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 속으로
"니꼬 호텔, 꼬넛 플레이스."
나는 공항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군중들 중 가장 젊어 보이는 택시기사에게 말했다.
후덥지근하고 습한 공기, 설명하기 어려운 냄새, 1950년대 영화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택시, 그리고 외국에 있는 5성 호텔에서의 숙박도 나에게는 모두 첫 경험이었다. 인도 지역 전문가의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영어가 제2의 공용어라는 이야기를 분명히 들었지만, 이민국을 빠져나온 이후로는 어떤 영어도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인도로 출장을 갈 수 있냐는 질문에 다들 머뭇거릴 때, 만 스물셋의 호기로움이 대답하며 시작된 여정이었다. 한 30분이나 걸렸을까,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수준으로 도로 노면의 질감을 느꼈다. 시골길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는 충분치 않았다. 고맙게도 택시기사는 달리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불 켜진 곳이 없는 뉴델리의 밤거리를 열심히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작은 차이들을 느껴보려는 노력에도, 공항 인근과 시내를 구분할 수 있을 뿐, 시내에 들어와서는 계속 같은 장면이 반복되었다. 어두운 거리에서 홀로 빛을 내고 있는 호텔에 도착해 로비에 들어서자, 비로소 익숙한 공기가 느껴졌다.
가져온 노트북이 잘 켜지는지, 캐리어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인쇄해 온 설문지가 무사한 지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샤워기 앞에 서니, 너무 금세 떠나온 홍콩에 대한 호기심과 아쉬움이 나를 긴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체크인할 때 받은 랜선을 꼽고, 호텔에 잘 도착했다는 메일을 서울의 프로젝트 매니저에게 서둘러 보냈다. 답장이 오진 않았지만, 인쇄해 온 시간대별 일정표가 있으니 근심할 것은 없었다. 내일은 아침 7:30에 호텔 로비로 날 찾아오신 박 사장님을 만나면 된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들뜸이 있는 걸까? 짐을 정리하고 집보다도 더 넓고 하얀 침대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TV 채널을 돌리는데 이국적이고 어색한 음악과 군무가 있는 프로그램들만 계속 나왔다. 검은 터번을 쓴 사람이 나오는 뉴스가 있기는 했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고, 계속 채널을 넘기다 보니 겨우 BBC가 나왔다. 사실 한국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방송이지만, 아는 단어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2~3분쯤 봤을까, 뭄바이에 무슨 문제가 터졌다고 하는 것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 영어 실력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호기롭게 출장을 오겠다고 한 것인지 걱정이 시작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 영어 실력의 문제를 느꼈다면 부정하고 싶은 진실 정도였겠지만, 이곳에서는 당장 내일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일을 그르치지는 않을지 정말 큰 걱정이 앞섰다.
늘어가는 근심에 뉴스는 더욱 들리지 않게 되었다. TV소리를 줄이고 어두운 월넛 책상에 앉아, 조사/분석 질문 목록과 일정표가 인쇄되어 있는 종이 다발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여독이 있었나 보다. 분명히 서류를 보기 시작했는데 아차 싶은 마음에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두 페이지도 다 못 보고 잠든 것이 분명하다. 저 좋은 침대를 두고 책상에 엎드려 잔 것을 후회했다. 호텔시계는 아침 7:10을 가리키고 있었다. 빠르게 샤워와 면도를 하고 베이지색 면바지와 줄무늬가 있는 흰색 반팔 셔츠를 입었다. 일정표, 노트와 필기구, 디지털카메라와 지갑, 여권을 챙기고 손목시계를 호텔 시계와 같도록 오전 7:25로 맞추고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탔다.
캐리어를 두 개나 끌며 지친 몸으로 체크인을 할 때는 제대로 못 봤는데, 아침에 보니 호텔 로비가 제법 넓었다. 와인색 긴 소파에 앉아있는 홀로 앉아있는 한국인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보다 적어도 스무 살은 더 연배가 있어 보이는 분이었다.
"안녕하세요, 박 사장님 되시나요? 저는 한국에서 온 김상도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아이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친절한 어조였지만, 위아래로 나를 서너 번은 훑는 눈빛으로 볼 때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아마도, 서울 오피스의 인도 전문가가 현지 가이드인 박 사장님에게 브리핑을 해줄 때, 내 나이를 말해주지 않았나 보다. 젊어야 30대 중반 정도의 사람을 기대했을 것이다.
"어떻게, 아침 식사는 하셨나요?"
"제가 시차 때문인지 늦잠을 자서 방금 전에 일어났습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아서 괜찮을 것 같아요."
"돌아다니면서 현지 음식도 제가 권하고 그럴 텐데, 입에 맞지 않거나 탈 나기가 쉬워요. 점심시간 지나면 저녁 장사 시작하기 전에 쉬는 곳도 많고 그래서, 먹고 나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마침 저도 안 먹었으니, 같이 드시면서 얘기하고 출발할까요?"
숙박에 포함된 조식은 한 명분뿐이었다. 나중에 한 명분을 더 결제하기로 같이 조식 뷔페에 자리를 잡았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덕분에 세종호텔 뷔페에 한 번 가 본 적은 있었지만, 제대로 호텔 조식을 먹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오늘, 아니 이 출장의 전체 일정계획을 이야기하는데 중심을 둬야 하는데, 조식 뷔페에 눈이 팔린 나는 한 바퀴를 다 돌고 나서야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자리에 앉자 서버가 와서 블랙커피 두 잔을 따라 주었다.
호텔에서도 처음 보는 종류의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고, "컨티넨탈 푸드"를 먹어야 한다는 대표 파트너의 이야기를 기억하던 내가 모든 음식을 다 살펴보고 가져온 것은 베이컨, 소시지, 계란 프라이뿐이었다. 베이컨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운을 떼었다.
"오늘 저희가 가볼 곳은 모두 어레인지가 되었나요?"
"뭐, 어레인지랄게 따로 없습니다. 아, 차는 세단으로 요청받았는데 도요타 SUV가 준비되었어요."
쉽게 YES를 들을 질문을 하나 던져 대화를 열었는데, 기습적으로 두 방을 맞았다. 내가 어려 보이는 탓인가? 뭐라고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좋을지 생각해야 했다. 베이컨을 다 씹어 삼키기도 전에 커피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당황한 탓에 들이킨 커피로 입안에는 생소한 조합이 또 생겼는데, 베이컨의 짠맛은 급격히 낮아지고 단맛과 고소한 맛이 대단한 풍미를 이뤘다.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갈지와 이 맛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머릿속에 소용돌이를 만들자, 어느새 몇 초 정도가 지났나 보다.
"엠포리움은 그냥 상가니까 따로 어레인지 할 것 없이 가서 보면 돼요. 주로 현지 물건이 많습니다. 도로 상황이 서울과는 달라서, 세단은 렉서스나 벤츠가 아니면 멀미가 많이 날 거예요. 도요타 SUV가 낫습니다. 제가 예전에 아프리카에서 다닐 때도 도요타 SUV를 타고 다녔어요."
"아, 네... 내일이나 모레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지만, 진솔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약속된 계획과 왜 다른 지 따져 물으려던 생각은 조금 누그러들었다. 내일 오전에는 델리대학교 박사과정에 있는 친구를 만나서, 조사보고서를 요청하고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오후에는 네루대학교 한국어학과 친구들을 여럿 호텔로 불러서 인쇄해 온 설문지를 나눠주고 정해준 장소에서 모레부터 설문을 받게 한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 앞에 대기하고 있던 SUV를 타고 엠포리움을 향했다. 차에 타자마자 엠포리엄을 향해 출발했다. 나는 지도와 리서치 계획을 펼쳐서 다시 한번 읽기 시작했다. 정적을 깨고 첫 번째 교차로에서 박 사장님이 기사에게 "자르우 짤루"라고 외쳤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직진하자는 뜻이란다.
그래, 덜커덕거려도 인생 직진이지. 어디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한 번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