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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만나서 참 다행이야

두 번째 심리상담

스케치북에 나의 이야기를 적는다. 왼쪽에는 상담을 찾아온 이유 3-4개 나열했다. 오른쪽에는 상담을 통해 원하는 것을 적었다.


이번 삶을 잘 살고 싶어요.


60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에 잠에 잘 못 드는 것과 일상에서 힘든 순간들 그리고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불안과 우울과 두려움. 나아가려고 해도 몇 년 동안 제자리걸음 같은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 끝에 발견한 키워드는 ‘회피’였다. 상담 선생님이 묻는 질문에 연신 ‘모르겠어요.’, ‘제가 알겠다고 대답한 걸 몰랐어요.’, ‘이건 진짜 모르겠어요.’ 라며 답을 피했다. 질문은 어렵지 않았는데 난 대답할 수 없었다. 가끔은 머리가 하얗게 비어 무슨 질문을 받았는지, 내 생각이 어떤지 버벅거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모르겠다는 태도로 많은 것들에서 도망쳤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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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회피는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다. 맞서 싸우기보다 도망쳤고 그들이 날 기다려 어쩔 수 없이 만난 날에는 심장이 빠르게 뛰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반복되는 싸움이 싫어서 싸우기보다 죽는 것을 택하려고 할 때 그들은 멈췄다.


그 이전부터였을까 이 시건 이후일까 난 무언가를 맞닥뜨리는 대신 피하는 게 생존에 도움이 되는 걸 알았다. 그리고 모든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어른이 됐다.


상담을 시작하기 몇 주 전에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여러 개의 직업, 잦은 해외여행, 특별한 경험을 했어?” 그리고 난 답했다. “지금 하는 일과 삶에서 도망치다 보니까 일을 하다가 직업도 회사도 여러 번 바꿨어. 여행도 한국의 삶이 싫어서 질리도록 다녔고, 경험도 지금 가만히 있는 게 불편해서 무언가를 찾아다니다 보니깐… 나랑 있는 게 힘들어서 회피하다 보니까 이렇게 많은 경험을 했네.” 이때는 몰랐다. 삶의 굵직한 이벤트들이 도망치는 것에서 시작 됐다면, 매 순간 만나는 나의 삶 역시 비슷할 거라는 건 알지 못했다.


누군가와 밥을 먹을 때, 내가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상대의 선호를 따라가는 것.

약속 시간을 잡을 때, 나의 일정이 있어도 상대에게 맞추는 것.

대화도중 내 의견이 있어도, 상대의 말에 동의하는 것.

모르면서, 안다고 한 것.

알면서, 편의를 위해 모른다고 한 것.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노력한 척 보이려는 것.


이렇게 알게 모르게 나를 속이며 살았다. 내 생각과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상대가 그렇다는 대로 부딪힘 없이 흘러가는 게 편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나의 생각과 감정은 사라지고 누군가와 함께하면 눈치를 보게 됐다. 사람들과 있을 때 맞추기 위해 애를 쓰는 게 나를 긴장하게 만들고 경직되게 했다. 그래서 난 혼자인 게 편했다. 그리고 종종 찾아오는 공허함에 다시 사람들을 찾았다.


이런 내 모습에 머리가 띵하다. 하나부터 열까지 피하지 않고 마주할 생각을 하니까 뭐부터 해야 하나 막막함이 밀려든다. 동시에 이 상황도 회피하려는 나를 발견한다. 또 피하고 또 텅 빈 껍데기로 살 수는 없잖아. 해야지. 시도라도 해야지.


그래도 이런 모습을 이제라도 만나서 참 다행이다. 내가 꾸며낸 포장지를 벗기고 나는 나답게 살고 싶다. 나는 꽉 차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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