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열심히 알바를 세 곳을 동시에 뛰며 모았던 등록금, 약 천만 원 정도의 적지 않은 금액을 한순간에 피싱 사기로 잃었을 때의 일입니다. 처음에는 막막했습니다. 대학원에 갈 수 있을지, 아니 아예 진학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컸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 때 대학원 진학 결심을 접었더라면 어쩌면 전보다 더 돈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요. 즉, 돈에 의하여 제가 소중히 여기던 가치나 목표가 가로막혀서는 안된다, 그런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결국 저는 대출을 받아서까지 대학원에 입학했고, 다니는 내내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대출금을 조금씩 갚아나갔습니다. 통계 분석 아르바이트, 과외 아르바이트, 학원 논술 첨삭 아르바이트, 학과 조교 아르바이트 등등 다양한 일을 하며 대출금의 규모를 줄이며 생활비까지 벌 수 있었죠. 등록금이 부족해도 길은 있는 법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삶은 돈을 잃어도 계속 흘러간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게 되었던, 제 인생을 논할 때 결코 빠질 수 없을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한편, 피싱 사기를 당한 직후, 제가 가장 먼저 전화한 사람은 제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는 지체 없이 한걸음에 달려와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저를 일으켜 세워주더군요(종로 YBM 건물 인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근처 은행 ATM에서 제 통장에 0원이 찍히는 걸 보고 말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았었죠). 은행 본점에 함께 가서 피싱 신고를 돕고, 경찰서까지 같이 가주며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습니다.
제가 그 날의 사건으로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돌이켜보면 저는 돈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내가 힘들 때 옆에 있어주는 친구의 존재를 새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어쩌면, 돈보다 더 값진 무언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2) 왜 요즘은 게임이 예전만큼 재미가 없을까?
어렸을 때 저는 게임을 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넉넉한 가정 형편은 아니어서 함부로 게임을 구매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쌈짓돈을 겨우겨우 모아 팩 하나를 몇 천 원 주고 교환해서 조심조심 즐기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게임을 붙잡으면, 그 당시에는 수십, 수백 판을 즐기고 또 즐기는 게 기본이었습니다. 당연하지만 그 당시 게임들은 지금보다 훨씬 품질이 조악했습니다. 구성은 단순했고, 볼륨은 적었으며, 즐길 거리도 그만큼 적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게임보다 더 빨리, 쉽게 질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그래야만 했습니다.
놀랍게도 저는 어른이 되고, 마음대로 게임을 구매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지금, 게임에 더 쉽게 질리는 모습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어렸을 때는, 뭐랄까요, 같이 즐길 수 있는 친구들의 존재가 무척 소중했습니다. 수십, 수백 번 클리어한 게임이더라도 친구네 집에 다 같이 모이거나, 혹은 저희 집에 다 같이 모여서 번갈아 플레이하며 새로운 재미를 발견하는 맛이 쏠쏠했습니다. 친구들과 내기를 하기도 하고, 서로 더 잘하는 부분이 있으면 대신 깨주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던 추억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제 취미는 게임이지만, 이전보다 월등히 발전된 게임들이 쏟아져 나오고, 웬만한 최신 게임기기를 다 갖춘 상태에서 풍족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만큼 게임이 재밌었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습니다. 혼자 하면 재미가 없더라고요. 차라리 게임을 안 즐기는 와이프와 영화를 보든 산책을 가든 다른 뭔가를 '같이' 하는 일이 더 즐겁습니다. 전 여전히 친구들과 같이 게임을 즐기던 그 시절 속에 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같이 즐기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아쉽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값싼 콘텐츠여도 여럿이 즐기면 재미있었고, 아무리 비싼 것, 좋은 것이라도 혼자서만 가지고 놀면 재미가 없었습니다. 이때도 저는 느꼈습니다. 아, 행복에는 비싼 장난감을 다 살 수 있는 경제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저와 함께 즐겨줄 사람들의 존재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요.
전 그래서 켠김에 왕까지 프로그램을 좋아했습니다. 그시절 친구들과 모여 게임을 같이 즐기던 추억이 떠오르거든요
어쩌면, ‘행복’이란 어떤 완벽한 조건이나 풍족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돈을 충분히 벌고, 원하는 모든 물건을 누릴 때 자동으로 행복해질 거라고 여기는 거죠. 물론 요즘은 긍정심리 관련 이야기들이 대중에 많이 퍼진만큼, 적어도 '돈으로 행복을 다 살 수 없다'는 명제는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나 머리로는 이해하는 이야기여도, 여전히 가슴으로는 못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 중 한 사람이고요.
그러나 심리학이나 행복 연구에서 거듭 강조되는 결론은 한결같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버드대학교에서 무려 75년 넘게 진행해온 성인발달연구(Adult Development Study)를 보면, 개인의 행복과 건강을 가장 잘 예측해주는 요소는 바로 ‘돈이나 지위’가 아니라 ‘좋은 인간관계’였다고 하니 말입니다.
사실 제가 피싱 사기를 당한 순간을 떠올려 보면, 이 연구 결과가 조금도 놀랍지 않습니다. 통장 잔고가 순식간에 0원이 되었을 때, 저를 다시 세워준 건 ‘돈’이 아니라 ‘친구’였으니까요. 살면서 이렇게 돈이 중요한 사건을 마주했음에도, 정작 제 삶을 결정적으로 바꾼 건 얼마간의 금액이 아니라, 제 곁에서 함께 울고 웃어준 사람과 그 사람 덕분에 지켜낸 제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돈에 의해 목적이 가로막히는 선례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도 중요했죠.
심리학자들은 이런 과정을 두고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 부르곤 합니다. 큰 어려움을 겪은 뒤에도 개인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힘의 상당 부분은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 즉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에서 나옵니다.
‘누군가와 함께’라는 경험이 주는 행복은, 어릴 때 친구들과 즐기던 게임 속에서도 똑같이 작동했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반복해 해댔던 낡은 게임들이 왜 그렇게 재미있었을까요? 게임의 볼륨이 적고, 그래픽도 단순했지만, 저는 친구들과 같은 화면을 보며 깔깔거리던 그 시간이 더없이 즐거웠습니다. 행복 연구자들이 “경험적 소비(experiential consumption)가 물질적 소비보다 더 지속적인 만족을 준다”고 말하는 것도 이와 맥락이 닿아 있죠. 아무리 값비싼 게임을 혼자서만 즐겨도 금방 질려 버리지만, 별다른 게임이 아니더라도 함께하면 끊임없이 새로운 재미가 피어나는 법이죠. 어떤 친구와, 어떤 게임을, 어떤 시간 속에서 즐기는가에 따라 전혀 새로운 경험이 되기도 했으니, 왜 그토록 어렸을 때의 게임 경험이 재미있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행복이란, 단지 ‘좋은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경험 속에서 피어나는 만족과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돌이켜 보면, 피싱 사기로 돈을 잃고, 그 돈을 만회하기 위해 대학원 시절 내내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저는 “아, 행복은 돈의 유무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게임 기기가 좋아져도, 화려한 그래픽이 쏟아져 나와도, 정작 ‘나와 같이 웃어줄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지 체감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행복이란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순간에도 내가 진짜로 지키고 싶은 가치와, 내 곁에서 함께 웃고 울어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 인생에서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진짜 행복을 찾으려면, 불행을 먼저 맛봐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평소에는 새삼 발견할 틈이 없으니까요.
정리하자면, 행복이란 “돈을 많이 벌거나 물건을 많이 소유해서”가 아니라,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사람들과 의미를 공유할 때” 좀 더 오래, 깊게 지속되는 감정이라는 걸, 저는 과거 경험 회상을 통해 여지 없이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잊지 않는 한, 저에게 닥쳐올 어떤 예기치 못한 상황도, 결국 극복 가능한 도전으로 바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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