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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게구름 Dec 16. 2018

채색 재료

초등학교 시절 고학년이 되면 크레파스를 졸업하고 수채 물감으로 넘어간다. 내가 그림에서 멀어진 게 이 시절부터 인 것 같다. 한번 잘 못 칠하면 수정도 힘들고 물을 많이 쓰면 종이가 일어나거나 쭈글쭈글해진다. 미술을 처음 접하는 초등학생이 다루기에는 수채 물감은 정말 힘든 재료이다.


수채화는 특유의 맑고 투명한 느낌이 무척 매력적이다. 또한 자유롭게 번지고, 흐르고, 맺히는 특성을 잘 활용하면 다른 재료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우연적 효과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어둡게 칠한 부분을 밝게 수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계획성 있게 칠해 나가야 한다. 이 점이 경험이 부족한 초보자에게 큰 어려움으로 다가온다.

 
수채화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언제든지 수정이 가능한 불투명 재료를 사용하면 된다. 르네상스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화가들의 사랑을 받는 유화가 대표적이다. 유화는 자신의 의도가 충분히 표현될 때까지 몇 번이고 수정할 수 있고, 깊이가 있으면서도 광택 있는 색감 표현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기름을 사용하기 때문에 다루기가 번거롭고 건조가 더딘 단점이 있다.


유화와 함께 많이 사용되는 불투명 재료는 아크릴이다. 수백 년 전통을 가진 수채화와 유화와 달리 아크릴은 1950년경 미국을 중심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짧은 역사 때문인지 아크릴이라는 재료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나 역시 워크숍을 하면서 처음 알았으니까... 아크릴은 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수채화 장비 정도만 있으면 되고, 수채화같이 맑고 투명한 채색은 물론 유화같이 두껍고 중후한 채색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내가 아크릴을 좋아하는 이유는 유화처럼 언제든지 수정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건조 속도가 빠르다는 점이다. 유화는 기름 양에 따라 다르지만 건조되는데 몇 시간이 걸리는 반면 아크릴은 몇 분만에 굳어진다. 물론 빨리 굳기 때문에 유화의 부드러운 명암 처리, 수채화의 번지기 기법 등이 어려운 단점이 있다. 

정리해보면 3가지 재료 모두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실력과 상황에 맞춰 재료를 선택해야 한다. 나는 그림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 아크릴을 추천한다. 채색에 대한 경험과 기초가 부족한 사람에게 수정이 불가능한 수채화는 큰 부담이다. 그리고 나 같이 주말 몇 시간밖에 투자할 수 없는 사람에게 유화는 마르기만 기다리다 끝날 수 있다. 채색에 대한 감각을 익히려면 다양한 시도와 시행착오를 해보는 수밖에 없고, 이때 최적의 재료가 아크릴이다.    


채색 재료는 세 가지 종류의 물감 외에도 다양하다. 색연필로 칠한 후 붓에 물을 묻혀 문지르면 수채화 느낌이 나는 수책 색연필, 크레파스, 크레용, 파스텔, 오일 파스텔 … 그렇기 때문에 처음 미술을 시작할 때 한 가지 재료를 고집하기보다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보고 특성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댄 트란베르그(2013), 아크릴 퓨전, EJONG

위의 그림은 번지기, 비누거품 첨가 등 아크릴을 사용한 다양한 기법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현실 세계의 재현보다는 화가의 개성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현대미술로 넘어오면서 채색 기법의 중요성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화가들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기법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재료를 놓고 끊임없이 실험하고 탐구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다룰 수 있는 재료와 기법이 많아질수록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찾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워크숍을 마친 후 1년 정도는 특정한 대상을 그리기보다는 아크릴 물감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기법을 시도해 봤던 시기인 것 같다. 어차피 잘 그릴 것이라는 기대와 욕심도 없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아래의 3개 그림처럼 이때 했던 다양한 경험이 자산이 되어, 지금 그림을 그릴 때 모티브와 문제 해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리고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할 때 어떤 기법을 사용하여 효과를 냈는지 추측하고 상상해보는 즐거움을 주고 있다. 

<여름 몽상>, Acrylic on canvas, 2016.4.30.
<정물>, Acrylic on canvas, 2016.7.2.


<가을 단품>, Acrylic on canvas, 201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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