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양이 가족을 기억하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고양이 가족과의 여름 한때

by 일랑일랑

고양이 가족이 하나 있었다.


어느 해 홀로 사는 앞집 할머니는 할머니의 집에서 새끼를 낳은 암코양이를 돌봐주게 되었다. 돌봐준다는 것이 별 것 아니라, 고양이 사료를 사서 스텐 그릇에 채워놓고, 빈 그릇을 하나 두어 고인 빗물을 고양이가 마시게 하고, 비가 오는 날에는 고양이들이 장작더미를 덮은 비닐 아래 숨을 수 있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한낮에 할머니네 대청마루에 고양이가 앉아 꾸벅꾸벅 졸아도 놀래키거나 쫓아내지 않는 그런 보살핌이었다.


인간세상의 한 세대가 30년 정도의 시간차가 있다면, 시골 고양이의 한 세대는 반년 쯤 되려나. 올해 할머니댁에 눌러앉은 고양이 셋은 할머니 집에서 태어난 세 번째 세대이고, 이 중 둘 사이에서 새끼가 두 마리 더 태어나 아빠, 엄마, 고모(혹은 이모?) 딸(날쌘이) 아들(애꾸눈) 이렇게 다섯 가족이되었다.


퇴직을 하고 어느날 전업 가정주부가된 우리 엄마나 그 할머니나 외롭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애꾸눈이 아니었던 애꾸눈이 하루 밤 새에 어디선가 애꾸눈이 되어 집 앞을 서성이자 엄마는 마음이 쓰였나보다. 엄마는 애꾸눈이 우리 집 데크 위에 올라와 야옹거리면 남은 오뎅이나 남은 반찬을 던져 주기 시작했다. 애꾸눈이 작은 배를 채워갈 때 쯤이면 날쌘이나 아빠, 엄마, 고모 등이 어디선가 나타나 엄마 주변을 뱅뱅 맴돌았다. 엄마는 어느 순간부터 읍내에 있는 마트에 갈 때마다 오뎅이나 같은 것을 한 봉지씩 더 사 오기 시작했다. 애꾸눈이 애꾸눈이 된 올해 여름 사이에 고양이 가족은 우리 가족의 삶으로 들어왔다.


앞집 할머니댁에서 빈둥거리거나 우리 밭에 놀러와 소일하던 고양이들은 엄마가 야옹아~하고 큰 소리로 세 번 정도 부르면, 항상 다섯에 세 마리쯤은 오도도도 멀리서도 귀신 같이 달려왔다. 엄마가 주는 오뎅이며 맛살, 먹다 남은 고기 같은 것을 참 맛있게도 받아 먹었다.


먹이를 받아 먹기 시작한 이후로 요놈들의 장난도 늘었다. 아무데나 올라가는 것은 예사이고, 빨래 널어논 곳 아래에서 와다다 장난을 쳤다. 말려두려고 깨끗이 씻어 밖에 내놓은 땅콩 위에 떡 하니 앉아서 우리를 새초롬히 쳐다보기도 했다. 그 능청스러움에 약이 오른 아빠가 "이노옴-"하고 팔을 헛으로 휘두르면 파박, 하고 뒤로 튀어올랐다가 한 십 분만에 돌아와 다시 고 자리 근처에 앉았다. 새카만 밤에 데크에서 쿠당탕탕 소리가 나면 '또 고양이로구나'하는 것이 우리 가족에게 일상이 되었다.


이 아이가 애꾸눈. 저런 덴 어떻게 올라가는 걸까.



이 아이는 날쌘이. 사진을 찍자 날쌔게 확 도망가려 한다.





앞은 애꾸눈. 뒤에 흰털이 많고 통통한 녀석은 매번 양보만하는 아빠 고양이




아빠 고양이는 뚱하니 위에 올라 앉고, 새끼고양이는 박스에 담아 놓은 온갖 것들을 휘젓고 다니는 전형적인 광경.



애꾸눈, 엄마, 날쌘이(엄마 뒤), 아빠


애꾸눈, 날쌘이, 아빠가 빨래 건조대 아래에 누워있다.



우리가 부르지 않아도, 고양이 가족은 우리집 마당에서 잘도 놀았다. 특히 아직 어린 애꾸눈과 날쌘이는 틈만 나면 둘이서 쌍으로 우리집 데크 위에 놀러왔다. 거실에서 TV를 보다 이야옹, 소리가 나서 샷시 밖을 쳐다보면 애꾸눈이 신기한 듯 샷시 밖에서 거실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고, 현관 문을 열고 나갈라치면 바로 앞에서 뒹굴거리던 날쌘이가 깜짝 놀라 꽁지가 빠져라 도망갔다.


새하얀 털 덕에 하얀 공을 닮아 특히 예뻤던 아빠 고양이



호기심이 많은 새끼고양이들은 우리 집 데크의 단골 손님이었다. 둘이서 꼭 붙어다니며 장난을 쳤다.




어른 고양이들은 함께 간식을 먹으면서도 항상 새끼 고양이들에게 양보를 했다. 제일 동작이 굼뜬 애꾸눈일 지라도 아빠 고양이가 입에 물고 있는 오뎅조각을 빼앗아 올 수 있었다. 항상 가장 많이 포식을 하는 것은 동작이 날쌔고 욕심이 많아 누구의 발 아래에 있는 것이든 그 발을 때려 빼앗고마는 날쌘이었다.






하지만, 시골 동물가족의 평범하고 행복한 나날은 오래 가지 않는 법이다. 강아지가 다 자라면 주인은 개장수를 부르고, 밖에서 사는 고양이는 음식을 잘못 먹어 죽기도 하고, 추운 겨울이 오면 얼어서 죽기도, 굶어서 죽기도 한다. 그래도 이 고양이들은 할머니와 우리가 돌봐주는데, 이렇게 예쁜데, 어느 누가 해를 끼칠까 싶었다. 이 고양이들이 끼치는 해라고는 말려놓은 땅콩 위에 동그렇게 앉아 다가오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그 사랑스러운 능청스러움 밖에 없었는데.





여름이 끝나갈 무렵, 어느 날부터 엄마가 아무리 야옹아~하고 불러도 고양이가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틀째되는 날에는 엄마가 앞집 할머니에게 고양이를 보았냐고 물으러 갔지만, 할머니도 고양이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엄마가 데크 구석의 코렐 그릇 위에 오뎅을 아무리 올려놓아도 이틀이 지나도 괜한 빗물만 손도 안 댄 오뎅 위에 고일 뿐이었다.


초가을비가 내리던 어느날 오후, 환기를 하기 위해 문을 활짝 열어두었던 엄마는 나직한 미야오, 소리를 듣는다. 혹시나, 하고 달려나가보니 애꾸눈이 비틀거리다가 픽 쓰러진다. 쓰러지고 나서는 숨만 할딱할딱 쉴 뿐, 곧게 뻗은 네 다리를 움직이지도 못한다. 애꾸눈의 작은 심장이 거죽 밑으로 비치는 갈빗대 아래로 팔딱팔딱 뛰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한번 더 미야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애꾸눈이 죽었다.


애꾸눈의 죽음으로, 다른 고양이들의 행방에 대한 최후판정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그래도... 앞집 할머니를 모셔와 죽은 애꾸눈을 보여드렸지만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쥐약이여, 쥐약. 쥐약 먹고 죽은거여." 할 뿐이었다. 결국 애꾸눈은 엄마가 뒷마당에 묻었다.




도시의 쥐도 혐오의 대상이지만, 시골의 쥐는 농사 짓는 이들에게 혐오 그 너머 해약의 상징일 것이다. 쥐약 살포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앞집 할머니는 고양이 가족의 죽음을 그렇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아직도 고양이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가슴 아파하는 우리는, 아직 이런 시골의 합리가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1477819286996.jpeg 마당의 화분에 숨는 것을 좋아했던 어른 고양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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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819264033.jpeg 엄마 고양이와 아빠 고양이의 부부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