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뭉게구름 Mar 22. 2020

인간을 닮은 인공지능 예술가, 아론

지난해 6월 휴머노이드 인공지능 예술가 로봇인 아이다(Ai-Da)가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첫 단독 전시회를 했다. 영국의 로봇 회사인 엔지니어드 아트(Engineered Arts)와 리즈대학, 옥스퍼드대학의 협력으로 탄생한 아이다는 눈썹 하나하나 세심하게 부착한 제작팀의 노력으로 아름다운 여성 예술가 모습을 하고 있다. 전시회 사전 공개 행사에 처음 소개된 아이다는 눈에 내장된 카메라와 팔에 연결된 연필로 사물을 인지하고 그림을 그렸다. 행사에서 제작자 겸 갤러리 운영자인 아이단 멜러의 얼굴을 45분 동안 눈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초상화를 그리는 시연이 펼쳐졌다. 

Ai-Da 가 그린 아이단 멜러의 얼굴


위의 사진을 보면 다들 느끼겠지만 얼굴은 사람을 닮았을지 모르겠지만, 아직 한 사람의 예술가라고 하기에는 실력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  아이다와는 달리 외형은 일반 XY 프린터지만 사람처럼 작품을 구상하고 스케치와 채색을 하는 인공지능 예술가를 만들려는 시도가 40년 넘게 진행됐었다. 해롤드 코헨(Harold Cohen, 1928~2016)의 아론(Aaron)이 그 주인공이다.


코헨은 영국 데이트 갤러리를 비롯한 여러 유명 미술관에서 전시했고,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 화가로 뽑힐 정도로 유명한 추상파 화가였다. 1968년 미국 UC San Diego 대학교수로 부임하면서 인공지능 예술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된다. 컴퓨터 작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학생을 만나게 된 것을 계기로 컴퓨터를 공부하고 미술 작품을 만드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971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컴퓨터 관련 학회에서 펜이 달린 거북이 형태의 이동 로봇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시연을 하기도 했다.


코헨은 1973년부터 2년 동안 스탠퍼드 대학 인공지능 연구소에 방문 교수로 있으면서 본격적으로 인공지능 기술을 접목하게 된다. 스텐포드 대학에서 인공지능 프로그램 언어를 배우고 관련 기술을 익혀 1974년 아론을 탄생시켰다. 이전 글에서 소개했던 우연(랜덤 함수) 기반의 1세대 인공지능 미술과 다르게 아론은 규칙 기반의 전문가 시스템이다. 


전문가 시스템은 '대각선 구도는 긴장감을 준다', '강조할 때 보색 대비를 사용한다' 등과 같이 화가(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지식을 규칙(rule)으로 만들어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방법이다. 학생이 학교에서 배운 원리를 응용하여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 가듯이, 아론은 코헨이 입력한 규칙에 따라 무엇을 그릴지, 그림 구성을 어떻게 할지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렸다. 아론이야말로 인간의 작업 방식을 닮은 인공지능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처음 선을 보인 아론은 코헨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 넘게 끊임없이 보완되었으며, 세 번의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초기 아론은 추상적인 형태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그림을 그렸다. 종이 위에 아무 곳이나 임의의 시작점을 설정하고 어떤 상황에서 다음에 무엇을 할지 구체화한 'IF-THEN' 규칙에 따라 그림을 그려나간다. 예를 들어 한 선을 계속 그릴지, 그린다면 어떤 방향으로 그릴지는 그 선이 닫힌 형태의 일부인지 아니면 열린 형태의 일부를 형성하지에 따라 결정된다. 아론의 초기 작품은 마치 고대 동굴 속 벽화나 어린아이들의 그림처럼 보인다. 그러나 60년대 1세대 인공지능 작품과는 달리 자유로운 선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림 안에 어떤 스토리가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Harold Cohen(1975), Machine and Four Hands
Harold Cohen(1979), Untitled

 

80년대 들어 아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나무, 풀, 바위, 사람 등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게 됐다. 아론은 단순히 사물의 형태만 묘사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다. 곡예사 그림에서  공 위에 서 있는 사람의 자세를 보면 실제 곡예사가 균형을 잡기 위해 취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그리고, 공에 앉아 있거나 한 발을 딛고 있는 사람의 자세도 너무나 자연스럽다. 사람이 서 있는지 앉아있는지, 바닥은 평평한지 둥근지 등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얼굴, 팔, 다리의 위치, 각도 등이 현실 세계의 중력 법칙을 거스르지 않도록 코헨이 입력한 수 천 개의 규칙에 따라 일일이 다 계산하여 나온 결과이다. 또한, 그 아래에 있는 그림은 사람, 나무, 바위 등 여러 종류 사물들이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다. 화가가 작품을 시작하기 전 사물의 위치와 크기, 구도 등을 미리 계획하듯이 아론도 스스로 작품을 구상하는 역량을 갖게 된 것이다.   


Harold Cohen(1986), 곡예사 Series
Harold Cohen(1987), 풍경 Series


2단계 아론은 드로잉만 봤을 때 전문가 수준에 올라왔다. 하지만 채색은 전적으로 코헨이 몫이었다. 위의 곡예사 그림도 아론의 드로잉에 코헨이 색상을 입힌 것이다. 그림을 그려본 사람은 알겠지만 색의 미학은 미묘하고 어렵다. 같은 색상이라도 명도와 채도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그림 전체의 조화와 균형, 강조를 위한 대비 등을 고려해하기 때문에 진행 과정에서 수많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또한 고심 끝에 컴퓨터의 색상환 표에서 색을 결정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사진을 프린터로 출력해보면 화면과 출력물의 색상이 미묘하게 달라 사진을 선택했을 때의 느낌이 사라져버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똑같은 사진도 다른 회사의 프린터로 출력하면 느낌이 다르다. 이와 같이 채색을 한다는 것은 드로잉과는 양적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규칙 체계를 요구한다. 


80년대 후반 코헨은 채색까지 가능한 아론을 개발하기 위해 과감하게 2단계 아론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방대하고 복잡한 규칙의 처리가 용이한 프로그래밍 언어인 LISP을 새로 배워 처음부터 프로그램을 다시 짜기 시작했다. 코헨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어려움을 겪다가 드디어 1995년 채색까지 하는 3단계 아론을 선보였다. 3단계 아론은 코헨이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업그레이드 됐다. 처음에는 프린터를 사용했지만 한계를 실감한 코헨은 붓에 물감을 찍어 그림을 그리는 로봇까지 개발했다. 이를 위해 코헨은 세심하게 계량한 혼합물로 만든 수천 가지 물감 샘플을 비교해가며 적합한 염료와 종이를 찾는 실험에 1년 이상 매달렸다.   


2004년 작품
2007년 San Diego 미술관에 아론 영구 전시


아론은 3세대에 이르러 자신만의 화풍을 가진 진정한 인간을 닮은 예술가가 된 것 같다. 물론 사람과 비교하여 아론은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인물화-아론은 추상화를 그릴 수 없다. 사람은 그날 기분에 따라 영역을 넘나들면서 자유롭게 주제를 선택할 수 있지만 아론은 각 주제마다 별도의 프로그램을 구동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작업 대상을 추가시키기 위해서는 수 천 개의 작업 규칙을 추가하는 지난한 과정을 밟아야 한다. 수 천, 수 만개의 규칙을 논리적인 오류 없이 프로그래밍한다 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이겠는가... 사람은 그림에 개나 고양이를 추가하는 게 그리 힘든 일이 아닌데 말이다. 


이와 같은 아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코헨 교수가 40년 동안 보여준 인공지능 예술의 길에 찬사를 보내야 한다. 사실 범용성과 확장성 문제는 아론만의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 기술이 풀어야 할 근본적인 숙제이다.  아론이 사용한 전문가 시스템 방식은 물론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심층학습법 역시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 코헨과 아론이 함께 걸어온 길은 앞으로 인공지능 미술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우선 이 글을 시작하며 소개했던 아이다와 아론의 미적 수준 차이가 어디서 나왔을까? 물론 개발 기간, 목표 등이 달라 직접적인 비교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초창기 아론의 그림에서 느꼈던 미적 감흥을 아이다의 초상화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다. 만약 코헨이 현재 시점으로 환생해서 아론 개발을 시작한다면 어떻게 접근했을까? 아마 인간의 얼굴을 닮은 휴머노이드를 개발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 미술적 관점에서 보다 높은 수준의 인공지능을 만드는데 전력을 다했을 것이다. 인공지능 개발자와 예술가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인공지능 미술의 발전은 미술 영역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고, 제2, 제3의 코헨이 나와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가능해진다.  


다음은 미술 영역을 암묵지(暗默知)에서 형식지(形式知)로 끌어내는 일이다. 미술 시간에 석고 데생을 했던 기억을 떠 올려보자. 아무리 해도 입체감이 살아나지 않는데 선생님이 손을 한번 쓱 대면 다른 그림처럼 보인다. 어떻게 하냐고 물어봐도 잘 관찰하면 보인다고 할 뿐 별다른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사실 선생님도 그동안의 훈련과 경험으로 몸에 체득되어 있을 뿐 명시적인 규칙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암묵지적 성격이 미술 고유의 특성이고, 인공지능 기술을 적용하는데 걸림돌이다. 그래서 코헨은 아론이 자연스러운 얼굴을 그리게 하기 위해 4,000개 이상의 규칙을 만들어야 했다. 코헨이 미술 교과서에도 없는 수많은 규칙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화가로서 경험과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 때문이다. 인공지능 개발에 뛰어들기 전 추상 화가 코헨은 예술심리학에 다년간 몰두했었다. 선과 형태, 색깔의 상호 관계에 대한 사람의 감정과 인지적인 반응을 일반화된 법칙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체계적으로 탐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험이 인공지능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했으며, 40여 년의 여정을 걸어가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결국 미술이 가지고 있는 암묵지가 하나하나 일반적인 규칙으로 형식지화되지 않으면 인공지능 미술의 발전은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인공지능이 나의 분신이고 아바타가 돼야 한다. 순수 예술의 가치는 독창성에서 출발한다. 아론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남과 다른 아론만의 스타일이 느껴진다. 아론의 작업 규칙에는 코헨만의 고유한 예술철학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영화 아바타에서 주인공과 외계 행성에 있는 아바타를 분리하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없듯이, 코헨과 아론을 분리해 생각하는 순간 예술은 사라지고 영혼 없는 기계와 프로그램 개발자로만 남는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구입해 버튼만 누른다고 예술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자신만의 예술철학이 남긴 데이터와 규칙으로 인공지능에 혼을 불어 넣어 줄 때 독창적이고 예술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19세기 사진이 처음 등장했을 때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고 예술로 승화시킨 것은 엔지니어가 아닌 미술계에 몸을 담고 있던 사람들이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주체는 미술 전공자가 돼야 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아무나 코헨처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최근 인공지능 관련 오픈소스 프로그램과 커뮤니티가 많아지고 있어, 관심만 있으면 상대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피동적 수용자에서 벗어나 인공지능과 동반자가 되어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미술 전공자들이 늘어날 때 인공지능 미술이 꽃피울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공지능을 위한 미학(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