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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유 Sep 23. 2024

6살의 화장실 가는 길

정말이지 화장실은 우리집 현관에서 1만2천km는 떨어져 있었다.

해가 떨어지면 그 거리는 두 배가 된다. 

대문을 나서서 왼쪽으로 조금 가면 처마밑으로 등이 있는데, 그 아래에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일단 등불 아래에 서서 나머지 1만km의 직선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달릴지 걸을지 고민을 좀 해야 한다.

대부분은 결정을 못하고 운다.


심연의 어둠으로 둘러싸인 화장실


그냥 화장실을 가는 것뿐인데 뭘 그래?

그치만 너무 깜깜해서 무서워

깜깜하지만 난 용감해

그치만 귀신이라던지 멧돼지가 올 수도 있어

그럼 조심조심 소리 안나게 갈까?

안돼 그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더 무서워

하지만 뛰면 누가 쫒아올거야


6년의 인생에서 겪었던 원초적 의문-귀신의 존재라던지 도둑놈은 어디까지 나빠야 도둑놈인건지 등-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포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없이 가야만 했다. 

갈지 말지가 아니라, 어떻게 갈지에 대한 고뇌였다.

개를 데려가면 어떨까?

아니, 개를 데리러 가는 길도 무섭다.

손전등이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손전등을 켜면 불빛이 닿지 않은 부분이 더 새카매져서 무섭다.

그리고 손전등으로 무언가 발견하게 될까봐 그게 더 무섭다.

쥐나 뱀이나 내 앞으로 지나가면 어쩌지?

무섭다. 이러나저러나 무섭다.

어쩔 수가 없다. 그냥 가자!


간다. 드디어 간다. 뛰는 건 아닌데 걷는 것도 아니다.

양 옆의 낮은 나무들이 흔들린다.

제발 나를 환영하지 마. 

바람은 왜 하필 지금 부는 거야. 

발이 점점 빨라진다.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내 발자국 소리인가?

뒤에서 나는 소리인가? 뒤가 무서워. 돌아볼 수가 없어.

무서워. 무서워. 너무 무서워

발이 점점 더  빨라진다.

바람이 또 분다. 휘잉 소리가 난다.

무서워!


드디어 도착. 휴~

딸각 불을 켜고 문을 열었다.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

다시 집 안으로 돌아갈 때는 조금 덜 무섭다.

귀환은 서두르는 편이다.

그냥 냅다 뛰면 금방 안전한 곳으로 간다.


왜 엄마아빠한테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아.

그 생각을 못했다...

별게 다 유레카였던 내 나이 6살..


다시 밤, 엄마 손을 잡고 화장실을 갔다.

엄마는 별로 무섭지 않은가 보다. 등빛 아래에서 멈춰서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또 다음날도 엄마 손을 잡고 갔다.

더이상 밤에 화장실 가는 게 무섭지 않았다.

내 인생 최대 스트레스가 사라져 평온함이 지속되던 어느 날,

시장에 다녀오신 엄마가 나를 불렀다.


"봐, 이거 이렇게 앉아서 오줌 싸는 거야. 요강이라고 하는 거야."

쇠항아리도 이상한데 엄마의 자세도 이상했다.

하지만 우리집 최초의 실내화장실을 감지덕지 내 방에 넣어주셔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며칠 뒤 엄마가 어떤 아저씨를 데려와서 내 방 천장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상하네. 샐 데가 없는데"

"여기서만 그렇다니까요"


요강 근처의 바닥이 계속 축축해서 수리공을 부른 거였다.

'어, 이상하다. 나는 정말 배운 대로 했는데..' 

나는 바닥이 늘상 젖어있는 이유를 알아챘지만 엄마한테 혼날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그저 천장을 툭툭 만져보고 별다른 조치 없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의 노력으로 바닥은 젖지 않았고 엄마는 수리공의 마술에 대해 동네사람들에게 무료홍보를 하고 다니셨다. 

그리고 70이 다 되신 지금도 엄마는 그 시절 바닥이 젖었던 이유를 모르신다...

1987년, 엄마가 그토록 나를 아꼈음을 알았더라면 나는 누수의 이유를 고백할 수 있었을까.

당연하다 여겼던 것들에 대한 감사함은 왜 항상 더디 찾아오는 건지, 어렸던 공포가 글이 되어 나부낄 수 있는 지금, 나는 과연 고마움에 대해 용감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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