것이다.


저 멀리서 강당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오는 훈련병들 사이에서 너를 찾기 위해 목을 빼고 있는 엄마에게 옆에 있던 아저씨가 그랬지. "애쓰지 마셔요. 마스크 써서 누가 누군지 안 보여요~" 하지만 엄마는 확신했다. 네가 한눈에 보일 거라고. 그리고 정확히 찾아냈지. 매서운 눈으로 오열을 맞춰 걷는 네 모습을 놓치지 않으며 네가 서 있는 곳 바로 옆 창문까지 따라갔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군기 잡힌 몸, 충성을 외치며 경례하는 절도 있는 손, 울대가 튀어나올 정도로 외치는 군가. 뭘 저렇게 열심히 하나 하다가 이내 '그렇지. 저 모습이 너지.' 했단다.


퇴소식 때는 울지 않겠다더니, 사나이가 된 너는 환한 모습으로 엄마아빠를 맞이해 주더구나. 다부져진 몸 때문이 아니라 풍기는 아우라에서 단단함이 느껴졌다. 감히 엄마도 눈물을 보일 수가 없었지. 그저 반가움, 기쁨만이 가득한 하루였다.


헤어지는 순간, 너는 37일간 매일 쓴 한 줄 일기 노트를 전해주었지. 엄마의 브런치 글쓰기에 활용하라는 당부가 어찌나 웃기고 고맙던지. <엄마의 고무신 일기> 구독자로서 엄마에게 묵직한 글감 꾸러미를 전해주었구나. 집에 가는 길에 큰소리로 읽었다.

1. 억겁의 시간을 고민하게 하는 첫날입니다.
2. 하루가 이리도 길 수 있었나 싶은 날입니다.
3. 가장 작은 치수 베레모로 기뻐하는 나를 보며, 벌써 3일이네.
4. 그랬다. 달리기와 내 자존심은 최고의 고문 기구였다.
5. 똥 세 번째. 똥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자 행복.
6.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7. 첫 라면은 그럭저럭. 불교가 재밌네.
8. 무소식이 희소식, 쓸 말이 없다는 건 잘 적응했다는 것.
9. 1차 체력. 윗몸 43/ 푸시업 15. 나쁘지 않나?
10. 무조건 수방사. 믿으면 이루어지리라. 말하는 대로!
11. 처음으로 다쳤어. 뛰다가... 그래도 완주는 했어. 친구가 밴드 빌려줬어.
12. 적금은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 미래는......... 많이 멀다는 것.
13. 부식도 많으면 짐짝이 된다.
14. 훈련이 폭풍 전야. 오목으로 근심을 이어 본다.
15. 오늘 내 세상이 무너졌어. 운은 절실함을 부수는 확실한 방법. (ft. 수방사)
16. 세상엔 우매한 사람이 많고, 그로 인해 이해 불가한 일이 발생한다.
17. 글의 목표를 정했어. '한 줄의 필력이 좋아지길'
18. '총을 잘 쏘기보단 어디서 쏘는지가 중요하다'라고 생각하련다.
19. 제1 수송 교육 연대! 말하는 대로가 아닌 행복한 '데'로!
20. 나를 위한다면, 벌점을 받아 배식조를 해서는 안 돼.
21. 어깨가 아파오기 시작했어.
22. 성시경이 부릅니다. 웰치스는 감동이었어.
23. 내일 앞 중대가 수료하면 최고참이 된다. 근데 이제 후임이 없는...
24. 방독면을 벗는 게 무식해 보이면서도 안 벗은 게 아쉽지는 않았다.
25. 개밥바라기 별이 되어 해로 달구어지면서도 동시에 제 스스로가 차가워진다. - 몸살
26. 2차 체력. 윗몸 67 / 팔굽 30 / 3Km 14분
27. 풀어주는 거 보니 수료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28. 아플 거면 혼자, 미리 아파야 다 같이 아플 때 편히 쉰다.
29. 조기 퇴근은 탈영한 훈련병도 돌아오게 만들 수 있다.
30. 야간 훈련 후 보이는 북두칠성은 배식조의 끝을 알리는 국자 같았다.
31. BB탄보다 재미없는 각개가 끝나고 먹고 싶은 게 점점 생각난다.
32. 20km 땀에 눅눅해진 A급 전투복.
미지근한 물로 설익은 참깨라면.
아껴 먹느라 반이 남은 게토레이와 녹아서 납작해진 트윅스.
명치에 차갑게 달라붙은 군번줄.
훈련의 종료를 알린다.
33. 역병이 퍼지는데 상황을 알려줄 수 없다는 말이 공포다.
34. 비슷하게 생긴 사람은 행동, 말도 비슷하다. 관상은 과학이다.
35. 흡연이 벼슬이다. 비록 나는 천하리라.
36. 지금까지와 앞으로의 군 생활을 버틸 마지막 한 줄.
37.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끝.

번외.
- 나는 코를 잘 안 고는 편이었다.
- 푸른 거탑에서 파리 날리는 배경이 장난인 줄 알았다.
- 중간만 가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 세상엔 그들에겐 평범한, 나한테는 신기한 삶을 사는 사람이 많다.
- 의외로 일을 똑바로 처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억겁의 시간을 떠올릴 만큼 시작은 막막했으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로 정리하는 마지막.

수방사 차출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면서 "운은 절실함을 부수는 확실한 방법"이라는, 자조 섞인 깨달음.

원활한 배변과 작은 머리 치수같이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는, 갇힌 자의 소확행.

태어나 처음 만나보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몸으로 부딪히며 차곡차곡 쌓았을 인간 빅데이터.

좋아하던 음료 웰치스를 얼마나 극적인 순간에 만났을지 알 수 있는, "성시경이 부릅니다. 웰치스는 감동이었어."

끝난 줄 알았는데 이어질 군생활처럼 뒷장에 이어진 번외 편.


단 한 줄이었지만 네 하루를 꽉꽉 채워 넣은 것처럼 그날의 고달픔, 그날의 달콤함, 그날의 소망, 그날의 절망이 모두 전해지더라. 아직 한 달밖에 지나지 않은 군생활이건만 네 사유의 깊이는 18개월을 압축한 것 같았고, 필력은 엄마의 브런치 생활 54개월이 무색할 정도였단다.


<37일. 225번으로의 일기>라고 쓴 제목처럼, 이름 석 자가 아니라 번호로 기억되던 훈련병의 37일이 끝났구나. 오늘은 후반기 훈련이 있는 수송교육연대에서 보내는 첫날. 이곳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하다. 아니, 그 하루를 네가 어떻게 기록할지가 궁금하구나.


아들아. 아니 젊은이!

브런치에 들어올 생각 없는가?

라라크루에 합류할 생각은 없나?

웰치스를 맘껏 제공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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