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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유 Sep 20. 2024

평상을 세워야 했던 8살들아

우리 집 마당엔 평상이 있다.

평상 위에서는 떡을 먹고, 수박을 먹고, 옥수수를 먹고, 그림을 그리거나, 음.. 정말이지 없을 땐 숙제를 했다.


비가 와도 괜찮다.

우산을 한 네 개 정도만 가져가면 된다. 우산 네개를 동서남북으로 펼쳐서 내려놓으면 완벽하다. 대신 1인 네 개였기 때문에 우산을 확보하기 위해 시오랑 각축전을 벌여야만 했다. 집에 멀쩡한 우산이 8개나 구비되어 있진 않았다. 누군가는 찢어진 우산으로 집을 구성해야 했고, 누군가는 두개로만 집을 지어야 했다.

"야 여섯개니까 너가 세개 해야돼"

"안돼 내가 네개야"

시오가 네 개를 차지했다. 이 새끼가 없어야 내가 네 개로 집을 지을 수 있는데, 어디 가버렸으면 좋겠는데 또 어디 안갔으면 좋겠기도 했다.

뭐, 두 개도 사실 나쁘진 않다. 놀아야 하니까 대체로 상황을 수긍하는 편이다. 대신 큰 창문을 만들(?) 수 있다는 긍정적 회로를 돌렸다.


시오와 나는 각자 지어논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같이 놀지도 않을거면서 같이 짓는다. 혼자 집을 지어놓고 놀면 재미가 없다. 희안한 일이다. 더 희안한건 집을 지어놓고 들어가 있다가, 유일한 이웃과의 교류도 없으니 한참을 지루해했고, 젖은 옷을 갈아입으러 진짜집에 들어가선 다시 안나온다. 그저 창밖으로 '나의 집'을 바라보며 흐뭇해할 뿐. 이게 무슨 놀이인가 싶다가도 다음날 비가 오면 또 우산쟁탈전을 벌인다.


해가 쨍한 여름날이면 나무그늘로 평상을 옮겼다. 무겁긴 했지만 시오랑 같이 옮겨서 별로 힘들진 않았다.

어째서 천막을 둘러칠 생각을 안했던건지, 아마 엄마아빠는 평상을 길바닥에서 주워왔을 것이다. 별로 소중하지 않은 뗄감용인가보다.

그래도 엄마는 수박이라도 줄 참이면 밖에 나가 평상부터 닦았다.

"씨를 이렇게 투! 뱉어 저기로. 이제 내년에 저기서 수박 열린다"

엄마는 수박밭을 일구려고 평상에 수박을 두셨을까?




겨울이 되고 눈이 왔다.

엄마는 아랫목에 고구마 한접시를 두고 시장에 가셨다.

나는 창문으로 평상을 살폈다.


"야, 눈 치워야돼. 저기 가서 고구마 먹을거야"


어떻게든 평상에서 놀고 싶었다. 하지만 밖은 추웠고, 우산으로는 극복할 수 없었다.

시오와 나는 대야를 평상 위에 엎고 문질러댔다.


"눈 치워도 추운데 어떻게 하라고"


어린이와 어린이가 머리를 맞대어 고안해낸 방법은 '평상을 따뜻하게 해야 함'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일단 집안으로 복귀해 이곳 저곳을 뒤져봤다. 화장대 옆에는 엄마가 가끔씩 가만히 바라보던 의문의 초가 있다. 엄청나게 커서 한 손으로는 절대 못 든다. 이 초를 켜면 따뜻하게 놀 수 있을거야.

시오는 가끔 마늘을 새까맣게 태우고 까서 먹곤 했기에 제법 불을 다룰 줄 알았다. 기대를 안고 촛불을 켜 평상에 올려봤지만 따뜻해지지는 않았다.


"안되겠어. 불을 지피자. 내 방에도 돌 밑에 불 켜는 거거든? 따뜻해져 진짜야"


시오는 자신만만했다.

"쓰레기도 있어야돼"

나는 들떠서 온갖 지푸라기들을 모아 평상 밑으로 던져 넣었다. 말 잘 듣는 돌쇠마냥 마당 곳곳 탈만한 것들을 열심히 모아 넣었다.


이제 드디어 평상 밑에 불을 지핀다.

우리는 위대한 발견을 해낸 남매가 되어 그 기세가 하늘에 다다를 지경이었다.

"와 따뜻하다!"

따뜻한 공기가 바람을 타고 와 얼굴이 화끈거렸다.

"좀 뜨거운데?"

"괜찮아! 올라가! 이제 식어!"

시오가 말같지도 않은 말을 하며 신발을 벗고 올라가려고 하는 순간,

타닥! 쩍!

평상 가운데가 찢어지듯 뚫렸다.

평상의 소재에 대해 궁금해한 적은 없었다. 이제 보니 이건 분명 나무였고, 그것도 아주 잘 타는 나무였음을 알아챘다.


뻥 뚫린 평상 가운데로 불길이 치솟았다. 제 키가 어딘지도 모르게 쭉쭉 높아졌다. 8살의 높이에서는 어마어마한 불길이었다. 불길은 담벼락을 그을고 한발치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그을고, 마치 평상을 숙주로 모시며 천지를 삼켜먹을 것처럼 으르렁댔다.

"으아악 으아아악!"

놀란 시오는 사방을 펄쩍거리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물 떠와!!"

내가 소리쳤다.

눈을 쓸었던 대야가 눈에 띈다.

"저거 잡아!"

시오와 나는 연못에서 물을 퍼날라 평상에 뿌려댔다.

차례도 없고 체계도 없이 그냥 풍덩풍덩 건져내 평상에다 던졌다.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건지. 저 새끼를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아마 이따가 엄마가 죽여줄지도 모른다. 너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 나는 왜 공범이 되었을까.


다행이 불은 잦아들었다.

주변에 쌓인 눈이 보였다. 다행이다.


불이 꺼진 평상은 처참했다.

평상 뒤의 담벼락은 까맣다못해 지옥으로 뚫려있는 포탈 같다.

시오와 나는 놀란 가슴을 쓸고 이제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머리를 맞댔다.


"갖다 버려야돼. 엄청 혼나서 죽을지도 몰라"

시오는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똑똑하네.


여름에 그늘을 찾아 평상을 조금씩 옮겨봤기에 무척 무겁다는 건 이미 안다. 저 좁은 대문을 지나갈 땐 세워야 한다는 것도 알겠는데,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출발한 탓에 대문 밖으로 나서자마자 우왕좌왕하느라 힘이 다 빠져버렸다. 결국 다다른 곳은 우리집 담벼락 너머에 붙어있는, 직선거리 5미터의 밭두렁.


"여기다 이렇게 벽에 붙여서 세워두면 모르겠지?"

잘도 모르겠다. 멍청이.


평상을 밀고 끌고 들고 난리를 치며 엄청난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우리 남매는 마당에 남아있는 화재의 흔적을 돌아볼만큼 성숙하진 못했다. 시오는 모든 게 끝났음에 안도하고 있었고, 나는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윽고 엄마가 돌아왔다. 이제 우린 죽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 시장 가는 길을 알게 되었다.

엄마의 시장 통행로에 밭두렁길도 포함돼 있단 사실과, 시장길에 한박자 늦게 따라가려 했을 때 왜 항상 빛의 속도로 엄마가 사라져 있던건지, 아! 엄마는 길로 다니신게 아니었다! 대문을 나서자마자 길과 반대방향의 밭으로 쏙 들어가셨던 것이다! 그랬구나. 그래서 오늘도 엄마가, 밭 둘레길을 걸어 돌아오며 다 타버린 평상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고, 시장바구니를 밭에 내던지고 우리의 얼굴이 무사한지 만져보러 달려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이고 이 새끼야 아이고 이 새끼야"


엄마는 우리 둘의 엉덩이를 퍽 퍽 때리다가 갑자기 껴안고 다시 퍽 퍽 때리다가 껴안고 또 퍽 퍽 때리다가 몸 여기저기를 만졌다.

이건 혼나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 우리가 살아있음을 온 몸으로 확인하는걸로 보아 무언의 합격증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주말이 되자 아빠는 밭에서 평상을 가지고 와 조각조각 해체를 하셨다. 그걸로 우체통을 만드시고 개집의 지붕을 고쳤다.


평상은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은 평상이 그리웠지만, 그 자리에 만들어진 텃밭이 더 즐거웠다.

텃밭 구석에 강아지풀을 심어놓고 매일 물을 주었다.

매일 물을 주는데도 말라비틀어졌다.

"그냥 니맘대로 해라 뭐. 흥"

흙으로 덮어버렸다.

평상의 기억도, 강아지풀과 함께 두툼이 묻었다.

그리고 1988년의 이름으로 마침내 꺼내어진 지금,

그윽하고 아련한 추억으로 나타나주었음에, 기쁘고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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