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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어둠에서 시작된다

by 슈퍼거북맘

나는 더 이상 어둠이 두렵지 않다.


한때는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동굴에 갇혀있다고 생각했다. 빛이라고는 한 오라기도 없는, 축축하고 차가운 동굴. 그것은 나의 현실이었다. 나는 두려웠고,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저기 어딘가, 동굴의 끝에 빛이 있다고 믿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언젠가 환한 빛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때는 이 긴 시련이 모두 끝날 거라 믿었다.


나는 그 믿음 하나로 버텼다.

절망 속에서도 ‘언젠가’라는 단어를 붙잡고서.


하지만 이상하게도, 빛을 찾아 헤맬수록 어둠은 더 짙어졌다.

끝을 향해 달릴수록 길은 더 멀어졌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찾던 빛이 어둠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둠의 한가운데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어둠은 나를 괴롭히려고 온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빛을 깨우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삶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던 20대 시절,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강한 이끌림에 여수행 기차를 탔다. 이유는 없었다. 단지, 그곳 어딘가에 내가 찾아야 할 ‘빛’이 있을 것만 같았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나는 지도를 들고 오동도의 숲길을 걸었다. 짙은 솔향 사이로 바다의 숨결이 밀려왔다. 멀리서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심장을 울렸다.


숲과 바다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그곳에서, 빛과 어둠의 경계 또한 흐려지는 듯했다.

하늘과 바다, 고통과 희망, 두려움과 설렘이 한데 섞여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완전히 나뉜 경계란 없다는 것을.

어둠은 빛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고통은 기쁨의 다른 얼굴이라는 것을.


그날 밤, 나는 향일암의 해돋이를 보기로 결심했다.

오동도에서 향일암까지 24킬로, 걸어서 무려 7시간이 걸리는 거리. 무모한 여정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어둠은 더 이상 빛의 반대편이 아니었다. 발 밑의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나는 오히려 빛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느꼈다.


“향일암 가는 방향이 어디예요?”

사람들에게 물을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거기는 걸어서 못 가요”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나는 갈 수 있어요. 반드시 빛을 볼 거예요.'


도시의 불빛이 사라지고 길은 점점 좁아졌다. 논두렁 갓길의 자갈이 서걱거렸고, 간간이 지나가는 차의 전조등이 내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무섭고 힘들었지만, 동시에 자유롭고 행복했다. 나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그 좁은 도로를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해돋이 시간, 향일암의 절벽 위에서 붉은 태양이 지평선을 뚫고 떠오르던 순간.

나는 빛을 만났다고 믿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고통을 견딘 끝에 희망을 만난 줄 알았고,

어둠을 통과한 끝에 빛을 마주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날 내가 만난 빛은 하늘의 태양이 아니었다. 어둠을 통과한 후에야 이룬 성취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를 믿으며 묵묵히 걷던 그 순간, 이미 빛은 내 안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고통 속에서도 콧노래를 부르며 행복했던 ‘나 자신’이 바로 빛이었다.


빛은 어둠의 반대편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빛은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어둠은 빛이 자신을 알아차리기 위해 입은 옷이었다.

그 어둠이 없었다면, 나는 내가 빛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이제 나는 그 시절의 나처럼, 다시 길 위에 서 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라 내 딸과 함께.


이 길 역시 어두컴컴한 동굴 안의 길이다. 한때 나는 이 길의 끝에서 빛을 기다렸다.

이 고통이 끝나면, 이 어둠이 지나면, 언젠가 찬란한 태양이 우리를 비출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빛은 동굴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어둠 속에서 이미 우리와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빛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빛으로 세상을 비추며 걷는 존재였다.

어둠은 그 사실을 깨닫게 해 준 거울이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단지 오늘의 한 걸음을 내딛는 일뿐이다.
스텔라의 손을 잡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 어둠 속을 밝히는 빛이 되는 것.


때로는 선의의 손길을 만날 것이고,
때로는 포기하라 유혹하는 속삭임도 들려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걷는 이 모든 길이 이미 빛으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불파만 지파참(不怕慢 只怕站).
천천히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멈추는 것을 두려워하라.


나는 오늘도, 스텔라와 함께 걷는다.


빛은 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발걸음이 곧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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