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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의집 문지기 Sep 10. 2018

거실 여행

남의집 비전

창업을 하고 한달이 흘렀다. 월급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별다를 게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창업을 하자마자 되려 동굴로 들어갔다. 동분서주하며 나를 알리고 사업을 소개해도 하루가 모자른 시기에 권농동 한옥에 틀어 박혔다.


딴짓이 업이 되니 일로서의 남의집 정체를 고민했고, 내가 남의집으로 만들고 싶은 서비스 경험, 전하고 싶은 가치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남의집에 관심갖고 문의를 주시고, 조언을 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지니 되려 혼란스러워지더라. 덕분에 내 심지가 쥐꼬리만하다는 걸 깨닫고는 그동안 진행해 온 남의집을 되돌아봤다. 브런치에 남겼던 글, 거실에서 찍은 사진 그리고 게스트분들의 후기 등 내가 남긴 남의집의 편린들을 모두 모아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거실여행을 다녀왔네


20개월간 60회의 남의집을 오픈했고, 50명의 호스트분들이 당신의 집 거실을 내어주셨다. 그곳에서 400 여명의 낯선이들을 만났다. 모든 집거실이 내게는 여행지였으며, 집주인은 현지인, 손님들은 나와 같은 이방인였다. 그렇게 여행지의 현지인 집에 이방인들이 모여 앉아 어색했던 사이가 스르륵 풀어지며 하룻밤 부담없이 떠들며 놀다온 것이 내가 경험한 남의집의 총체였다. 이처럼 여행의 프레임으로 남의집을 바라보니 꼬였던 실타레가 술술 풀렸다.


여행지로서의 거실

사람이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는 여러 동인들이 있다. 명소가 궁금해서, 색다른 문화를 경험하려, 친구랑 좋은 추억을 만들려고 등등. 그 외에 내가 주목하는 여행의 목적은 '일상탈출'이다. 어떤 이는 처음 방문하는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인 생경한 경험을 통해 잠시나마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한데 일상탈출이라는 것이 내 주변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해외로, 지방으로 멀리 여행을 떠나 자신을 낯선 상황에 던진다.


만약에 내 주변에서, 몇시간만이라도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방문해서 낯선이들에 둘러쌓인 시공간이 주어진다면 어느 정도 해외 여행으로 누리려 했던 '일상탈출'의 경험을 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해외 여행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금전적, 시간적 비용을 줄일 수 있으니 보다 손쉽게 일상에서 비껴서는 경험을 맛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가성비, 가심비 좋은 여행이 가능한 것인데, 그것을 남의집으로 풀어봄직 하겠다 싶었다.


남이 살고 있는 거실만큼 미지의 공간이 어디 있겠으며, 거기에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거실 한가득 모여 앉아 있다. 이토록 생경한 상황에 더해 '취향'이라는 대화의 마중물까지 모아져 있으니 어색한 듯 하면서도 무언가 말이 통한다. 그렇게 남의집 거실에서의 여행을 통해 잠시 일상을 비껴서게 된다.


남의집 슬램덩크


실제로 남의집이 진행되는 거실의 풍경은 여행지 게스트하우스의 거실과 비슷하다. 게스트하우스 거실에 각국의 투숙객들이 모여 앉아서 하룻밤 재밌게 웃고 떠들며 놀고는 휘리릭 헤어진다. 그러곤 각자 갈 길을 간다. 이와 흡사하게 남의집 거실에 모인 이들도 단 몇시간 집주인의 취향을 마중물로 모여서 각자의 취향을 공감하고 공감받고 헤어진다.


남의집 고수


이 과정에서 꾀나 진솔한 이야기가 오가는데 두가지가 담보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익명성과 느슨함. 익명성부터 얘기하자면, 낯선이들만 모였기 때문에 서로의 백그라운드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취향만 나누면 되기 때문. 덕분에 본인의 이야기를 손쉽게 꺼낸다. '성격은 기득권이다'는 말처럼 낯선 거실에서는 내게 규정된 성격이 없어 자유롭다. 낯설다는 익명성 덕분에 내가 원하는 자아를 꺼내어 실컷 떠들 수 있다.


남의집은 느슨한 관계를 지향한다. 모든 인간 관계가 끈끈한 필요는 없다. 혹자는 으레 인간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일상을 탈출하려 모인 이들을 또다른 집단으로 묶어 버리는 것은 더큰 피로일 수 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사람이기에 부담없이 속내를 꺼낼 수 있도록 남의집은 단발성으로 기획되어 있다.


남의집 보이차
현재의 나로서 이야기하는 시공간

나이가 들면서 또래집단이라는 것이 무색해진다. 각자 다른 길을 가는 또래들과 공감할 이야기를 찾기란 쉽지 않다. 하니 계속 추억팔이만 되풀이한다. 추억팔이도 나름의 순기능이 있겠으나 추억만 곱씹고 돌아오는 길은 헛헛하기 그지없다.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현재의 나는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관심있는 주제로 공감하고 공감받고 싶은 니즈가 있다. 낯선 사람이라도 취향만 맞다면 손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집주인이 내놓은 취향을 중심으로 거실에 모인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건네는 대화를 보며 남의집이 주는 또하나의 가치를 발견했다. 현재의 나로서 이야기 나누는 시공간.


남의집 마그넷


취향이 맞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상당히 난이도가 높다. 한 사람안에도 여러 갈래의 취향이 뒤섞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취향을 하나씩 끄집어 내어 '여기여기 붙어라~' 식으로 모아보면 어떨까? 실제로 남의집 호스트가 발의한 취향에 반응하는 손님들을 보면 '저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게 신기해요!' 혹은 '이런 취향의 사람을 꼭 만나보고 싶었어요' 식이다.


마치 영화 엑스맨의 프로페서X(빠박이 박사)가 전세계 곳곳에 숨어있는 초능력자들을 하나둘씩 찾아내서 '너의 초능력은 큰 쓸모가 있어. 너와 비슷한 아이들이 있는 이곳으로 오렴' 하는 식으로 소환해 내는 식이다. 고수를 먹는 취향, 마그넷을 모으는 취향, 결혼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은 열망 등등 아무리 친한 사이더라도 이야기 나누기 뭐한 주제들로 남의집이 열리고 낯선이들이 모인다. 그래서 난 남의집에 모인 이들을 취향의 엑스맨이라 부른다.


남의집 청첩


이것 역시 여행과 흡사하다. 여행지에서 만난 길동무들은 무언가 통하는 이들이다. 언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오가는 상대들이다. 우선 내가 택한 여행지를 그들도 선택했다는 것에서부터 동질감을 형성한다. 수많은 나라 중 이곳 그리고 이 도시에 여행을 왔다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의 취향이 모아지듯 이 집 거실을 택했다는 것만으로 나와 비슷하리라는 기대감을 갖고 현재의 나를 끄집어 낸다.


남의집 수집과 기록


업의 정의

창업을 한다고 했을 때 "그래서 남의집으로 무얼 할거냐?" 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모임 중심의 커뮤니티 서비스라고 보는 분들도 있고, 집을 활용한 공간 서비스로 확장해 보라는 조언도 받았다. 나 역시 그 사이에서 헤멨다. 한데 이제는 명확해졌다.


남의집으로 여행사업을 할 겁니다.


올 6월에 제주도에서 남의집을 진행한 적이 있다. 남의집으로 방문할 거리의 최대치와 입장료로 지불할 금액의 최고치를 검증해 보고 싶어 기획했는데 정원의 2배가 넘는 인원이 신청을 했다. 모두 서울 거주자들였으며, 신청동기를 보니 실제 제주도에 살고 있는 사람과 그 집이 궁금하단다. 더불어 남의집을 핑계로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분들이 다수였다. 그 때 처음으로 남의집을 여행의 맥락으로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남의집 제주도


안동에서도 남의집을 진행했더랬다. 양갱을 주제로 두 모녀가 호스트를 하고 싶다며 연락을 주셨는데 사실 난 모객에 자신이 없었다. 양갱을 만들러 안동까지 갈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어 호스트분께 "아무도 신청을 안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으신지" 조심스레 여쭈니 "안되면 어쩔 수 없죠" 라고 편히 답해 주셨다. 한데 왠걸 이 역시 정원을 넘겨 선별된 분들만 방문할 수 있었고 모두 서울 거주자들였다.


남의집 양갱


그 후로도 다양한 지역에서 남의집을 호스트하고 싶다는 분들의 연락을 적잖이 받았고, 심지어 해외에 거주중인 한국분이 본인 집에서도 가능하겠냐는 농을 던지기도 했다. 이미 방문하는 분들의 수요가 어느 정도 검증된 상태에서 호스트분들 마저 각지, 각국에서 연락을 주니 여행의 맥락으로 남의집을 성장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는 양평에서 진행하는 남의집이 오픈되어 있다. (신청마감: 9월 14일) 이분들의 호스트 신청서를 보니 '와! 이건 정말 여행이네.'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집과 스토리였다. 엄마와 딸이 함께 그림작업실로 쓰며, 정원을 가꾸고 있는 집이라니. 타이틀도 호스트께서 직접 정해주셨는데 기똥차다. 그림정원!



처음엔 '지방에서도 남의집이 되는구나' 생각을 했다가 바로 고쳐먹었다. 내가 서울에 사니 지방일 뿐, 다른 이에게는 서울이 지방일 수 있다. 그리 생각하니 서울에서 열린 남의집에 방문했던 손님 중에 부산에서 부러 올라오신 분이 떠올랐고, 그분에게도 남의집은 여행이였구나 싶었다. 다른 이의 거실을 여행하러 그 먼거리를 온거다.


남의집 비전

여행으로서 남의집을 어떤 비전으로 성장시켜 나갈지 문장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남의집을 처음 접하는 이들을 위함이라기 보다는 나 스스로 그리고 앞으로 나와 함께 남의집을 만들어 갈 동료들에게 우리 일의 목적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작년에 퍼블리 저자로 참여하여 미국 서부에 위치한 굴지의 기업들 오피스를 방문했었다. 페이스북, 에어비엔비, 아마존, 나이키, 스타벅스 등 총 12개 회사를 방문해 일할 맛 나는 오피스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살펴보았는데 답은 명쾌했다. 회사의 비전이 얼마만큼 직원들에게 잘 전달되고 체화되느냐가 좋은 오피스를 판가름지었다.


이 때 배운 점은 회사의 비전은 되도록 명확하게 명문화해야 유효하다는 것이다. 창조, 혁신, 진취 등의 미사여구가 아닌 진짜 메시지가 담겨야 창업가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의 눈높이도 쉽게 맞출 수 있다. 하여 써내려간 남의집 비전.


집으로 떠나는 여행


처음 방문한 공간에서 낯선이들과 어울리는 여행의 경험을 일상 속 가정집에서 전하기 위해 집으로 떠나는 여행을 만드는 것이 남의집이 하는 일이다.





남의집 비전을 좀더 손쉽게 전달하기 위해 영상을 제작했다. 제작이라 하기엔 멋쩍은 수준이다만 그동안 진행한 남의집 기록들을 묶어다 내가 느끼고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았다. 영상으로 다시 접하니 한집 한집에서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르며 한편의 거실 여행기를 보는 듯 하다.


남의집 소개영상


여름 내내 불가마같던 한옥마당에 가을이 찾아왔다. 요새는 선선해진 한옥마당에서 남의집 설명회를 열고 있다. 남의집 호스트 모집을 위한 사업 설명회인데, 호스트의 역할과 장점 그리고 신청 프로세스 등등을 매주 수요일 오후 8시에 전한다. 이 글을 읽고 내 집 거실을 여행지로 만들어 보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해서 참가 신청을 하시면 문지기가 버선발로 나와 맞이한다.




광야로 나오자마자 고즈넉한 한옥에 자리를 잡게 해준 딴짓 시스터즈 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대들 덕에 창업 후 복잡한 마음을 요래 대청마루에 앉아 달랠 수 있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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