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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나 Nov 02. 2021

나는 오늘도 다자이를 읽는다

나의 조각




다자이를 사랑해 마지않아 번역을 시작했다. 비록 그림으로 먹고살고 있지만, 번역은 내 또 다른 꿈이자 욕망이다. 거창하게 썼으나 사실은 취미로 하는 수준에 주목할 만한 실력은 아니다. 그저 나 좋자고 하는 일이고, 일상에서 접하기 어려운 좋은 작품을 가까운 지인들에게 공유하고 싶을 뿐이니. 내가 다자이를 사랑하게 된 이유.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주제이지만 지금의 나라는 존재와 번역에 대한 애정을 만들어냈기에 도무지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처음 그의 책을 집어 든 건 고등학생 때였다. 당시에 나는 상당히 내향적인 편이었고 혼자 있는 걸 즐겼다. 주로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었는데, 그 세상이 그렇게 무궁무진할 수 없었다. 마음껏 상상하고 마음껏 표현했던 유일한 시기였다. 책은 주제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오히려 미래의 목표로 삼고 열심히 준비했던 그림보다 더 좋아했던 것도 같다. 가끔은 직접 글을 써보기도 했다. 그렇게 책에 빠졌다. 학년이 높아지고 입시 미술을 준비하면서 공부하랴, 그림 그리랴, 여유는 점차 부족해졌다. 나는 더 이상 온전히 나일 수 없었고 폭풍처럼 거세게 치닫는 시간의 압박에 마냥 피폐해져 갔다. 인생의 시험이 되어버린 그림도 도무지 즐겁지 않았다. 오로지 잠들기 전 잠시 책 읽는 틈새만이 유일한 휴식이었다. 그런 와중에 다자이를 만났다. 학교 도서관 일본소설 코너 한 켠에 꽂혀있던 그. <인간실격>, 참으로 처절하고 우울한 제목으로 마주친 일본 작가는 내 첫사랑이 되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책은 주인공 오오바 요조의 번뇌로부터 시작된다. 이 문장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우리 누구나 삶의 부끄러움 하나쯤은 갖고 있으니까.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그의 의지는 운명의 장난으로 불행을 거듭해 뿌리 끝까지 바스러진다. 고뇌는 비참할 정도로 계속된다. 연약하고 가냘픈 생애는 점차 평범한 이들이 보기엔 불온한 요소들로 점철된다. 그리고 종국엔 깨닫는다. 자기는 인간으로서 실격했다는 사실을. 인간이면서도 인간이기를 두려워하는 요조, 죽고자 했으나 그저 살아가고 싶었던 사람. 과연 다자이 오사무 본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다. 나는 도리 없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다자이의 책을 출판사별, 번역가별로 수집했으나 점차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다. 다자이를 太宰(다자이)로 만나고 싶었다.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원서를 구해 혼자 끙끙대며 사전을 뒤적거렸다. 마지막 장을 읽을 즈음에 나는 원하던 미대에 입학했다. 그의 글에서 영감을 받아 과제를 했고 작품을 만들었다. 마치 광적인 집착처럼 그를 놓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자이가 상당히 존경했다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찾아 읽었고, 점차 가와바타 야스나리, 나쓰메 소세키, 다니자키 준이치로, 시가 나오야 등등……, 스펙트럼은 무수히 많은 일본의 근대문학 작가들로 확장됐다. 도서관과 인터넷을 뒤져 원서를 구하고 일본어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애초에 전공을 이쪽으로 삼을 걸, 후회했던 것도 같다.

시간이 흐르고 대학 졸업 후 쫓기듯 디자이너로 취업했다. 생업을 해야 했다. 미술과 관련된 업종이야말로 확실하고 보장된 길이었다. 전공도 아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기엔 내 능력과 조건이 너무나도 안 좋아 보였다. 결국 내 삶은 번역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잊고자 결심했다. 일부러 더 피하고, 보지 않고, 읽지 않았다. 취업 후 1년여가 지나자 숨통이 트이고 여유가 생겼다. 어느 휴가일에, 책장에 꽂혀있던 다자이를 보고 몹시 망설였다. 그 동안 어떻게든 마음속 깊이 묻고 숨기려고 했던 내 무리한 욕심이 북받쳐 올라올 게 뻔했다. 감당할 수 있을까. 어차피 이루지 못할 꿈. 나의 길이 아닌 것.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아니나 다를까, 그의 찬란한 문장과 사유가 가득한 페이지를 보자마자 잊으려고 했던 내 열정이 다시금 깨어났다. 결국, 나는 다시 시작하고 말았다. 이루어지지 않을 짝사랑이라지만 어쩌겠나. 도저히 잊을 수가 없는데. 학원을 가거나 과외를 받을 여건이 안 되는 나는 그들의 문장을 오역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 더욱더 열심히 애를 쓴다. 물론, 아직 한참 부족하다. 어디까지나 혼자서 공부하고 있기에 오역을 했는지, 뉘앙스는 잘 살렸는지 알 도리가 없다. 가야 할 길이 참 멀다. 그래도 이제야 진정한 삶의 낙을 되찾은 느낌이다.

나는 오늘도 다자이를 읽는다. 그렇게 다시금 살아감을 느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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