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아톤>에서 초원이 엄마는 소원이 뭐냐는 질문에 대답한다.
“초원이 보다 하루만 늦게 죽는 것”
발달장애아를 둔 부모들은 누구나 그 마음을 알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스텔라가 자폐스펙트럼 진단을 받았을 때, 가장 큰 두려움은 ‘미래’였다.
진단 이후, 나는 매일 밤 검색창에 ‘자폐’, ‘지적장애’, ‘발달장애’을 입력했다. 뉴스에 관련 기사가 뜨면 숨을 죽이고 읽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료들은 발달장애인의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고 있었다.
독립적인 생활이 어려워 성인이 되어도 지속적으로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했고, 당연히 그 역할은 부모의 몫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는 그나마 괜찮지만, 의무 교육과정인 고등학교 과정이 끝나고 나면 더 이상 아이가 갈 곳이 없어진다.
특수 고등학교에서 직업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간단한 일이라도 직업을 갖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소수에 불과하고, 복지관 등에서 운영하는 주간보호센터에라도 갈 수 있다면 행운이다.
한평생 독립하지 못하고 옆에서 돌봐주어야 하는 40대 성인 중증 발달장애인과, 함께 사는 70대 노모의 기사를 보며 가슴이 미어질 듯 답답했다. 더욱 슬펐던 점은 그 70대 노모가, 본인이 죽은 뒤 40대 아들이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걱정한다는 사실이었다.
성인 발달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국가적 차원에서의 대책과 복지제도가 턱없이 미흡한 현실에서 그 부모가 온전히 홀로 감당해야 할 미래의 무게는, 끝없이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의 돌덩이만큼이나 무거워 보였다. 그래서 그러한 암울한 미래를 비관해, 아이가 아직 어린데도 불구하고 아이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소식도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차오르는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혹자는 그렇게 어린아이의 목숨을 자의로 앗아간 부모의 극단적 선택에 대해 비난하기도 한다. 물론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지만, 나는 그 부모의 심정이 한편으론 이해가 갔다.
그 기약 없는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나갈 그 어떤 희망도, 의지도 없는 상태에서 아이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기엔, 혼자 남겨질 아이의 미래가 너무나 걱정스웠던 것이다. 행동으로 옮기느냐 마느냐는 또 다른 문제 이긴하지만, 어쨌든 나 역시 극단적인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으니까.
그렇다. 그 고통과 두려움의 실체는 바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지금 현재 바라보는 이 상황을 통해서 미래를 가늠하고 예측한다.
지금의 이 고통스러운 상황이 그대로 미래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직선형의 시간 흐름을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시간은 정말 그렇게 흐르는 걸까?
임사체험을 한 아니타 무르자니는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것은 단지 육체와 마음이라는 필터 때문이라고. 그 필터를 벗으면, 모든 순간은 동시에 존재한다.
즉,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3차원에 살고 있는 우리의 인식이 그것을 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해석 방식인 것이다.
이 개념은 영화 <인터스텔라>에 시각적으로 잘 구현되어 있다. 쿠퍼가 블랙홀 속 5차원 공간에서 딸 머피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는 장면. 건물의 1층에 있을 때는 1층의 풍경밖에 볼 수 없지만, 건물 밖으로 나와 전체를 바라보면 모든 층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2차원에 사는 개미는 앞으로 가거나 뒤로만 갈 수 있다. 만약 3차원에 사는 인간이 땅을 기어가는 개미 무리 중에서 한 마리를 손가락으로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면, 다른 개미들은 그 개미가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3차원에 사는 우리에게는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높은 차원의 시선에서는 모든 순간이 이미 ‘지금’ 존재하고 있다. 현재의 고통이 미래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 또한 지금 이 순간 속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이 사실을 물리학적으로 설명한다.
시간은 사람과 장소에 따라 다르게 흐르며,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이 흐른다고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대략적으로(희미하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과거의 미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는 시간 역시 연속적인 흐름이 아니라 최소단위(플랑크 시간)가 존재하며, 확률의 구름처럼 중첩되어 있다고 했다. 즉, 관찰자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시간의 상태가 ‘결정’된다.
그 깨달음은 내 사고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미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파동으로 존재한다.
그중 어떤 현실이 펼쳐질지는 내가 지금 어떤 진동으로 바라보느냐에 달려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뇌의 착각일 뿐, 지금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며 살아가는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바꾸었다.
미래를,
'두려움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 가능한 시나리오’로 보기로.
내가 원하는 미래를 상상하고, 그 장면을 시각화하고, 이미 이루어진 현실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그러면 그 장면의 파동 함수가 붕괴되어 현실로 드러났다.
하나의 프레임, 하나의 장면이 쌓여 나의 인생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진다.
행복한 하루하루가 쌓이면 결국 행복한 인생이 된다.
그러니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면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행복해야 한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 말은 곧, 내가 원하는 미래를 현재로 가져오라는 뜻이다.
노아 세인트 존의 <어포메이션>은 이 내용을 보다 실천적으로 풀어낸다. 우리의 잠재의식은 질문을 던지면 무슨 수를 써서든 그 답을 찾기 위해 작동하기 시작한다. 뇌의 RAS(망상활성화 시스템)은 내가 집중하는 것에 따라 필터링하고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을 현실에서 발견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목표가 이미 이루어진 미래에서부터 현재로 질문을 던지면 된다.
왜 나는 이렇게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을까?
왜 나는 원하는 것을 이렇게 쉽게 성취할까?
왜 스텔라는 발달장애 진단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성인으로 잘 자랐을까?
이렇게 ‘이미 이루어진 미래’에서 던진 질문은 현재의 나를 움직이게 한다.
결국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 모든 가능성은 지금 이 순간, 나의 의식 속에 동시에 존재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해, 이미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고 행동하면 된다.
이 깨달음 이후로, 나는 스텔라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어차피’ 아이는 잘 자라 있다. 나는 다만 그 세계를 향해 걷고 있을 뿐이다.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날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면, 중간의 시련과 고통쯤은 주인공이 겪는 성장통에 불과하다. 삶은 언제나 그런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