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모임에 처음 들어가던 날, 나는 거의 부서져 있었다.
‘왜 내 아이냐’로 시작해 ‘왜 하필 나에게’로 끝나던 하루들. 남들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다 하는 걸,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못하는 아이를 보면서 느꼈던 절망. 엄청난 노력으로 겨우 하기 시작했는데, 며칠 지나면 다시 까먹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상황 앞에서 나는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져 갔다.
밤마다 울며 기도했다.
제발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이 현실은 진짜가 아닐 거라고.
이 꿈에서 깨면 스텔라가 정상발달하며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그렇게 울며 매달리던 내가 모임에서 처음 읽었던 책이 개리 래너드의 <우주가 사라지다>였다. 처음엔 황당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읽을수록 내 안의 어딘가가 자꾸 공명하는 느낌이었다.
책은 말했다.
이 세상은 꿈이다.
잠에서 깨어나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여전히 꿈속에 있는 거라고.
꿈속에서는 그게 꿈인 줄 모르는 것처럼, 이 현실도 깨어보기 전엔 꿈이라는 걸 모를 뿐이라고.
책을 읽는 동안 오래 묵은 갈망 하나가 모양을 드러냈다. 나는 늘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는데, 책은 “이미 꿈일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잔혹한 위로도, 달콤한 착각도 아니었다. 오히려 고요한 초대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깨어나는 연습을 해보라”는.
그 후부터 나는 내 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몸에 오랜 시간 붙어있던 불안과 죄책감,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웅성거리는 목소리들.
“느리면 안 돼”
“난 너무 부족해”
“더 잘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어”
<될 일은 된다>에서 마이클 싱어가 말하던 바로 그 목소리, ‘에고’였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분별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나’.
그리고 그 ‘나’를 한 발 떨어져 지켜보는, ‘나를 바라보는 나’가 있었다.
나는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대기실에서 또래 아이가 문장을 술술 말할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 그 감각을 바라보았다. 붙잡지도, 밀어내지도 않고 그저 알아차렸다.
‘지금 불안이 지나가고 있구나’.
SNS에서 ‘우리 아이는 벌써 한글을 읽어요’를 보면 자동으로 켜지는 비교의 스위치를 조용히 알아차렸다.
‘비교의 스위치가 켜졌구나’
그 순간에도 세상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내 안에서는 아주 작은 고요의 호수가 생겼다.
명상도 따라 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숨에 나지막이 “아-”를 내보내는 연습이었다.
어느 날, 뜨거운 물결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더니 어디선가 분명한 문장이 들려왔다.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
그것은 내 마음 깊은 곳, ‘진짜 나’의 목소리였다.
그때부터 기도의 내용이 바뀌었다. ‘제발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가 아닌 ‘이게 꿈이라는 것을 기억하자’로. 현실을 부정하는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꿈’처럼 가볍게 쥐는 연습이었다. 무너질 듯한 순간에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이건 지나가는 장면일 뿐. 나는 관찰자다’
그제야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스텔라가 느린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 장면을 ‘문제’로 이름 붙이고 그 이름을 실재처럼 붙들고 있었음을. 나는 사랑을 말하면서도 ‘평균’이라는 기준과 ‘속도’라는 잣대로 이 꿈의 장면을 편집하려 들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통제였다.
<우주가 사라지다>를 덮고 난 뒤, 나는 더 이상 ‘이 현실이 꿈이기를’하고 울며 잠들지 않았다.
이미 꿈이란 걸 알았으니, 이제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깨어있기.
머릿속 목소리에 휩쓸리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나와 아이를 고요히 바라보는 일.
물론 그 깨달음이 단번에 모든 것을 바꿔놓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는 흔들렸고, 비교에 미끄러지고, 두려움의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하지만 파도 위에 잠시나마 떠있는 법을 조금은 배웠다.
그 물결에 저항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도록 허용하는 법을.
이제 나는 안다.
세상은 한낱 꿈이다.
그 꿈을 어둠의 동굴로 만드는 것도, 빛의 정원으로 만드는 것도
모두 내 마음의 해석에 달려있다.
꿈에서 깨자, 보이는 세상도 달라졌다.
아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