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맥케이(George Mackay)(2)
*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더 시크릿 하우스(Marrowbone)>(2017, 감독: 세르지오. G. 산체즈)
<웨어 핸즈 터치(Where Hands Touch)>(2018, 감독: 암마 아산티)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의 작품 둘에서 조지 맥케이는, 역시 소년과 어른의 경계에 있으나, 처음부터 명확히 판단하기는 힘든, 어두운 비밀이나 폭력성을 지니고 있는 역할을 맡아 다른 종류의 얼굴을 드러내기도 했다. 허나 납득할 만한 원인이 있는 어둠이거나(잭), 스스로 깨닫고 버리는 폭력성이어서(루츠), 결국 관객이 이입하거나 적어도 이해할 수 있는 선에 있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온통 고통받고 요동쳤다. 조지 맥케이는 더 깊어진 특유의 흔들림에, 각 인물이 겪는 종류의 혼란에 걸맞게 색을 입혔다.
아늑하고 따스한 조명, ‘우리의 이야기’를 쓰는 잭 매로우본의 얼굴로 <Marrowbone>(2017)은 시작된다. 안도감을 주는 편안한 미소를 띠고 있다. ‘호러, 스릴러’ 장르에서 종종 쓰이는 방법이다. 관객을 방심하게 만들고 난 후 분위기 반전을 노린다. 연출과 연기 모두 적당히 효과적이었다. 안정된 톤의 나레이션은 나직하고 듣기 편해,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긴장을 풀게 된다. 잭 매로우본은 (또) 첫째다. 조지 맥케이는 보와 에디에게 모두 있는 독립적이고 ‘첫째 같은’ 면에 즐거움과 생기를 좀 덜어냈다. 보가 짓던 고민의 표정은 어둡고 혼란스럽고 비밀스러운 방향으로 틀고, 에디의 로맨틱함에 불안정한 그늘을 깔았다.
잭의 온몸엔 엄마가 죽으며 남긴 유언대로, 동생들을 지키고 이끌어야 한다는 강박이 가득하다. 동생들에게 ‘우린 하나다’라는 말을 따라 하라고 이르는 표정은 절박하게 단호하다. 약간 맹목적이기도 하다. 믿음직스럽고, 차분하지만, 어딘가 불안하다. 지쳐 있다. 특히 이마에 상처가 생긴 후로는, 자주 그곳을 짚거나 긁으며 인상을 찌푸린다. ‘상자에 담긴 돈’에 대해 제인과 빌리의 의견이 갈리자, 가운데에 낀 잭의 얼굴은 가늘게 요동친다. 동생들이 온통 자기만 보고 있다. 결정을 내리지만, 결심한 얼굴은 아니다. 망설임이 남아 있다. 허나 상황이 급해지자, 긴박한 긴장만 남는다. 포터를 대할 때는 애써 차분한 척, 일그러지고 굳은 미소가 떠오른다. 탁한 화면, 음악, 연출이 기본이었으나, 내내 차오르는 숨, 떨리는 눈, 인상, 어정쩡한 자세 등으로 잭의 심리를 드러내는, 또 그러한 제스처들이 타고난 성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과 상태 때문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조지 맥케이의 연기가, 긴장감을 배로 높였다.
포터가 돌아간 후 저녁, 마음을 놓은 매로우본 남매들은 들떠 즐거워하고, 잭은 재미난 일화를 들려주듯 상황을 과장해 늘어놓는다. 잘난 척 영웅 대접을 받고 싶은 것 같지는 않다. 안도감에 흥분해서, 동생들을 웃게 만들고 함께 웃으며 긴장을 마저 푸는 것이다. 장난스럽게 눈알을 굴리며 신나게 노는데, 어쩐지 필사적이다. 무언가를 망각하기 위함인 듯하다. 약간의 불안만 끼어들면 곧 사그라들 즐거움이다. 이후에도 요새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샘을 달래는 진지하고 자상한 얼굴, 샘과 창가에 걸터앉아 앨리에게 모스 부호를 보내며 해맑게 즐거워하는 얼굴들 사이에 정체 모를 그늘이 섞여 있다.
언성을 높이는 빌리에게 잭은 문을 잡고 나가라고 외친다. 눈을 맞추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톤을 마주 높이기보단 낮게 힘을 줘 소리를 키운다. 화를 억누르고 효율적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빨리 상황에서 벗어나 혼자 있기 위함이다. 욕조에 잠겨 눈을 뜨고 있을 땐, 창백하고 영혼이 없는 듯 멍해, 수면으로 올라오는 공기방울이 아니라면 시체로 착각할 듯하다. 동생들이나 앨리와 함께 일상을 보낼 때는 잊었다가, 이렇게 부딪히는 순간, 혹은 혼자 있을 때는 갑자기 영원한 어둠으로 잠기는 것 같다.
앨리가 아버지에 대해 물으면 시선을 피하고, 저 깊은 곳으로 들어간 듯한 표정으로 간결하게 대꾸한다. 목소리는 탁하다. ‘그는 이제 우릴 해치지 못해’, ‘절대 거기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는, 잭이 동생들 혹은 앨리를 향해 하는 대사지만, 반복될 때마다 점점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처럼 들린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허공을 향한 눈을 멍하게 뜨곤, 아주 가만히 서서, 낮게 입속으로 중얼거리듯 뱉는다. 빌리가 굴뚝에 들어갔다가 죽지 않은 아버지에게 죽을 뻔하고 돌아오자, 잭은 정신이 나간다. ‘그는 이제 우릴 해치지 못해’라는 주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상황, 통제할 수 없이 겁먹고 혼란스러워한다. 벽에 머리를 대고, 얼굴에 핏줄을 세우고, 중얼거리고 울먹인다. 마치 다른 사람 같다. 조지 맥케이는 사이사이 보여줬던 불안정한 상태가 잭을 모조리 차지하게 만든다. 결국 쓰러져 발작하기까지,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숨을 죽였다.
앨리에게 전해진 ‘우리의 이야기’를 통해 비밀이 밝혀지고, 관객은 동생들의 죽음 후 잭이 다중인격을 만들어냈음을 알게 된다. 그 어둠의 복선이 연출에만 있지 않았다는 것을 또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드러나는 당시 상황, 이제까지 절망을 감추고 숨기는 얼굴을 쌓아 놓았던 조지 맥케이가, 이번에는 절망을 끝까지 표출하는 연기를 펼친다. 아버지에게 맞아 쓰러졌다가 정신을 차린 후, 동생들의 이름을 부르며 휘청휘청 집으로 들어간 잭은 다락방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잠깐 상황 파악을 하는 듯 눈을 굴리다, 절규한다. 입이 크게 벌어진 채 일그러지고 목소리가 새되게 까진다. 진정한 후, 요새 앞에 앉아 자살을 준비한다. 몸은 기능하고 있으나 영혼은 빠져나간 얼굴, 목은 쉬어 있다. 입에 총을 넣고 당기려다, 제인의 노랫소리를 듣고 눈이 커다래져선 옆을 돌아본다. 당연히 마음 한구석에선,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슬픔이 눌러버린다.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벅찬 미소를 짓고, 쉰 목소리로 과거는 잊으라고 말하고, 동생들을 비추지 않는 거울을 깨고, 치우고, 가리고, 하는 내내, 정신 한쪽을 어디 흘렸거나 마음속에 꼭꼭 가둬 둔 듯 멍한 구석이 보인다. 조지 맥케이는 자신의 연기에 감탄할 겨를을 주지 않고, 관객을 잭의 내면으로 몰아넣는다.
편지를 읽고 달려온 앨리는, 동생들을 흉내 내는 잭을 목격한다. 목소리 특징을 잘 잡아내, 왔다 갔다 자리를 옮기며 각각을 연기한다. 아니, 잭 입장에선 연기라는 것을 잊고 있는 상태이므로, 진짜다. 그 순간, 조지 맥케이는 빌리, 제인, 샘인 동시에 자아를 잃은 잭이어야 한다. 제인의 목소리로, “We need you to take care of Jack.”이라고 하는 얼굴은 진지한데, 태연하고 차분하다. 그 문장은 제인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 상태가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든다. 앨리가 얼굴을 쓰다듬자, 잠시 멍하게 있다가 흠칫 놀라며 얼굴을 돌리곤, 정신이 팟 돌아온 듯 인상을 쓰며, 잭이 튀어나온다. ‘네가 있으면 다 사라진다’고 다급하게 혼란스러워한다. 동생들의 이름을 부르다, 앨리가 상처를 들추자 정신없는 와중 반사적으로 ‘아’ 하고 얼굴을 찡그린다. 그냥 고통의 신음소리가 아니라, 의식하지 않고 있던 아픔이 무의식적으로 다가온 듯한 ‘아’ 였는데-왜냐면 상처 입은 건 빌리지 잭이 아니었으니까- 내 필력이 조지 맥케이의 연기력에 훨씬 못 미쳐 이렇게 밖에 적지 못해 안타깝다. 몸을 굽히고 고개를 돌리고 손을 올렸다 내렸다 울먹였다가 간절하게 응시했다가 인상을 쓰며 가라고 하기를 반복한다.(이런 묘사들이 별 의미 없이 느껴진다. 모두가 조지 맥케이의 연기를 목격했으면 한다.) 입을 쭉 내밀며 “Leave us alone!”이라고 외칠 때는, 부자연스럽게 꽉 힘을 주어 소리를 속에 쥐고 있는 것 같이 들린다. 앨리가 쫓겨나듯 자리를 뜨고, 그녀의 발소리를 듣다가, 고개를 돌린 잭은 눈을 꽉 감으며 견딜 수 없는 듯 눈물을 흘린다.
마침내 빌리인 채로 앨리를 구한 잭은, 굴뚝 방을 천천히 둘러본다. 처음엔 멍함이 지배적이다가, 동생들의 시신에 시선이 한동안 머물며 깊은 고통이 묻어난다. 턱선 근처의 주름이 두드러진다. 앨리의 손에 얼굴을 맡기고, 정신이 돌아온 듯 슬프게 눈을 내린다. 앨리가 껴안자, 아픔을 참는 신음 소리를 ‘아오’ 하고 뱉으며 얼굴을 찡그린다. 그 속에 이제까지 쌓아 둔 마음의 고통 중 일부를 담아 내보내는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고 잭은 회복한다. 전쟁을 겪은 후 에디의 무기력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역시 희망은 보이고, 그것을 드러내는 건 물론 조지 맥케이의 얼굴이다. 앨리가 선물한 액자에 비친 자신을 똑바로 응시한다. 해맑게 씩 웃는다. 결국 잭이 절망을 마주하고 헤쳐나가도록 도운 건 사랑이었다. 왜 아니었겠나, 앨리를 대할 때만큼은, 상대 만을 똑바로 바라봤었다. 세상에 남은 유일한 존재인 듯 그녀를 뚫어져라 보는 얼굴에서는, 데이지를 대하던 에디의 로맨틱함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언급한 작품마다 그는 사랑에 푹 빠졌었다.
<웨어 핸즈 터치>(2018)의 루츠도 그중 하나다. 어머니의 기억을 딛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조국을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에, 나치 청년 당원 활동에 힘을 쏟는 루츠. 레이나를 만나고, 실제로 수용소를 겪으며 점차 진실을 보게 된다. 자신의 조국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저지르는 폭력에 고통스러워한다. 맹목적으로 시키는 것을 하는 군인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며 시야가 넓어지고 문제를 깨닫는 청년이다.
나치 문양이 선명한 제복을 입은 그는, 괜히 상상했던 ‘히틀러 유겐트’의 전형은 아니었다. 생기 혹은 광기가 도는 강렬한 눈빛은 없었다. 창백했고, 머뭇거렸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레이나와 부딪히자, 상대가 한눈에 진심을 알아챌 정도로 미안해한다. 처음 제대로 말을 나눌 때는, 긴장해 어깨는 뻣뻣하고 입가는 굳어 서, 똑바로 바라본다-기 보다는 눈을 떼지 못한다. 어색하게 말을 잇는다. 경직돼 있던 뺨에 미소가 사악 번지자, 제복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루츠에게 레이나는, 어쩌면 처음엔 대상화된 이미지에 대한 동경, 호기심 등에서 비롯된, 한때의 예쁜 비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허나 점차 뚜렷한 사랑의 형태를 갖춘다. 에디와 같은 매너를 두르려고 노력하지만, 보처럼 처음 겪는 감정에 숨이 막혀한다. 레이나가 춥다고 하니 손을 꼭 쥐고 자기 가슴에 대는데, 본인이 더 떨고 있다. 천천히 눈을 맞추고 키스한다. 전혀 능숙하지 않다. 끝난 후엔 레이나 어깨에 머리를 묻고는 숨을 몰아쉰다. 이후 그의 집에서 섹스할 때도 비슷하다. 함께 누워, ‘전에 이런 거 해 봤냐’고 레이나가 묻자, ‘몇 년 전에’라고 짐짓 아무렇지 않게 답한다. 레이나도 관객도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다. 조지 맥케이가 온몸으로 ‘오 이런 느낌 처음이야’를 잔뜩 드러내 줬기 때문이다.
나치 친위대가 마을을 들쑤시자, 루츠는 레이나에게 서둘러 다가가 자기 스카프를 씌우고는 급한 대로 집에 데려온다-데려오기는 했는데, 다음에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앉아’. ‘뭐 먹을래’ 등등 말을 걸지만, 표정은 긴장해 화난 듯 얼어 있다. 입은 어색하게 우그러지고, 고개는 똑바로 두지도 돌리지도 못해 어정쩡하다. 레이나가 고맙다고 하자 정말로 의문인 얼굴로, “What for?”이라 묻고, ‘친구가 돼 줘서’라는 답에, 얼굴 근육은 다 굳어 있는데 기분이 좋아 웃음이 풀어져 나오는 듯 입을 살짝 움직인다. 시간을 보낸 후, 집에 들어가기 전, 레이나가 다시 한번, ‘전에 그거 해본 적 있냐’고 묻자, 이번엔 망설임 없이 ‘no’라고 바보같이 고갤 흔들고는 쑥스럽고 해맑게 웃는다. 반지를 던져주고는 또 웃는다. 자꾸 웃는다. 세상에 둘 밖에 없는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절대 섹시하거나 멋져 보이지는 않는데,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할 겨를도 없는 그 떨림의 진심이, 뼛속까지 설레게 만든다.
베를린에서 그는 안정되고 중심이 잡혀 있었다. 레이나와의 사랑은 신념과는 별개였다. 전쟁을 겪지 않은 그가, 조국과 전쟁을 말할 때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당연히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둥, 유대인을 치운다는 둥의 말을 막힘없이 늘어놓았다. 그러나 꼭 외운 말을 읊는 듯, 태연한데, 부자연스러웠다. 수용소에서 루츠는 이제 열정을 바친 조국이 사랑하는 사람을 해하는 상황에 처해 불안해한다. 문제를 뚜렷하게 인식했다기보단, 감정적 심리적으로 견딜 수 없는 상태에서 출발해, 깨달아 가는 중이다. 이제까지 지켜왔던 것의 의미를 잃었고, 이제 그것이 하나 남은 삶의 의미를 앗아갈까 두려워한다.
초반 루츠가 노래하는 장면이 한 번 나온다. 레이나를 보고 미소 지으며, 나직하게 재즈를 부른다. 끝이 약간 떨리지만, 톤이 익숙하게 안정돼 있다. 후에 한 번 더, 노래하는 모습이 잡힌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출발한 트럭에 앉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나직하기보다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린다. 노랫말을 울음 대신에 뱉는 것 같다. 레이나를 만난 루츠의 얼굴은 움찔거린다. 벅차고 안타까워 복잡한데, 들키면 안 되므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둘러댄다. 내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얼굴이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둘만 있을 때는 툭 치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Let me hold you.” 루츠는 레이나에게 애원한다. 목소리는 울먹임 때문에 꽉 막혀 있다. 사랑 때문 만은 아니다. 그의 세상이 흔들리는 시기, 아버지조차 의지하기 힘들고, 스스로 가해자라는 죄책감도 더해져 정신이 나가려는 순간, 마지막으로 남은 존재가 레이나다. 거절당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레이나를 끌어안으며, 그는 비로소 안도한다. 음식은 루츠가 레이나에게 주지만, 오히려 갇혀 끔찍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레이나가, 루츠에게 의지가 된다. 두려워하고 있는 건, ‘내가 두렵냐’고 묻는 루츠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며, 루츠는 잔뜩 사색이 돼서 돌아다닌다. 레이나의 친구를 쏘라는 명령을 받고, 이어 총구가 레이나를 향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과 맞닥뜨린다. 긴장이 풀리고 난 두려움을 다른 수용자에게 겨누며 푼다. ‘네가 걜 쐈다면 난 네가 뭔지 알 수 있었을 텐데’라는 레이나의 말에, 목이 잔뜩 꽉 막혀선 이마를 만지고 울음을 내뱉는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온통 찡그린다. 계속 말하면서 계속 찡그리고 계속 울고 두려움과 사랑을 잔뜩 드러낸다. 어쩔 줄 모른다. 멋있어 보이려는 욕심이 하나도 없어서 가능한 얼굴이다. 조지 맥케이가 가득 드러낸, 후회와 무기력과 공포와 고통, 그 모든 것이 복합된, 결국 사랑으로 귀결되는 그 울음은, 그가 나치 당원으로서 저지른 죄를 면해 주진 못했으나, ‘루츠가 뭔지’ 알려 주기에는 충분했다.
사실 <웨어 핸즈 터치>는, 개봉하기도 전 비난을 마주했던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만듦새가 아주 깔끔하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았고, 취향도 아니었다. 그러나 말하려는 바는 알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와닿았다. 두 젊은 주연 배우의 연기 덕이었다. 조지 맥케이가 보여 준 루츠는, ‘히틀러 유겐트’이기 전에 사랑에 빠진 한 사람, 약하고 뭘 잘 모르지만 사랑 앞에 용기를 내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작정 한 관점에서 인물에 대한 이해를 강요하지 않고, 면면을 드러내며 일부분을 설득했다. ‘인디펜던트Independent’와의 인터뷰에서는 작품과 이를 둘러싼 논란에 대한 스탠스를 분명히 드러내기도 하는데……..아니 그게……인용할 수밖에 없었다.
“나치는 인간이었어. 나치는 다른 ‘종’의 사람이 아니야. 우린 나치를 우리와 같다고 보는 아이디어로부터 떨어져 있었어, 왜냐면 ‘그들이 우리와 같다’는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당신이나 내가 나치라고 말하는 게 아니야. 그러나 모든 건 같은 (종류의) 뇌로부터 온 거야. 사고를 왜곡하는 건 인간의 생각이야. 그들은 단지 특정 옷을 입고 특정 팻말 아래 걷는 인간일 뿐이야,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 똑같아.”
“나치가 되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 자신의 나라를 다시 정의하는 것, 항상 그곳에 있었던 소유권을 가져가는 건, 무서울 정도로 연관돼 있다는 기분이 들어. 그냥 어림짐작일 뿐이야, ………….우리는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이고, 항상 어떤 상황에 있었는가를 다시 판단하도록 압박을 받고 있어. 특히 이 산업에서, 대표자의 형태에 있어서, 유색인종, 젠더나 섹슈얼리티 사이의 평등에 있어서. 난 우리가 그다지 편견에 둘러싸여 있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여러 회사의 정상에, 심지어는 이야기들에 얼마나 많은 ‘white bloke백인 남성’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오 젠장, 난 불균형이 있다는 걸 몰랐어, 왜냐면 그 불균형이 나를 먹여 살리고 있었거든’하게 될 거야.”
[George Mackay, Independent interview]
<웨어 핸즈 터치>가 ‘나치를 인간화humanising Nazis’했다고 비난하는 목소리에 대해, 그는 ‘나치는 인간이었다Nazis were humans’고 대응한다. 스스로 말하듯 당연히, 그는 나치를 옹호하는 게 아니며, 오히려 본질을 바로 보고 있다. 현재와 연결해 프리빌리지privilege를 돌아보는 깊이까지 들어간다. 범죄자를 악마화하면서, 모든 백인을/남성을/(기득권층을) 일반화하지 말라고 하는 전형적 태도의 정 반대에 위치한다.
이처럼 그는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변화를 향한 움직임의 한 부분이 되고자 노력한다. 고민과 선택으로 길을 만들어 나간다. “배우가 출연할 영화를 정하는 것은, 가치관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전에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에 대한 글에 썼던 말이다. 조지 맥케이는, 그 의미를 확실히 드러낸다.
지금 맥케이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콜린 퍼스를 포함한 출연진과 함께 샘 멘데스가 감독한 세계 1차 대전 영화를 찍는 중이다. 그러나 그전에, 그는 말한다. 그의 최근 다섯 작품은 여성이 감독한 것이라고. 그중 하나는 클레어 맥카시의 <오필리아>- 스타워즈 시리즈의 데이지 리들리 주연의, 햄릿을 다시 그린 작품이다. 맥케이가 맡은 역은 햄릿, 원래라면 무대의 중심에 있었을 역할이지만, 이번 작품의 포커스는 셰익스피어 원작에서 매우 홀대받았던 비련의 헤로인에게 있다. [Independent]
“우린 어떤 것에 대한 말,을 말할 수 있어. 그리고, ‘그래 나 완전 평등을 위해 뭔가 하고 있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 태도는 종종 ‘알았어, 그건 내가 덜 가져야 한다는 뜻이지’ 보단 ‘여기로 올라와서 정상에서 만나’가 되곤 해. and you have to level with that. 내 생각엔, 비록 너무 늦었을지라도, 앞으로 나아갈 추진력을 격려해야 할 것 같아. 글세, 엿 먹으라지. 계속 나아가자,라고.”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매몰되곤 해. 왜냐면 안전하니까, 그러나 사실 다른 관점에 대해 들어봄으로써 발전하는 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무서운 일이 아니야. 난 그게 아마 가장 간단한 방법일 거라고 생각해. 세상에 대한 자신의 직관적 이해 바깥의 것들을 배우는 데에서 얼마나 큰 기쁨이 오는데!”
[George Mackay, Independent interview]
기술과 경력을 쌓는 데에만 힘쓰지 않고, 일과 삶 모두에서 배우고 변화하는 데에 할애하고 있는 에너지가 그의 말 가득 느껴졌다. 그 노력을 과시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도. 그의 선택, 그리고 연기에서 느껴지는 새로움은 이와 관련 없지 않을 것 같다. 셋 다 동생들을 잘 챙기는 첫째이더라도 각기 다른 ‘첫째 같음’이 있었고, 넷 다 사랑에 푹 빠지더라도 감정의 색이 다 달랐다. 전형의 늪에 빠지기 쉬운 설정들을, 조지 맥케이는 능숙하게 소화하며 탁월하게 깨부쉈다, 뛰어난 집중력과 섬세한 공감력으로, 소년과 어른의 경계에서.
특정 연령대의 특정 배우이기 때문에 가능한 분위기와 연기가 있다. 티모시 살라메의 특별한 사랑스러움, 아론 테일러 존슨의 불안한 능숙함 (나열하면 끝도 없겠다). 십 대 후반을 연기했던 그들의 분위기는 몇 년 사이 다양한 역할을 맡으며 풍부해지고 달라졌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시절의 킬리언 머피가 지금과는 달랐던 것처럼. 다시, 조지 맥케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긴 얼굴, 커다란 눈 밑의 그늘, 창백한 피부, 해맑게 씩 웃는 순간 또 달라지는 인상. ‘첫째 같다’고 글문을 열었으나, 가능성이 상당하다. 앞으로가 기대된다, 는 너무 흔한 말이지만, 어쩔 수 없이 써야겠다. 정말 그러하니까.
<1917>(2019) 개봉 기념으로 시작한 글이었으나, 이제 그건 아무래도 좋아졌다. 아마 <덩케르크>(2017)에서 핀 화이트헤드의 위치에 있지 않을까 짐작되는데- 전쟁을 솔직하게 담아낼 눈의 주인을 조지 맥케이로 정한 것은, 영화를 보지 않고도 탁월한 선택으로 보인다. 아래 부분은 인용한 인터뷰의 도입부지만, 조지 맥케이라는 배우, 아니 사람의 매력과 진중함이 담뿍 담겨 있기에 마무리로 넣는다. 특유의 흔들림과 곧음이, 흔들리기 때문에 곧게 나아가는 그의 방향이.
“나는 관심을 받았… 아니 관심받지 않았어. 이건 잘난 척하는 소리야. (다시) 난 얼마나 많은 문이 내 앞에 열려 있었는지 몰랐어… 아니야. 이건 또 내가 무슨 자격이 있는 것 같이 들리잖아. (다시) 내가 사람들로부터 받은 가장 깊은 교훈은,…. 아아아 이거 어렵다! ‘다르다’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야. 왜냐면 포인트가 그렇지 않다는 데에 있거든, 우리 모두는 그냥 사람이라는 거. 만약 우리가 좀 더…… 아 미안, 나 진짜로 이거 적절하게 똑바로 말하고 싶거든.”
[George Mackay, Independent interview]
* 참고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