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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선생님, 읽어보세요

by 콩나물시루 선생님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교실 속 방학의 여파를 조금씩 덜어냅니다. 아이들도 선생님도 2학기가 조금씩 익숙해집니다. 준비가 되었으니 2학기 행사를 시작해 볼까요?


2학기, 첫 번째 행사는 <우리 반 베스트셀러>입니다. 거창한 이름이지만 방법은 단순합니다.


하나,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자신의 책 한 권을 교실에 제출한다.

둘, 일정 기간(3~4주) 동안 친구의 책을 자유롭게 빌려 읽고 감상평을 남긴다.

셋, 기간이 끝나면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뽑는다.


1학기부터 한두 달에 한 번씩 진행된 독서행사가 어느덧 네 번째가 되었습니다. 횟수가 늘어갈 때마다 규칙이 세분화되고, 방법은 진화하지만 기본 틀은 벗어나지 않습니다.


6학년 아이들이 추천한 책을 보니 초등학교 3~4학년 용 어린이 소설부터 청소년 소설, 심지어 성인 소설까지 장르와 소재가 다양합니다. 아이들 책을 보니 저도 읽어 보고 싶어 집니다. 그래서 올해, 처음으로 변칙을 넣어봅니다. 두 번째 행사부터 선생님도 책을 제출하고 한 달간 아이들과 함께 활동에 참여합니다.


마음이 모두 비슷해서였을까요? 제가 읽어 보고 싶은 책은 아이들에게도 인기였습니다. 정해진 기간 내, 인기가 많은 책은 제 손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우리 반 베스트셀러 활동이 끝난 후, 책 주인에게 선생님 마음 한 조각을 살짝 꺼내 봅니다.



-네 책 재미있어 보여 읽어보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인연이 닿지 않았네. 선생님도 기회가 되면 읽어봐야겠다.


-선생님, 그럼 한 번 읽어 보실래요? 제가 빌려드릴게요. 이거 엄청 재미있어요.



아이는 선뜻 자신의 책을 선생님에게 내어줍니다. 제 생각을 읽어준 아이의 마음과 자신의 책을 기꺼이 내어준 마음씨가 고맙습니다. 선생님은 감사의 표시로 작은 카드에 감상평과 고마움을 담아 아이에게 다 읽은 책을 돌려줍니다.


어느 순간 선생님과의 작은 연결고리가 소문이 납니다. 특별할 것 없는 짧은 감상평을 담은 선생님의 편지가 누군가에게는 꽤나 신기했나 봅니다. 선생님의 편지를 받아보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생겨납니다. 편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간단하지요.


선생님께 재미있게 읽은 책 빌려주기


<우리 반 베스트셀러> 활동 기간 외 본인이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선생님께 추천하고 빌려주면 됩니다. 책을 좋아하는 선생님은 어떤 책이라도 환영입니다.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아이들은 조심스레 책자랑만 할 뿐, 선생님께 쉽사리 '읽어보세요'라고 권하지는 않습니다. 아마 선생님에게 권하는 건 부담이었을까요?


저 또한 활동 기간을 제외하곤 아이의 책을 함부로 빌리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부탁이 강요로 비칠 수 있기에 그저 아이들이 다가올 때까지 말없이 기다립니다.





2학기, 네 번째 <우리 반 베스트셀러>를 시작하기 전 아이들과 서로의 책을 공유하며 소개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이때 아이 하나가 김혜정 작가의 [흔들리는 십 대를 지탱해 줄 다정한 문장들]을 소개합니다. 1학기, 1위로 뽑히지는 않았지만 반에서 꽤나 많은 표를 얻었던 [오백 년째 열다섯] 작가가 쓴 책입니다.


[오백 년째 열다섯]은 책을 즐겨 읽는 수줍은 많은 친구가 1학기 활동 중 추천한 책이었습니다. 당시 이 책은 입소문을 타고 저희 반에서 인기를 끌었지요. 활동 기간 중 책 선반에 올려두기 무섭게 사라져 결국 제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활동이 끝난 후 책을 읽어보고 싶었지만, 워낙 말수가 적고 조용한 아이라 말을 거는 것조차 아이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았지요. 다음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만 남긴 채, 그렇게 마무리된 걸로 기억하는 책입니다.



-지원이가 추천한 [흔들리는 십 대를 지탱해 줄 다정한 문장들]을 먼저 읽어봤는데, 어른인 선생님에게도 참 와닿는 글귀가 많았단다. 1학기 때 <우리 반 베스트셀러>에 같은 작가님 책이 있었는데, 이런 글을 쓰신 분이라면 다른 책도 재미있겠지? 선생님은 인연이 닿지 않아 읽지 못했지만,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꼭 한 번 읽어봐야겠다.


-맞아요. [오백 년째 열다섯] 작가님 책이에요. 1학기 때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 책 시리즈로 나왔는데, 시리즈가 전부 다 재미있어요.



선생님의 부연설명을 시작으로 아이들은 자신들이 읽은 책을 떠올리며 너도 나도 감상평을 이야기합니다. 정작 1학기 책 주인은 마치 내 일이 아닌 냥 조용히 아이들의 이야기만 듣고 있습니다.





2학기, 네 번째 <우리 반 베스트셀러>를 시작하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수줍음 가득한 아이가 쭈뼛쭈뼛 조심스레 저에게 다가옵니다. 멈춰 선 아이가 교탁 위로 조용히 책을 내밉니다. [오백 년째 열다섯]입니다.


-선생님, 이거 읽어보세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속삭인 아이는 책을 내려놓고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하루에 말 한마디조차 잘 붙이지 않는 아이가 저에게 다가오려고 얼마나 큰 용기를 내었을까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권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수줍음 가득한 열세 살 여자 아이에게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지요. 용기를 담아 먼저 손 내밀어 준 아이의 모습이 참 대견합니다. 아이가 보여준 따스한 마음에 선생님도 환한 웃음으로 답해봅니다.


-이 책 선생님 빌려주는 거야?


아이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옅은 미소를 보이며 고개만 끄덕입니다. 그런 아이를 보니 선생님 마음에도 말간 가을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쬡니다. 아이에게 어떤 말로 다가갈 수 있을까요. 선생님도 그저 아이처럼 수줍은 웃음을 띄우며 마음을 전해봅니다.


정말 고마워. 네 책도, 네 용기도, 네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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