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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유 Sep 16. 2024

ep1. 에어컨에서 빛이 난다

◆ 은퇴우울증 아버지 전 상서  


사연

아버지가 은퇴하신지 2년이 지났습니다. 

은퇴하시기 전에는 생각만 해도 즐거운 계획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캠핑을 위해 차를 개조했고 낚시 장비도 수집하셨습니다. 

그 해에 개강하는 취미강좌도 물색하셨죠.

하지만 즐거움은 은퇴 후 고작 3개월이었습니다.

취미만으로는 성취감에 도달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도태되어 간다고 느끼셨던 것 같아요.

수십 년 성실했던 아버지에게 경제활동의 중단은 삶에서 너무 큰 변화였습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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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아진 자존감, 무력감, 허전함에 시달리고 계시는 아버지께서 다시 기운을 차리시고 새로운 도전을 찾을 수 있게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신경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도 살기 바쁜데, 아버지까지 신경쓰이게 하시네 라고 툴툴댈 수는 있지만 아버지란 존재는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인지상정. 나에게 큰 존재여서가 아니라 나의 바탕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울하신 아버지를 위해 편지를 써본다.



아버지 전 상서


여름이 참 더웠어요, 아빠. 

더위 잘 타시는 아빠에게 곤욕이었죠? 아빠네 에어컨 20년 된건데 아직도 빵빵한게 작년에 바꾼 우리집 에어컨보다 센놈인가봐. 그런데 전기세 많이 먹어서 어째요. 아빠 인제는 백수라 걱정 많으시겠네. 그렇다고 더위 타는 아빠가 에어컨 끄진 마세요. 그 에어컨이 아빠 닮아서 오래됐거나 말거나 아주 할것 제대로 하잖아요. 전기세고 나발이고 기특한게 얼마나 좋아요. 값어치 있는 데에 돈쓰는 거라고 아빠가 가르쳐줬었어. 비싸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싸다고 다- 나쁜 것도 아니고, 그렇죠?


나는 아빠 백수 된다 했을 때 사실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은퇴식을 어떻게 하면 좋지? 맨 그 고민이었지. 나도 애들 키우랴 정신없었잖아요.. 근데 왜 아빠가 요새 한숨을 쉬나 했더니 아빠 일 못하시니까 재미가 없었네! 은퇴하실 적엔, 아빤 좋겠다~ 했는데 어떻게 그리 남보듯 했나 몰라요. 아빠가 무력해하신다는 얘기를 엄마에게 듣고 나서야 이것 참 큰일이네 싶더라니깐. 


은퇴기념식 한다고 다 모여서 밥먹을 때 있잖아. 내가 편지 한통 읽어드렸던거 기억나요? 난 이제 아빠가 한가로이 여가생활 즐기시고 못했던 것도 많이 하시고 그러길 바랐어요. 굳이 아빠의 업적을 하나하나 적어가며 이제는 쉴 자격 있다고 가득가득 썼었어요. 우리 신랑이 나중에 은퇴했을 때도 그렇게 될거라고 상상했거든. 근데 있지.. 평생 일해온 사람들은 특히 남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살아왔던건지, 내 삶 지탱하던 큰 기둥이 한순간에 사라졌다는게 얼마나 큰 상실인지 요즘 참 많이 느껴요. 아빠가 지금 그런 마음이시겠구나 싶어서 마음이 아프지만, 내 할 말은 해야겠어.

아빠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며 살아오셨는지 조금만 돌아보면 알 수 있잖아요. 근데 아빤 그저 살기 위해 돈벌려고 일을 하셨다 할테지, 그걸 노력과 헌신이라는 가치로써 보질 못해요. 그 열정 없었으면 우리가 이렇게 독립해서 각자 가정 꾸리고 살고 있을까? 난 못했을 거라고 봐. 아빠의 영향은 현역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요. 지금은 돈을 안버는데, 안벌어도 잘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조급해할 필요가 없어요. 다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떨쳐냈으면 좋겠어요. 아빠는 여전히 깊은 지혜를 가지고 계시고, 아직 발견하지 못한 능력도 분명 있을 거예요. 아빠의 빈 시간을 그저 쉬는 시간이라 생각지 마시고, 재정비에 뜻을 두면 어떨까? 아빠는 지금 또다른 환경의 사회 초년생인 거예요. 열정 하나만으로 수없이 도전했던 젊은 날이 기적처럼 다시 돌아온거야. 당연히 실패도 있겠지요. 하지만 아빤 굴하지 않을거라 믿어요. 경험이 얹어져 있으니까요. 망설이지 마시고 새로운 행복을 찾아 나서요. 어떤 도전이라도 언제나 응원하고 지지할게요. 

온가족이 걱정하는건 아빠가 적당한 일을 다시 찾느냐 마느냐가 아니에요. 아빠의 존재가 정말 가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실까봐, 아빠의 빛나는 조언들이 사라질까봐서야.. 아빠의 경험과 지혜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지 꼭 알아주셨으면 해요. 


날씨 돌아가는 거 보니 이제 며칠 뒤면 에어컨 안켜도 되겠어요. 그리고 쉬다가 내년 여름에 또 켜서 그 한몸 불사질러 혹서기를 물리치겠죠. 아빠네 쎈 에어컨 돈 많이 먹는다고 미워하지 마요. 충분히 값어치 있는 일 하고 있잖아요. 에어컨보다 우리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쎈데... 다시 켜면 아주 끝장내주지요?^^ 아빠! 내가 정말 응원해요. 다시 힘을 내줘요.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전상서의 의미, 쓰는 요령


드라마 제목이 되며 상용화(?)를 이룬 단어 중 하나인 "전상서"는 정확히는 "전" "상서"를 구분해서 쓴다.

전은 앞 전 자를 써 '앞'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상서의 상은 윗 상 자이기 때문에, 웃어른 앞에 드리는 글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아버지전상서는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이며, '아버지 전 상서'라고 써야 맞다.


나보다 어른인 분께, 가령 부모님이라던지 선생님 같은 분께 위로와 조언을 드리는건 어려운 일이다.

기계 사용법 등을 물어보신다면 가르쳐드릴 수 있지만, 인생을 이렇게 살라고 할 위치는 아니지 않은가. 그럴 때는 순수하게 그 분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감상문을 정리하면 된다. 그분에게서 받은 가르침을 읊거나 그분께 들었던 말 또는 보았던 행동을 첨가하는 것이다. 

가끔 본인의 소신을 잃을 때가 있다. 웃어른들도 마찬가지다. 그때 그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존경받고 있음을 느끼고 힘을 낼 수 있다. 그분의 흔적을 토대 삼아 조언과 권유로 이어나간다면 끝까지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다.

아버지와 연락이 뜸하다면 바로 오늘 뜬금없는 문자나 전화 한통 드려보자. 

나 꿈에서 아빠가 깻잎장아찌 레시피를 알려줬어. 아까 해봤는데 너무 맛있잖아. 이젠 하다하다 꿈에서도 가르침을 주시는군요 창조자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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