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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걸 왜 참아요?

묵묵히 참고만 있는 사람들의 심리는?

필자가 군대 훈련소에 있을 때의 일이다. 야간 행군을 하는 날이었는데, 저녁을 먹고 7~8시쯤 출발해서 완전 군장으로 밤새 걷다가 다음날 아침에 부대 복귀하는 그런 일정이었다. 중간중간 초코바 등 간식도 틈틈이 먹고 새벽에는 잊을 수 없는 육개장 컵라면도 먹으며 잘 버텼는데, 새벽 3~4시가 되니 고비가 찾아왔다.


발바닥에는 물집이 잡히고 어깨는 끊어질 듯 아팠다. 그럼에도 졸음은 또 어찌나 쏟아지는지,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면서 걷기'를 체험해 볼 수 있었다(아, 그러고 보니 자대에서도 몇 번 더 하긴 했다). 정말 너무 힘들어서 모두 말없이 앞사람 등만 보고 걷고 있던 그때, 같이 걷던 조교님이 이러는 것이 아닌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지금은 나이도 좀 들었고, 저 정도 고통이 다시 찾아온다면 정말로 날 죽일 것 같아서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젊었고 패기가 넘쳤다. 왠지 조교님의 말을 들으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조교님의 외침을 따라 하며 야간 행군을 버틸 힘을 얻었고, 결국 무사히 야간 행군을 마칠 수 있었다.






지금은 많이 약해졌지만, 예전에는 '의지', '노오력' 드립이 정말 심했다. 특히 군대에서는 더했다. 힘들다고 말하면 정신력이 어쩌니, 나약해 빠졌다느니, 개념이 없다느니 바로 '의지', '노오력' 드립이 날아오곤 했다. 그때는 정말 억울해서, 악으로 깡으로 버텼지만 지금은 그런 '의지', '노오력' 드립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것이었는지를 새삼 돌아보게 된다.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이긴 하다. 보통 '인내력', '끈기'와 같은 요소들은 바람직한 스탯으로 간주되곤 한다. 취업할 때 인성검사 한번 해보면 안다. 기업들은 여전히 인내력이 강한 사람, 잘 참는 사람을 원한다. 힘들어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는 사람에게 채용 시 높은 점수를 준다.


그리고 실제로도 잘 참을 수 있는 사람들이 왕왕 좋은 성과를 낸다. 힘들다고 금방 포기해 버리면 남는 성과가 별로 없다. 유혹을 억제하고 고통을 묵묵히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마지막까지 버티고, 뭐라도 얻어 올 때가 많다. 문제는 그게 늘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라는 데 있지만.



아니, 피하면 되는데 굳이 그걸 왜 참아?



심리학자들은 고통을 참는 힘, 즉 고통 감내력distress tolerance이 좋은 스탯이라고 생각했다. 알코올, 약물, 도박 등 위험행동으로부터 지켜주는 보호요인이고, 끈기 있게 장기적 목표 달성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긍정적인 지표라고 여겼다. 하지만 잘 참는 사람들을 관찰하다 위화감을 느꼈다. 이제 그만 참아도 되는데, 그냥 피하면 되는데 묵묵히 맞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별도의 개념까지 만들었다. 고통 감내력이 과하면, 심리학자들은 그걸 고통 과잉감내력distress overtolerance이라고 부른다. 고통 과잉감내력이란 신체적, 정신적 피해가 기대 이상으로 심각함에도 높은 수준의 고통을 계속 감내하는 성향을 가리키는 용어다.




고통 과잉감내력이 높은 사람들의 특징

1) 생각이 굳고, 좁아진다. 

이걸 인지적으로 경직되어 있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한번 상상해 보자. 여러분이 지금 한 겨울에 맨 몸으로 눈보라를 견디고 있다고 해보자. 과연 사고회로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나 할까? 그냥 돌아버릴 것 같지 않은가? 또한 고통을 참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합리적인 해결 방법 따윈 생각나지도 않을 것이다(터널 시야).


2) 정서/욕구가 억제된다.

고통을 과하게 견디는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 상태나 욕구를 잘 돌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온 신경이 고통 감내에 쏠려 있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인지, 뭘 하고 싶은지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건강한,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하고 당장의 고통을 완화시켜 줄 수 있는 온갖 부적응적 수단(이를테면 음주, 쇼핑, 도박 등)에 의존하려 든다.


3) 과도한 완벽주의를 보인다.

완벽주의는 고통을 굳이 왜 참고 있는지,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대개 건강하지 못한 완벽주의자들은 주변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경향을 보인다. 부모님/선생님/상사 마음에 들어야 하니까, 하기 싫어도 꾹 참으며 그들의 기준에 맞추려 드는 것이다. 솔직하게 안 하겠다, 힘들다, 포기하겠다는 말을 못 한다. 왜? 완벽하지 않으면 인생 끝나는 줄 아는, 비합리적 신념irrational belief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고통 과잉감내력과 유사 개념 간의 비교

1) 학습된 무기력과의 비교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 이란, 통제 불능/피할 수 없는 좌절/실패/고통 등에 반복적으로 노출될 경우 '뭔 짓을 해도 안 된다'는 것을 학습, 나중에 실제로 피할 수 있게 되어도 회피 행동을 하지 않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피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학습된 무기력과 고통 과잉감내력이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고통 과잉감내력은 '의지 유무' 면에서 학습된 무기력과 다르다. 학습된 무기력을 가진 사람들은 견디려는 의지 자체가 없다. 그냥 포기한 채 묵묵히 맞고만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 과잉감내력은 '내가 어떻게든 이 고통을 성공적으로 참아야 한다'는 의지가 있다. 


이를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학습된 무기력을 가진 사람들은 적의 공격이 들이닥쳤을 때 게임 패드를 그냥 놔 버린 이들이라면, 고통 과잉감내력이 높은 사람들은 가만히 '방어' 버튼만 누르고 있는 사람들이랄까. 다크소울 식으로 표현하자면 회피는 버린 채, 맨 몸으로 보스와 '맞딜' 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단단한 하벨 세트라도 입어야 맞딜이 되지, 고통 과잉감내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하벨 세트'가 없다. 



2) 자기통제와의 비교

고통 과잉감내력은 때때로 자기통제력과 비교되곤 한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은 '불안 감소'라는 목적성 측면에서 두 개념이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대개 자기통제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불안을 줄이기 위함이다. 하지만 고통 과잉감내력은 불안을 줄이려는 직접적인 목적은 없다.




참으면 병이 된다.

예전에 필자는 참을성이 좋다는 말을 칭찬으로 여겼다. 어린 나이에도 참을성이 많다, 대견하다, 의젓하다는 그런 칭찬이 듣기 좋았어서 더 고통 과잉감내력을 키우기만 했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도 안 하고,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뭐 하고 싶다고 말도 제대로 못 했다.


하지만 계속 참다 보니 속이 곪아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거다. 그리고 나중에는 내가 뭘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 내가 뭘 싫어하는 사람이었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혼란마저 들었다. 그래도 끝끝내 참았다면 모를 텐데, 더 이상 내 몸과 마음이 견딜 수가 없었나 보다. 잘 참다가도 순간 이성이 끊어져 주변에 큰 소리를 치게 되는 나 자신이 무섭고 혐오스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참지 않는다. 왜? 고통을 무조건 감내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피하는 것도 하나의 훌륭한 옵션이다. 가끔 세상을 살다 보면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 마냥, 그것 아니면 큰일 난다는 듯이 그것만 붙잡고 끙끙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힘을 빼도 좋다고. 

때로는 그냥 우회하는 게 더 나은 방법이라고 말이다.

혹은 정 견뎌야 한다면 혼자 말고, 다른 사람과 같이 참든지.





** 참고 논문

김현성, 조현석, 권석만 (2022). 고통 과잉감내력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특성: 인지적 경직성, 완벽주의 및 정서조절 곤란을 중심으로. 한국심리학회지: 임상심리 연구와 실제, 8(4), 747-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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