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랑 산다-4
주방에 있는 여러 조리 기구들 중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핵심 멤버는 무엇일까? 단 하나를 고르라면 가열 조리 기구가 아닐까 생각된다. 인류의 진화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불을 다룰 수 있는 가열 조리 기구의 기술 발달 역사와 그 안에 담긴 과학을 만나보기로 한다.
불로 조리한 음식과 인류의 진화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 (Sapiens: A Brief History of Humankind)>에서 불로 음식을 익혀 먹는 화식(火食)은 인류 두뇌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인류가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직립원인) 단계로 진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하라리는 진화인류학자인 하버드 대학의 리처드 랭엄(Richard Wrangham) 교수의 ‘요리 가설(cooking hypothesis)’에 기반하여 이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약 150만 년 전 인류는 불을 통제하기 시작했다고 추정된다. 불은 야생동물이나 추위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주고 밤 활동을 가능하게 해 인류 생존에 큰 이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음식을 익혀 먹는 혁명적 사건이 시작될 수 있게 하였다. 화식은 인류의 에너지 균형을 완전히 바꾸어 뇌의 급격한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익힌 음식은 사전 소화된 상태와 같아서, 소화 기관이 영양분을 흡수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크게 줄어들었다. 에너지를 덜 쓰는 효율적인 소화 기관 덕분에, 인류는 긴 창자를 줄이고 그 절약된 에너지를 다른 기관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절약된 에너지가 인체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기관인 뇌로 집중적으로 공급되었다. 충분한 에너지가 뒷받침되면서 뇌는 계속 커졌고, 이는 사피엔스가 가진 뛰어난 지능의 토대가 되었다.
화식은 뇌뿐만 아니라 인류의 다른 신체적 특징과 사회 구조도 바꾸었다. 음식을 씹는 데 필요한 힘이 줄어들면서 턱과 치아가 퇴화하고 작아져 얼굴 모양이 현대인과 비슷해지는 데 기여했다. 또한 하루 종일 날음식을 씹는 데 소비하던 시간(침팬지는 하루 5시간 이상)이 크게 줄어들어, 남는 시간을 사냥, 도구 제작, 사회화 등 다른 활동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불 주변에 모여 음식을 익히고 나누는 과정은 협력과 분업을 강화하고 사회적 유대를 증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라리는 화식을 "최초의 진정한 문명화의 시작"이자 "인류의 진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일 요소"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화식 없이는 현생 인류의 특징인 크고 에너지를 많이 쓰는 뇌가 발달할 수 없었다고 강조한다.
가열 조리 기구의 역사
인류가 불을 발견한 것은 지금으로부터100만 년이 넘지만, 불을 이용해 음식을 조리한 역사는 이에 비해 훨씬 짧다. 사냥한 동물들을 불에 구워 먹는 원시 불 구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5만 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약 2만 년 전부터는 돌판을 달구어 그 위에서 음식을 조리하기 시작했으며, 도자기나 금속 그릇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지만 오랫동안 나무 등의 고체 연료에 직접 불을 붙여 사용하였다.
유럽의 경우 18세기에 금속 스토브가 등장하고 굴뚝이 발명되어 고체 연료에 불을 붙여 사용할 때 발생하는 연기와 그을음을 크게 개선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청동기 후기 ~ 초기 철기시대(기원전 1,000년 경)에 움집 내에 불을 피우던 화덕과 연기나 나가는 연도를 연결한 원시 구들이 등장하고 삼국시대(기원전 1세기 ~ 7세기)에는 주거 내 아궁이와 구들 구조가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서 조선시대를 지나면서 조리용 아궁이와 난방용 구들이 분리되어 본격적인 주방의 가열 장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석탄이나 나무와 같은 고체 연료 스토브는 1820년대에 가스스토브가 발명되기까지 오랫동안 대체 불가의 주방 가열 장치였다. 1826년 영국의 제임스 샤프(James Sharp)가 도시가스(당시는 석탄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최초의 가스레인지를 발명하여 특허를 등록했으며, 1836년에는 가스레인지 제조 공장을 세워 상용 가스레인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00년대 초에는 도시가스 보급과 함께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 가스레인지가 주방의 가열장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가스레인지는 고체 연료 스토브에 비해 매연이 없는 깨끗한 주방 구현을 가능하게 했으며 특히 불의 세기를 쉽게 조절할 수 있어 주방 혁명의 1등 공신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50년대 후반까지 대부분의 가정은 나무를 때는 아궁이 또는 연탄아궁이를 사용했다. 일부 도시 지역에서는 석유곤로(등유레인지)가 등장했지만, 보급률은 낮았다. 이 시기엔 아직 가정용 가스 사용 인프라가 전무했다. 1960년대 후반, 일본 등에서 수입된 LPG(액화석유가스)가 가정용 연료로 소개되었으며, 1970년대 초반부터 가정용 프로판가스통과 가스레인지가 본격 판매되기 시작했다. 도시가스망이 없던 시절, 가스통을 배달·교체하는 방식으로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1983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일대에서 대한도시가스가 처음으로 천연가스(LNG) 공급을 개시함으로써 우리나라도 도시가스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기반 시설이 급속히 확충되면서 서울 전역과 주요 광역시로 도시가스가 확대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가스레인지가 주방의 주된 가열 조리장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전기가 조명(백열등)을 중심으로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발명가들은 전기를 이용해 열을 만드는 ‘저항 가열 원리(resistive heating)’를 활용해 가열 조리 기기를 만들려는 시도를 시작하였다. 최초의 전기레인지는 1882년 캐나다의 토머스 아헌(Thomas Ahearn)이 발명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캐나다 오타와의 한 호텔에서 전기레인지로 만든 저녁 식사를 선보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당시 전력 공급망이 충분하지 않아 상용화되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892년 미국의 토마스 카펜터(Thomas Carpenter)는 보다 실용적인 전기레인지 모델을 만들어 특허 등록을 하였다. 그 후 1905년 미국의 얼 리차드슨(Earl Richardson)이 발명한 ‘핫포인트(Hotpoint)’라는 이름의 전기다리미와 전기레인지 시리지가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가 만든 Hotpoint Electric Heating Company는 훗날 GE(General Electric)의 전신이 되었다. 1910년 ~ 1920년 사이에 가정용 전력 공급이 안정화되면서 전기레인지의 대량 생산 및 판매가 시작되었는데 초기 모델은 코일형 가열기 형태였다.
1950년 ~ 1960년대에는 유리 세라믹 상판, 자동 온도조절 기능을 갖춘 전기레인지가, 1980년대 이후에는 할로겐 히터를 이용한 현대적인 전기레인지와 인덕션레인지가 등장하였다. 또한 1945년에 퍼시 스펜서(Percy Spencer)가 발명한 전자레인지도 새로운 주방의 가열 조리 기구 대열에 합류하였다. 우리나라 주방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전기밥솥의 경우 1955년 일본의 도시바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되었는데, 초기에는 저항선에 의한 단순 가열식이던 것이 1990년대에는 압력밥솥 기술이 적용되고, 2010년 이후에는 인덕션 히팅(IH, Induction Heating) 기술이 적용되었다.
가장 최근에 주방 가열 조리 기구에 합류한 에어프라이어는 1990년대부터 개발이 시작되었다. 2010년 필립스사가 독일 베를린 IFA(국제가전박람회)에 최초로 시제품을 공개한 후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가열 조리 기구의 과학
현재 우리나라 일반 가정에서 가장 널리 사용하고 있는 가열 조리 기구인 가스레인지는 연료로 프로판가스, 부탄가스 및 천연가스(LNG, 도시가스) 등을 사용한다. 이러한 가스들과 공기를 혼합하여 연소시킬 때 발생하는 불꽃의 화염열로 조리를 하게 된다. 불꽃의 온도는 약 800 ℃ ~ 1000 ℃이고, 직접 가열이기 때문에 즉각적인 가열이 가능하다. 하지만 연소 시 실내의 산소를 사용하기 때문에 통풍이 필수적이며 산소가 부족할 경우 일산화탄소가 발생할 수도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열효율은 40 % 정도로 낮은 편이다.
한편 전기레인지의 경우 히터 내로 전류를 흘려 저항에서 발생하는 줄열효과(Joule heating effect)를 이용해 가열한다. 줄열을 발생하는 저항체로는 니크롬선(NiCr), 철-크롬 합금(FeCr) 및 세라믹 저항체 등이 있다. 열을 위로 전달하면서도 깨끗하고 강한 레인지 표면을 만들기 위해 강화유리(세라믹 글라스)를 상판으로 사용한다. 조리 중 표면 또는 팬의 온도를 실시간 측정하여 과열을 방지하는 온도 센서나 제어 회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라믹 히터를 사용하는 하이라이트 타입의 경우 적외선을 방출하여 조리 용기를 가열한다. 연료를 연소하지 않기 때문에 실내 산소를 소모하지 않으며 표면 온도는 500 ℃ ~ 600 ℃까지 가열이 가능한 클린 가열 장치다.
인덕션레인지의 경우 조금 복잡한 과학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레인지 내부에 있는 인덕션 코일에 약 20 kHz ~ 60 kHz의 고주파 교류 전류를 흘려 전자기 유도 법칙(패러데이 법칙)에 따라 주변에 자기장이 형성되게 한다. 이 자기장은 자성 금속의 냄비 바닥에 유도전류(와전류, eddy current)를 만들고 이 전류로 인해 냄비 내부에서 저항열이 발생하여 그 안에 있는 음식을 가열하게 된다. 즉 인덕션레인지는 외부에서 직접 열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조리 용기 자체를 발열체로 만드는 기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성을 띠지 않는 냄비는 가열이 되지 않는다. 열효율이 약 90 %로 높고, 빠른 가열과 정밀한 온도 조절 및 레인지 상판은 뜨겁지 않아 안전한 장점이 있다. 특히 불꽃이 없고 히터의 표면이 뜨거워지지 않기 때문에 튀김이나 프라이처럼 기름을 사용할 때에도 화재나 화상 위험이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자성이 없는 유리, 구리, 알루미늄 및 자성이 없는 스테인리스 냄비(예: 304 재질 중에서도 자성이 없는 일부 제품) 등은 사용할 수 없는 단점도 있다.
전자레인지(microwave oven)는 마그네트론(magnetron)이 발생시키는 마이크로파(2.45 GHz)를 이용하여 음식 내부의 물 분자를 빠르게 진동시켜 분자들의 마찰열이 발생하게 함으로써 음식을 가열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이 내부에서부터 가열되게 된다. 가열 속도가 매우 빠르고, 에너지 효율이 높으며 음식의 수분 손실이 적은 장점이 있지만, 물이 끓는 온도인 100 ℃ 이상으로 온도를 올릴 수 없어 표면 갈변반응이 나타나지 않고, 금속 용기를 사용할 수 없으며 고르게 가열되지 않을 수 있는 단점도 있다.
최근에 사용이 증가하고 있는 에어프라이어(Air Fryer)의 경우 고온의 공기(180 ℃ ~ 200 ℃)를 고속 팬으로 순환시켜 음식 표면을 대류열로 가열하는 방식이다. 기름 없이도 열풍이 식품 표면에 갈색의 반응(마이야르 Maillard 반응)을 만들기 때문에 튀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기름을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건강하면서도 ‘겉바속촉’의 음식을 빠르게 만들 수 있지만, 내부 용량이 제한되고 바삭하지만 수분 손실이 커 마르기 쉬우며, 일부 음식은 조리 균일성이 낮은 단점도 있다.
가열 조리 기구의 발달과 음식 혁명
가열 방식의 발달과 함께 이를 이용한 요리들로 변화해 왔다. 고체 연료로 직접 가열하던 시대에는 복사열을 활용한 직화구이의 고기와 빵 등이 주식이 되었다. 물을 담을 수 있는 냄비나 솥이 등장하면서 삶거나 찌는 요리와 국물이 있는 찌개와 밥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굴뚝 및 스토브가 발명된 이후에는 실내에서 안정적으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오븐 등이 등장해 베이킹이 가능해졌으며 요리가 보다 섬세해지게 되었다. 그 후 가스레인지가 등장하면서 순간적인 화력 조절이 가능해짐으로써 볶음이나 튀김 등 순발력이 필요한 요리가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웍을 사용하여 고화력에서 빠르게 만드는 요리가 등장하였다.
전기 레인지나 오븐의 등장으로 장시간 일정하고 균일한 온도 유지가 가능해지면서 서양식 홈 베이킹이 대중화되었다. 압력 전기밥솥의 등장으로 초고속 습열 조리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맛있는 밥뿐만 아니라 빠른 스튜, 찜 등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요리를 일상에서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전자레인지나 인덕션 히터의 등장으로 조리 과정의 속도, 안전성, 및 정확성이 극대화되었다. 초단시간의 재가열 및 해동이 가능해짐으로써 가정간편식 및 냉동식품 시장이 확대되었다. 에어프라이어의 등장은 기름 없이도 간편하고 빠르게 튀김과 같은 맛을 내는 건강한 음식 조리를 가능하게 하였다.
미래의 주방
미래의 주방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가열 조리기구는 무엇이 될까? AI가 예측한 미래 핵심 가열 조리 기구는 하이브리드 스마트 오븐이다. 인덕션, 마이크로파, 적외선, 스팀 및 에어프라이 기능이 합쳐진 복합조리기다. 조리 중 음식의 조리 상태를 AI 비전센서가 실시간 분석하고, AI 레시피 엔진이 자동으로 열원 종류를 전환하여 최적 조리를 함으로써 겉은 에어프라이로 바삭하게, 속은 스팀으로 촉촉하게 조리를 해내게 될 것이다. 이미 삼성 Bespoke AI 오븐이나 Brava Smart Oven 등이 이런 복합조리기기의 초기형태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인덕션 기반의 ‘스마트 서피스(smart surface)’ 기술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주방 전체가 조리기구가 되는 평면 인덕션 시스템이다. 조리 기구를 어디에 놓든 자동 인식하여 그 부분만 가열하고 도마, 식기, 프라이팬 등이 모두 IoT(Internet of Things 사물 인터넷) 조리 네트워크로 연결된다. 이와 함께 열 대신 에너지 입자를 이용해 음식 분자 구조를 제어하는 저온 플라스마 및 레이저 조리 시스템도 등장할 것이다. 이 조리 시스템의 특징은 음식의 수분을 유지하면서 미세한 표면 가열이 가능하여 ‘영양 손실 제로’를 구현하는 과학적 정밀 조리 기술이 될 것이다.
2040년 어느 날, 미래씨는 아침에 눈을 뜨고 주방으로 나온다. 주방은 이미 잠에서 깨어 미래씨의 생체 데이터를 인식해 오늘의 컨디션에 맞는 단백질, 탄수화물 비율을 계산하여 AI 하이브리드 오븐이 빵을 굽고, 저온 플라스마 조리로 계란의 노른자 질감을 맞춤형으로 완성한다. 그렇게 마련된 가벼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근한 미래씨는 오후가 되면 회사에서 스마트폰으로 ‘집밥 모드’를 실행한다. 그러면 집에 있는 주방은 원격으로 작동을 시작한다. 냉장고는 보관 중인 식재료를 고르고 AI 오븐과 IoT 네크워크를 통해 조리 도움 로봇이 재료 손질부터 조리까지 자동으로 저녁 식사를 마련한다. 퇴근 시간에 맞춰 온도와 식감이 최상인 상태의 식사가 차려진 멋진 테이블이 퇴근하는 미래씨를 반갑게 맞는다.
* 이 글은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사보 <KRISS> 2025 겨울호에 실린 제 과학 칼럼입니다.
글을 실어준 '한국표준과학연구원'과 멋진 편집을 해준 '(주)홍커뮤니케이션즈'에 감사드립니다.
*사진 출처: KRISS 2025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