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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인이 왜 강사가 됐을까?

맨날 벌벌 떨면서도 무대에 서고 싶어 하는 이유

나는 심리학 강사다. 학교, 도서관, 기업 등에 섭외되면 가서 자존감, 행복, 스트레스 관리, 동기부여, 글쓰기 등 다양한 주제로 강의를 하고, 워크숍을 한다. 대학원에 다니던 무렵부터 지금까지 강의 일을 쉬지 않았으니 대략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강의를 해 온 셈이다.



너 내향인이라매? 근데 어떻게 강의를 하고 다녀?



어쩌면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분들께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으실 수 있겠다. 내성적이라면서 웬 강연인가. <내성적이지만 사업가입니다> 라매. 근데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 들고 설친다고? 네가 무슨 내향인이야? 남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 두려워 벌벌 떠는 내향인들의 심정을 네가 알아?



아니, 근데 나 억울하다. 

정말로 내향인이 맞단 말이다.


나는 MBTI를 할 때마다 I가 나오고, Big 5 검사를 해도 외향성 점수가 낮게 나온다. 어렸을 때부터 주변 친구들, 선생님, 어른들로부터 '넌 내성적인 것 같아', '수줍음이 많구나', '낯을 가리는구나', '좀 자신 있게 해 봐' 등의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듣던 사람이다. 


심리학 전공자로서도 스스로에게 '내향인'이라고 진단을 내리고 있다. 심리학 공부한 지도 어언 15년 정도 됐다. 비록 내가 박사학위는 없지만 그래도 연구 좀 해봤다. 그런 내가 아무리 들여다봐도 난 내향인이다. 이건 (아마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전국 강사들의 MBTI를 통계 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아마 예상하건대 외향성(E)이 내향성(I)보다는 많을 것 같다. 연구 결과가 그렇다. 외향성이 높은 사람들이 내향인에 비해 더 낙천적이고 진취적이다.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하고, 그래서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데에도 더 적극적이다. 하지만 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외향인이 강사 하고 싶어 하는 이유와, 내향인이 강사 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좀 다르지 않을까.



외향인 강사의 목적은 '사람'을 향한다. 강연은 수단일 따름이다. 
강연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데 중점을 둔다. 
내향인 강사의 목적은 '전달'을 향한다. 강연 그 자체가 목적이다.
강연을 통해 속내를 털어놓으며 카타르시스catharsis를 경험한다.
(평소에 어디 가서 이렇게 길게 말할 기회가 별로 없으니까!)



강연을 통해 나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나는 생각이 많은 편이다. 특히 어떤 일이 있을 때, 혼자 생각에 잠겨 꼬리에 꼬리를 물듯, 상상의 나래를 펴는 이른바 '철학가 흉내'가 있다. 어렸을 때, 제발 밖에 나가서 좀 놀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책이나 읽고 앉아 있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습관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의 '철학가 흉내'는 비로소 대학에서 빛을 발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나는 객관식, 단답형 시험보다 서술형 시험이 좋았다. 기왕이면 오픈북 시험이 좋았고, 정답이 하나가 아닌 문제를 좋아했다. 교수님들께서 그런 나의 잠재력을 좋게 봐주신 것인지 서술형 시험마다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하길 좋아하는 내게 대학원 생활은 정말 궁합이 잘 맞았다. 일단 일방적으로 주입시키지 않는 대학원 수업이 너무 좋았다. 논문을 읽고 나서 (아무리 심리학계 대가의 논문이라 해도) 내 생각대로 진지하게 논문을 비판하고, 다른 의견을 가져다 붙이고, 더 나은 방법을 제안해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토론이나 논쟁, 상호 비판이야말로 대학원이 추구하는 공부법이기 때문이리라.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난 대학원 발표가 재밌었다.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내가 앞으로 사회에 나가 무엇을 하면 행복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지난날을 되짚어보니 나는 '발표'하는 순간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내성적인 나에게는 그 어떤 발표도 쉽게 느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교수님 앞에서, 선배님 앞에서 하는 연구 관련 발표들이었는데 오죽하랴. 


하지만 발표하는 내내 이상하리만치 희열감을 느꼈다. 교수님이 보시기에는 코웃음 칠 만큼 어이없고 수준 낮은 아이디어였겠지만(그래서 까이기도 많이 까였다), 그래도 내 생각과 논리를 정리하여 사람들 앞에서 펼쳐낸다는 게 왜 이렇게 재밌었는지 모르겠다. 와, 나 내향인이면서 관종이었네. 평소 하고 싶었던 말이 이렇게 많았는데,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는지.



나는 '철학가 흉내'를 내고,
그 결과물을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내 주변의 외향인 친구들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넌 매사 너무 진지한 것 같아', '뭘 그리 깊게 생각하고 그래', '에이~ 우리가 뭐 토론하고 있는 거 아니잖아',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연애든, 학업이든, 진로이든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하고 고민해서 의견을 말해도 이놈의 외향인 친구들은 도무지 진지하질 못했다. 도리어 나를 '진지병' 걸린 사람 취급이나 해대니, 내가 어딜 가서 이야기를 해야 하냔 말이다.


그 속풀이, 카타르시스를 잊을 수가 없어 강사가 되기로 했다.


내가 연사가 된다면, 1~2시간 동안 줄곧 쉼 없이 내 생각을 사람들 앞에서 떠들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1~2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서 나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겠지. 진지하게 들어주고, 진지하게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겠지(나중에야 깨달은 것이지만 너무 진지하게 하면 청중들이 욕을 하고 도망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지금은 재미와 유머를 더하기 위해 무진장 애쓰는 중이다).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에 나는 과감히 강사의 길을 골랐다. 대학원을 마치고 바로 '심리학, 게으름을 말하다'라는 게으름 극복과 관련된 강연을 혼자 열었고, 연달아 '승부욕의 심리학', '자존감 공부 다시 하기', '메타행복의 비밀', '심리학 대학원 입시 전략 설명회' 등의 강연을 열면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행복하냐고? 물론 행복하다. 강의는 내게 일석이조의 활동이다. 평소 못했던 진지한 이야기, 발칙한 이야기, 재밌는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를 청중과 함께 풀어낼 수 있는 카타르시스의 장이자, 성스러운 생계의 현장이다. 내향인이기에 수백 번 강의 경험이 쌓인 지금도 맨날 벌벌 떨고 도망가고 싶지만 그래도 이렇게 목소리 높여 속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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