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평: 늘 영화에 기대하던, 가장 마법 같은 황홀경
‘언제나 영화처럼’
이걸 카톡 상태 메시지로 오래 해놨다. 친구가 언젠가 그 문구를 보고 내게 말했다.
"그거 볼 때마다 든 생각인데, 마치 영화의 주인공처럼 늘 폼나게 살겠다는 다짐 같아서 좀 웃겨."
어, 그런데 내게는 오히려 정반대 의미였다. 살다 보면 폼나기는 커녕 내가 생각해도 자신이 초라하고 한심스러울 때가 있지 않나. 나는 멋있는 장면보다는 오히려 영화 속 인물들의 나와 비슷한 모습들로부터 위안을 받는다. ‘나만 한심스러운 건 아니야’, ‘영화에도 비슷한 장면 나오더만’ 같은 식으로 말이다. 똑같게 구차한 주인공들로부터 나의 언제나를 위로받고, 그러다가도 결국 영화라서 존재하는 어떤 아름다움이 내 일상에도 한번은 영화처럼 닿기를 바라는, 나의 ‘언제나 영화처럼’은 생각보다 소박한 주문이다.
<라라랜드>를 그래서 좋아한다. <라라랜드>는 잔인하리만치 현실적이면서도 필요할 땐 가장 마법적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열 번 봐도 질리지 않는 도피처 같다고 자주 생각한다.
영화 초반 라이언 고슬링은 누나에게 연체료 청구서는 로맨틱하지 않다는 훈계를 듣는다. 그의 머릿속에는 고전 재즈의 부활뿐이지만 덕분에 크리스마스에까지도 치기 싫은 징글벨을 연주하는 처지다. 사실 아르바이트할 때 제일 힘든 게 그거 아닌가? 내가 지금 있어야 할 자리가 여기가 아닌데-라는 불안을 못 본 척 외면하는 것. 원래 같았으면 마주치지 않아도 됐을 사람들에게 마음에 없는 표정을 지어가며 말이다. 대학에 입학하고부터 나도 청구서투성이를 해결해야 하는 매달 15일만 바라보며 살았던 것 같다. 그 불안이 참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 번번이 10초 컷 당하는 오디션을 위해 6년이나 카페 알바를 하는 엠마 스톤이 반가웠다.
<라라랜드>가 담는 현실성은 꿈과 사랑을 바라보는 영화의 주제의식에서 가장 도드라진다. 로맨스 영화로서의 자기 본분을 망각이라도 한 듯, 이 영화는 꿈과 사랑을 현실이라는 저울 위에서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관계라고 본다. 두 주인공이 같이 부르던 <City Of Stars>도 그래서 나한테 슬픈 노래였다.
“It's love. Yes, all we're looking for is love from someone else.”
(우리가 찾는 건 누군가의 사랑이 전부지.)
“I don't care if I know just where I will go Cause all that I need is this crazy feeling.”
(난 상관 안 해. 내가 어디로 가고있든 이 미칠 듯한 느낌만 있으면 돼.)
난 괜찮아-는 원래 가장 안 괜찮은 사람이 하는 대사다. 이 노래를 부르기 직전에 엠마 스톤은 엄마의 잔소리에 대고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마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를 시전하고, 다 들어버린 라이언 고슬링은 평소에 주먹으로 턱을 갈기고 싶었던 친구의 밴드에라도 들어간다. 그 직후에 나오는 노래라서. 두 주인공은 세상 가장 달콤한 목소리로 난 상관 안 해 사랑만 있으면 돼-라고 하고 있지만, 누구보다도 슬픈 기분으로 녹록치 않은 현실을 예견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 내내 다양하게 변주되는 <City Of Stars>를 오직 단 한 번, 저 때만 두 주인공이 피아노 앞에서 함께 부른다. 내 친구는 사랑하는 남녀 한 쌍이 주고받듯 부르는 게 정말 예뻤다고 하던데 나한테는 현실성이 잔인하게 녹아든 가장 슬픈 노래였다. 이들의 예견대로 된 걸까. 엠마 스톤은 꿈꾸는 바보들을 위한 노래(Here’s To The Fools Who Dream)의 가사처럼 파리로 가게 되고 라이언 고슬링은 꿈을 위해 LA에 남게 된다. 꿈이 두 사람에게 서로 다른 종착지를 일러주는 상황에서,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보자며 둘이 주고받는 눈빛이 너무 인상 깊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 사랑에 쏟을 시간이 부족해지고, 반대로 사랑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 꿈에 쏟을 시간이 부족해지는 우리 시대의 상실감을 잘 대변했다.
한편 현실을 반영하여 위로해주는 것이 도피처의 기능이지만, 그렇다고 현실적이기만 해서는 도피처로서의 의미를 잃는다. <라라랜드>는 필요한 순간엔 가장 마법 같은 영화다. 재즈음악과 원색의 컬러풀한 미장센을 바탕으로 달콤한 연애를 그려내기도 하고, 영화가 치고 나가야 할 때는 불필요한 실패를 과감하게 생략하기도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장면인 그리피스 천문대 시퀀스와 마지막 엔딩 시퀀스에서 마법 같은 환상성은 극대화된다.
특히 마지막 엔딩 시퀀스는 <라라랜드>를 한 단계 다른 차원으로 올려놓는다.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의 첫만남으로 돌아가서 당시에 그녀를 외면했던 것과 가장 반대로 뜨거운 키스를 나누며 엔딩은 시작된다. (나는 아직도 이 키스씬을 볼 때 전율을 느낀다. 그리고 이어지는 J.K. 시몬스의 핑거스냅도 사랑한다) 이윽고 펼쳐지는 장면들은 모두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순간들이다. 만약에 밴드의 키보드 영입 제안을 받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쪼다 같은 표정을 지어야 하는 화보촬영에 남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엠마 스톤의 1인극에 가서 누구보다 열렬한 박수를 보냈더라면, 만약에 두 사람이 서로의 곁에서 꿈을 격려하며 필요한 순간에 언제나 함께했더라면…. 분명 그들이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만약을 꼬리 물듯 그려나간다. 현실의 타이밍은 늘 잔인하고 야속하다. 마지막 시퀀스는 영화에서 어긋나버린 모든 타이밍들을 바로 끼워서 관객들로 하여금 아주 잠깐이나마 마법 같은 체험을 하게 해준다. 두 주인공의 아이컨택으로 엔딩 시퀀스가 끝나고 마법 같은 <라라랜드>가 끝나지만, 여운은 가시지 않고 마음에 진하게 남는다.
낭만적이고 사랑스러운 영화가 어디 한둘일까. 그 쟁쟁한 영화들 가운데 유독 라라랜드가 참 예뻤다고 기억에 남더라. 유독 라라랜드가 다시 보고 싶은 날이 있다. 노랗고 파란 라라랜드의 분위기가 그리워서 괜히 사진도 찾아보고 유튜브로 노래도 다시 듣는다. 그리고 그때마다 라라랜드가 선물한 여운은 처음의 소박한 주문대로 나의 언제나를 격려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