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는 약해졌지만, 먹구름은 좀처럼 자리를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밤 열두시가 된 것처럼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평소면 안락한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유투브 쇼츠를 넘겨봤을 것이다. 두 사람은 하루 종일 빗물과 생존을 두고 씨름한 것이 현실이 아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승우는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비에 젖은 묵직한 솜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이쯤하고, 잘 곳을 찾아보자.“
승우와 민혁은 한 5분 정도를 더 걸어서, 그나마 안전해 보이는 시멘트 벽돌 지붕 위에 자리를 잡았다. 공기는 무겁고 눅눅했고, 지붕 바닥도 습기가 스며들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여름의 후텁지근함과 차가운 빗물의 한기가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승우는 슈퍼에서 가져온 얇은 원터치 모기장을 꺼내어, 바닥 위에 펼쳤다. 그리고는 쌀포대 자루 같은 비닐을 꺼내어 바닥과 모기장 위에 깔았다. 비닐은 빗물에 젖어 더욱 미끄러웠고, 손에 닿는 느낌이 찰기 있게 끈적거렸다.
“별 걸 다 챙겼네.”
민혁이 한 마디 건네자, 승우는 모기장 안으로 몸을 구겨 넣으며 받아쳤다.
“잘했지?”
민혁이 승우를 따라 들어가자, 성인 두명이 딱 붙어서 누울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공간이 그를 맞이했다. 바닥에 깐 비닐에는 습한 냉기가 느껴졌고, 축축한 감촉마저 느껴졌지만 이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승우가 렌턴을 켜자, 희미한 불빛이 주변의 어둠을 약간 덜어냈지만, 시야는 여전히 좁았다. 민혁은 가방에서 과자 봉지를 꺼내어 뜯었다. 그 안에서 큼직한 통밀 과자를 꺼내 승우에게 건냈다. 승우는 말 없이 과자를 입에 넣었다. 원래도 바삭한 과자는 아니었지만, 엄청난 습기 때문에 질척이고, 흐물흐물한 느낌이 들었다. 민혁은 과자를 먹는 승우를 쳐다보며, 자신도 무심히 과자를 입에 넣었다.
“너네 어머니, 지금 서울에 계시지?”
승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망설임이 담겨 있었다.
민혁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눈을 아래로 깔았다.
”어. 어제 항암치료 받고 이모 집에서 자고 온다고 했는데, 이런 꼴을 보느니 차라리 잘 됐어."
“마지막으로 연락은 언제 된거야?“
”어제 전화한게 끝이야.“
“그렇구나.”
승우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은 승우가 계속해서 떨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승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냐?”
승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가?”
그의 목소리는 태연했지만, 몸의 떨림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물이 스며든 비닐을 통해 찬 공기가 그의 엉치뼈로 스며들면서,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민혁은 가방을 뒤져 담요를 꺼냈다. 그는 말없이 담요를 들어 툭하고 승우의 어깨에 던졌다. 담요가 승우의 어깨에 떨어지자, 승우는 잠시 그 따스함에 안도했다. 하지만 담요 하나로는 이 습기와 한기를 모두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너는?”
“나는 하나도 안 추워.”
민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흔들림이 있었다.
“옷도 안갈아입었으면서.“
승우는 자신이 덮고 있던 담요를 펼쳐 민혁의 어깨에 걸쳤다. 담요와 함께 승우의 어깨가 살짝 닿았다. 민혁의 옷이 습기로 축축하게 젖어있었고, 그 위에 담요를 덮자마자 그의 몸도 조금은 따뜻해졌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민혁의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아씨, 됐다고,”
민혁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어색하게 몸을 비틀었다. 그가 자신의 어깨로 넘어온 담요를 던지듯 승우에게 던지자, 승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래, 추우면 말해,”
승우는 담요를 덮고 누웠다. 잠시 후, 바스락 하고 민혁 역시 눕는 소리가 들렸다. 투둑, 투둑 하는 빗방울 소리는 계속 들렸고, 이따금씩 얼굴에도 뚝, 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승우는 말간 눈을 뜬 채, 천장에 흐릿하게 반사된 렌턴 불빛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혁을 처음 만났던 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승우는 그때의 자신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겠다 선언하고 집을 나간 후, 일상에 모든색이 사라졌었다. 또래들이 하는 모든 짓도 무의미해보였다. 그렇게 승우는 반 아이들과 자신 사이에 선을 긋고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만 지냈다.
그 날도 무심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중, 교실 문이 열리고 작은 체구의 전학생이 들어왔던 순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민혁은 조용히 교실로 들어와서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의 존재감은 거의 없을 정도로 미미했다.
짧고 간결한 자기소개가 끝나고, 그 교실 안은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 승우는 교과서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저 귀로만 그의 이름을 들었다. 아이들은 그 아이의 키가 작다는 이유로 이름 대신 미어캣이라고 불렀다.
민혁은 항상 그저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외에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어울리려 하지도, 그렇다고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도 않았다. 작은 체구와 무심한 태도, 거기에 그를 표적으로 삼으려는 패거리들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자꾸만 교실을 맴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체육 시간이었다. 그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고, 실내에서 피구 시합이 진행되었다. 다른 아이들이 공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터뜨리는 동안, 승우는 한쪽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야, 나 쉴래,” 피구 시합에서 민혁과 같은 팀이었던 아이들이 과장된 웃음을 지으며 하나둘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치 민혁을 고립시키려는 의도처럼 보였다. 결국 민혁은 경기장에 혼자 남았다. 패거리의 리더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공을 집어 들었다.
탁! 공이 민혁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 순간, 민혁은 그 공을 두 손으로 정확하게 잡아냈다. 승우는 그 장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 체구의 민혁이 그 강한 공을 막아낸 것은 의외였다. 더 놀라운 것은, 민혁이 그 공을 다시 놈에게 던졌을 때였다. 공이 얼굴에 정확히 명중했고, 그 놈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간호실로 실려갔다.
어떻게 저런 작은 몸에서 저런 힘이 나올까? 왜 저런 힘이 있으면서 그 간의 괴롭힘에 저항하지 않았을까?
그 이후로 승우는 민혁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으로 민혁을 주목하게 되었고, 그가 단순히 작은 체구의 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민혁에게는 그 누구도 모르는 강함이 숨겨져 있었다. 승우는 점점 민혁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관심이 행동으로 옮겨진 것은 어느 늦은 밤이었다. 그날 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기 위해 집을 나섰을 때, 익숙한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그것은 민혁의 비명이었다. 승우는 본능적으로 그 소리를 따라 골목길로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민혁이 패거리에게 구타당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패거리는 민혁을 한쪽 구석에 몰아넣고, 그의 머리채를 잡고 있었다.
승우는 처음에는 망설였다. 귀찮은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몸은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다. 그는 고양이 밥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가, 밥을 한웅큼 집어 그들 얼굴에 던졌다. 놀란 패거리 중 하나가 승우에게 달려들었지만, 승우는 그를 거침없이 발로 차서 쓰러뜨렸다. 다들 도망간 자리에는, 입술이 터져 피를 흘리는 민혁이 승우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날 이후, 민혁과의 관계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민혁 역시 승우를 향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존재를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다. 민혁이 승우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순간이 그 증거였다.
시간이 흘러, 승우는 쿨쿨 잠에 빠진 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이 자신도 모르게 웅크리고 잠든 모습은 마치 작은 새우처럼 보였다. 승우는 조용히 담요를 벗어 민혁의 등에 덮어주었다. 그러자 민혁의 긴장이 풀리듯, 그의 몸이 조금 느슨해졌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둘 다 조용히 평화를 찾으며, 비닐 천막 속에서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