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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게구름 Dec 07. 2018

미술과 창조성

19세기 이전의 고전 미술 시대에 그려진 여인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사실적이고 아름답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립현대미술관이나 뉴욕의 MOMA에 가서 전시된 작품을 보면 어느 것도 과거처럼 사실적이지 않다. 오히려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볼 수만 있어도 다행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만의 창조적인 방법으로 해석하고 표현한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이전 글에서 소개했던 다른 방식으로 보기와 그리기의 방법들은 사물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훈련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방법들이 현대 미술이 요구하는 창의적인 작품을 만드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아이처럼 자유롭게 손길 가는 대로 그려야 창조적인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이러한 의구심의 해답은 피카소와  몬드리안의 연작 시리즈를 보면 알 수 있다.        

http://www.mondrian.co.kr/code_l_01.asp?T_code=A&sub_code=A02&L_code=A02&b_num1=339&title=


피카소는 황소 연작물을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황소의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황소의 몸에서 펑퍼짐한 부분들이 형태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 흥미를 느끼고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서 연작을 그려나갔다. 그러다가 평면들의 가장자리와 모서리에서 황소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결국 간단한 외곽선 몇 개로 황소를 처리한 그림을 그린 것이다. 


사실 피카소는 어린 시절 아버지한테 미술을 배우면서 비둘기 발만 300번 넘게 그릴 정도로 혹독하게 스케치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 덕분에 피카소는 누구보다 세밀하게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이런 능력이 소의 중요한 특징을 뽑아내고 단순화시키는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몬드리안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무 연작의 첫 그림을 보면 얼마나 세밀하고 사실적인가....   


추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항상 구체적인 실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뭔가 실제가 있는 것에서 출발해야만 나중에 실제의 흔적들을 제거해나갈 수 있다. 그리고 그런다 해도 큰 위험은 없다. 왜냐하면 그 오브제가 표방하는 이념은 아무리 지운다 해도 지워지지 않는 표시를 남길 테니까. 어쨌든 현실이야말로 화가가가 그림을 시작하게 되는, 마음이 흥분되고 감정이 동요되는 출발점이 된다.  - 파블로 피카소 -


주변에 보면 사진처럼 세밀하게 잘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한테 테크닉이 좋다고 얘기하지 창조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잘 보고, 잘 그릴 수 있는 능력'은 시작일 뿐이다. 창조성으로 피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끊임없이 자신한테 질문을 던져야 한다. 피카소가 소의 본질을 탐구하고 몬드리안이 사물을 표현하는 단순한 법칙을 찾듯이....


베티 에드워즈의 책(내면의 그림, 우뇌로 그리기)을 보면 창조의 과정을 '최초의 통찰 →집중 → 숙고 →해결 →검증'의 5단계로 나눈다. '최초의 통찰(first insight)'은 새로운 정보 또는 평소 놓쳤던 부분을 눈여겨보는 과정에서 직관적 통찰을 통해 문제를 찾아내고 만드는 단계이다. 즉, '뭔가 이상한데',  '왜 그렇지?'와 같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단계인 것이다. '집중'은 문제를 풀기 위해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이다. '숙고'는 수집된 정보들이 기존의 논리적인 분석(L-모드)으로는 해결되지 않아 R-모드를 작동시켜 스스로 통합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해결 방법을 찾아가는 단계이다. '해결'은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라고 외쳤듯이 어느 한순간 해답이 떠오르는 것이다. '검증'은 자신의 해답이 옳은지 검증해 보는 단계이다.  창조의 5단계를 좌뇌-우뇌 이론과 연결해보면 '최초의 통찰', '숙고', '해결'은 R-모드(우뇌식 사고)에 의해 이루어지고 '집중', '검증'은 L-모드(좌뇌식 사고)가 작동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창조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L-모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환경 때문이다. 직장과 아이들 학교생활을 보면 자유롭게 질문할 수도 없고, '빨리빨리'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상황에서 숙고할 시간도 없다. 창조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R-모드식 사고를 하는데 노력을 기울인다면 우리의 창조성은 나날이 향상될 것이다. 


창조는 천재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탄탄한 기초 실력을 갖추고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누구나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미술 작업은 지속적인 창조의 과정이다. 최초의 영감을 가지고 작업을 시작하면 이내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막막한 순간이 온다. 몇 시간을 고민해도 해결 방안이 떠오를지 않아 더 이상의 작업을 포기하고 집에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순간 영감이 떠오르고 이것을 어떻게 구현할까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뮬레이션해보기도 하면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간다. 이런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하나의 작품이 탄생한다.


나의 경우 막히는 지점이 오면 그리던 그림을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빤히 쳐다본다. 때로는 캔버스를 뒤집어도 보고 좌우로 돌려 보면서... 어느 순간 무심히 지나쳤던 붓의 터치와 형태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그림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 처음 시작과 전혀 다른 주제로 완성한다. 


이번에 소개할 그림은 평소보다 2배 이상의 시간이 걸릴 정도로 중간에 방향에 대해 고민도 많이 했고, 그 결과 주제도 완전히 바뀌어 엉뚱한 그림이 된 작품이다. 처음에는 갈대밭 위에 떠 있는 보름달을 그리려고 했다.


하지만 보름달을 주제로 몇 번 그려 이전과 차별점이 약하고 기술적으로도 더 이상 진행시킬 아이디어가 떠 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붓이 가는 데로 달을 칠하고 일단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다음 주말 화실에 가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림을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달에 칠해진 붓의 터치들이 마치 사람 뇌의 주름처럼 보였다. 이 이미지를 살려 방향을 수정하기로 결정하고 앞으로의 작업 방향을 고민하던 중 당시 구글의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이 준 충격을 표현해 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밑에 반도체 칩과 딥런닝을 형상화한 이미지를 그려 넣고 주변에는 영화 메트릭스의 한 장면이 연상되게 처리함으로써 그림을 완성했다.

   

<인공지능>, 복합재료, 2016.4.2.

최근 각광받고 있는 혁신이론 중에 '린 혁신(Lean Innovation)'이 있다. 복잡하게 계획을 세워 완성도 높은 제품을 출시하려고 하지 말고, 일단 아이디어를 검증할 수 있는 수준의 제품을 최대한 빠르게 시장에 내놓아 사용자의 반응을 관찰하고 방향을 신속하게 변경하라는 것이 '린 혁신'의 핵심이다. 어떻게 보면 나의 작업방식이 '린 혁신'과 유사한 점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완벽한 구상과 스케치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하지 않는다. 일단 생각나는 데로 작업을 시작하고 결과를 곰곰이 관찰한 후 그다음 스텝을 진행한다. 이번 그림처럼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리기도 하면서 완성을 위해 신속하게 나아간다. 이 방법이 아직 경험과 스킬이 부족한 초보자가 창작의 고통에서 탈출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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