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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Apr 03. 2020

지금의, 제이미 벨 (1)

제이미 벨(Jamie Bell) (1)



<설국열차(Snowpiercer)>(2013, 감독: 봉준호)
<필스(Filth)>(2013, 감독: 존 S. 베어드)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핵심적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Feat. <빌리 엘리어트>(2000), <할람 포>(2007), <킹콩>(2005), <님포매니악>(2013), <턴>(AMC)


20년쯤 전이다. <빌리 엘리어트>(2000)가 필름에 담기고, 온 세상이 빌리와 사랑에 빠진 것이. 모두 이 ‘천재 소년’이 누군지 궁금해했다. 빌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고맙게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줬고, 특히 최근의 연기들은, 안 쓸 수 없는 무언가였다.

제이미 벨. 시원한 이목구비, 크지 않은 키에 탄탄한 느낌의 체형, 짧은 헤어가 잘 어울리는 배우다. 탁하고 발성이 곧은 목소리 때문에 더 단단하고 강한 이미지를 주는데, 다채롭게 변하는 눈빛의 반짝임 때문에 몹시 여린 분위기가 들기도 한다. 흔하지 않다. 그의 커리어 또한 그렇다. 글에서 자세히 묘사할 네 작품 외에, 본 것들만 몇 언급해본다. <할람 포>(2007)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연애를 하는 상처 가득한 십 대 소년을 연기했었고, 앞서 <킹콩>(2005)에서는 ‘제이미벨스러운’ 캐릭터로 애드리언 브로디 곁을 지켰다. 라스 폰 트리에의 <님포매니악>(2013)에서는 마조히스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미스터리한 남자의 얼굴이었고, (본인은 영국 출신인데) 미국 독립운동 스파이 조직 드라마 <턴>(AMC)의 주연으로 사랑받기도 했다. 아예 비주류는 또 아닌데, 약간 주류에서 벗어나 있달까. 항상 작품의 중심에 있지는 않지만, 어느 이야기에서건 자기 자리를 정확히 찾아 ‘자연스럽다’는 말이 무색하도록 녹아든다.



<설국열차>(2013)


제이미 벨을 처음 본 것은 <빌리 엘리어트>에서였으나, 그의 작품들을 찾아보게 된 계기는, <설국열차>(2013)였다. 꼭, 다른 타임라인의 제이미 벨 같았던 에드가. 어깨와 목을 약간 숙이고, 전체적으로 몸을 벌려 균형을 잡은 채 눈을 들어 주위를 살피며 민첩하게 돌아다닌다. 어떤 상황에도 재빠르게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다. 열차 꼬리칸에서 자란 그의 몸엔, ‘생존’이 가득하다. 허나 그것만 남지는 않았다. 윤리는 없고 규칙만 존재하는 곳에서, 자신보다 더 약한 이들이 당하는 폭력에 분노한다. 검게 얼룩진 뺨 때문에 더 두드러지는 눈은, 살아남기 위해 번뜩이다가도, 순수하게 반짝인다.

가볍고 다혈질이고 성질이 급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겠는데, 철없는 애 같아서 정이 간다. 참을성 없이 투덜거리고 산만하게 움직인다. 몸이랑 입을 가만히 두지 못한다. 커티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핀잔을 듣고 꼬리를 내리면서도, 절대 기죽지 않는다. 길리엄과의 대화를 엿듣다가 갑자기 훅 끼어든다. 우러러보면서도 편하게 대하고, 스스럼없이 말과 제스처를 툭툭 던지기 때문에 상대도 관객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선을 맘대로 넘나들기 때문에 오히려 ‘선’은 넘지 않는다. 약간 성가시지만 미워할 수 없고, 아주 믿음직스럽지는 않지만 의심스럽지도 않다. 차분하고 진중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며 ‘큰 그림’을 보는 커티스와 비교되며, 오히려 더 ‘선한’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커티스와 에드가를 표현하는 크리스 에반스와 제이미 벨의 안정적인 연기는 서로의 매력을 돋보이게 했다.


<설국열차>(2013)

 
진지하게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극에 자잘한 활기를 불어넣는 캐릭터다. 드럼통을 타고 장난치는 뒷모습, 못 참겠다는 듯이 눈알을 위로 굴리는 장면, 햇빛을 처음 보고는 눈을 찡그리고 가리면서도 상쾌하게 씩 웃고, 프로틴 블록을 보자마자 입에 욱여넣는 등, 지나가듯 잡히는 모습들은 몹시도 자연스러워, 주목하지 않으면 딱히 시선을 끌지 않는다. 허나 우연히 목격하는 순간 푹 빠져들게 된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남궁민수를 보고 급히 소리 지르며 욕을 중얼거리는 에드가를 보면, 잠깐 긴장이 풀어진다. 에드가는 처음부터, 그를 맘에 안 들어했다. 비꼬며 분을 터트린다. 쭈그리고 앉아 턱을 쳐들고 눈에 힘을 팍 주고, 코를 찡그리고, 언성을 높인다. 웃음기 없이 시비를 거는데, 느긋하게 대충 맞받아치는 남궁민수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갈등이 발생하려다 만다. 물론 본인은 심각하다. 그래서 우습고, ‘없어 보이고’, 귀엽다. 송강호는 힘을 전혀 주지 않고, 제이미 벨은 힘을 잔뜩 준다. 별 것 아닌 주고받기 같지만, 어둡고 무거운 화면 사이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해치지 않으면서 한숨 돌릴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씬들이다. 쓰는 언어도 연기하는 방식도 다른 두 배우의 어울림은 효과적으로 분위기를 늦춘다.


<설국열차>(2013)


몸이 앞선다, 는 말은, 필요할 때 가장 먼저 행동한다는 의미도 된다. “They’ve got no bullets!!”라고, 칸이 꽉 차도록 외치는 목소리는 과연, 제이미 벨의 것이어야만 했다. 주로 숨어서 속삭여야 했던 이전 장면들에서 충분히 쓰지 못했던 성대를 마음껏 풀듯이, 울림 없이 허스키하고 곧게 쭉 내지른다. 복면을 쓰고 무기를 든 용병들을 잔뜩 맞닥뜨리자, 에드가는 자동으로 팔을 뻗어 다른 이들을 뒤로 보내며 담백하게 결연한 얼굴로 커티스 옆에 선다. 커티스가 “Be careful.”, 이라고 건네자, 힘이 들어간 눈을 굴리며, ‘Yeah’,라고 한 번 뱉은 후에, 멈추고 숨을 들이쉰 후, 긴장된 숨을 내쉼과 함께 ‘you too’를 마저 뱉는다. 굳은 얼굴 근육이 햇빛을 받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모두 필사적으로 용병들에 맞서지만, 에드가의 움직임은 좀 더 ‘있는 힘을 다해’에 가깝다. 물론 능숙한 싸움꾼이다. 자세를 낮추고, 눈썹과 입을 일그러뜨린 채,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잽싸게 움직인다. 힘을 정확하게 실어 강한 효과음과 함께 도끼를 휘두르는 커티스와는 다르다. 무거운 도끼를 벌벌 떨리는 팔로 겨우 막아낼 때, 코 앞으로 다가온 날을 보고 눈이 확장된다. 순간, 날이 그에 상처를 낼까 봐 갑자기 두려워졌다. 혁명의 중심에 있고, 앞장서 싸우고 있으나, 에드가는 겨우 스무 살 남짓의 어린애라는 사실이, 훅 들어왔다. 어두운 터널에 처음 진입하자, 모두 동작을 멈추고 숨을 죽인다. 에드가 혼자만, 숨을 내쉬며 몸을 낮춰 균형을 잡고는 무기를 허공에 쉭 쉭 휘두른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그 불안하고 자잘한 동작으로 알 수 있다, 겁에 질려 날뛰고 있다는 것을.


<설국열차>(2013)


에드가 캐릭터의 감정선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커티스와의 관계다. 믿음, 지지, 존경, 애정, 무엇을 바라고 보내는 마음은 아니지만, 매번 밀려나도 개의치 않는 듯 보이던 그의 눈은 때로 외롭다. 그 감정이 잡히는 순간은 의외로, 긴박한 상황에서다. 여기 일부러 대조되도록 슬로우 모션으로 편집한 장면 둘이 있다. 에드가는 커티스의 뒤로 달려드는  용병에게 몸을 ‘날린다’. 쓰러졌다가 일어나, 눈길도 주지 않고 옆을 스쳐 지나가는 커티스를 눈으로 좇고, 정신이 나간 듯 멍하니 응시했다가, 이내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싸우기 시작하기까지가, 화면에 담긴다. 카메라는 커티스와 에드가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충분하고 확실하게 담는다. 감각적인 연기와 연출이 만나, 숨을 죽이게 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전혀 복잡하거나 진지해 보이지 않았던 에드가의 마음속 깊은 구석 어딘가가, 손에 닿는 듯했다.


같은 칸에서 한참 다이나믹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통에 그 순간을 잊고 있을 때, 메이슨을 잡으려 뛰어가는 커티스를, 누군가 부른다. 에드가다. 힘 있고 정확하게 뱃심으로 내뱉던 전의 외침들과는 다르다. 목이 째진다. 울먹임도 약간 섞여 있다. 절박하다. 머리채가 꽉 잡혀서는 긴장된 눈으로 응시한다. 벌벌 떨거나 울지는 않는다. 커티스가 괴로움을 삼키며 눈을 꽉 감고 다시 몸을 돌리자, 그의 눈은 초점을 잃는다. 전체적으로 힘이 빠져, 삶의 의지를 잃은 사람 같다. 가족, 롤모델, 자신의 세상이었던 사람에게 버림받았다. 이미 한 번 죽은 거다. 그러나 눈썹을 치켜뜨고 입을 으르렁거리듯 일그러뜨려 콧구멍에까지 힘을 잔뜩 주고는, 필사적으로 몸을 빼낸다. 바로 붙잡혀 찔리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얼굴을 애처롭게 찡그리며 스르륵 미끄러진다. 역시 클로즈업된 슬로우모션이다. 딱히 새롭지 않은 연출이 반복되지만, 식상하거나 지루하거나 부담스럽거나 인위적이지 않다. 그 한 축을 받치고 있는 것이 제이미 벨이라고, 그가 아니었다면 이런 느낌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감히 적는다.


전투가 마무리되고, 바닥에 널브러진 에드가의 시체가 화면에 잡힌다. 감지 못한 눈이 너무 선해서, 마음이 아려 온다. 이런 종류의 인물이 그렇게 죽어버리면 가장 슬픈 법이다. 아니 이 정도로 아픈 건 다 제이미 벨 때문이다. 작품을 본 지 한참이 지나 인물들 이름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았을 때도, 에드가가 죽는 순간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미소를 주고, 소리 내어 웃게 해 주고, 끝내 울게 만들고는, 러닝타임의 반도 채 지나지 않아 빠진 제이미 벨이, 내가 이 작품을 두고두고 볼 가능성을 유지하는 까닭이다.


<설국열차>(2013)




<필스>(2013) 레녹스는 에드가와 비슷한 듯 다르다. 작품 자체의 스타일이 다르고,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커티스와 브루스가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역할도, 성격이나 동기도 아주 다르다. 따라서 그들을 따르는 에드가와 레녹스도, 다르다. (언뜻 남성 원톱 주연 옆을 지키는 ‘2인자’ 클리셰로 보일 수 있겠으나, 사실 둘 다 그렇지도 않다.) 레녹스에게도 속이 들여다보이는 순진함은 있지만, 에드가처럼 정의롭고 순수하지는 않다. 스토리에 큰 영향을 주지도 않고 딱히 새로운 유형의 인물도 아니다. 허나 캐릭터로서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레녹스는 마약과 섹스에 찌든 망나니 형사 브루스의 귀여움(?)을 받는 신참 형사다. 그에게 낚여서는 따라 마약을 하고, 여자를 만나고, 폭력적인 수사법을 배운다. 관객은 브루스의 시선으로 그를 보며 함께 놀리면 된다. 제이미 벨은 딱 그 정도로, 화면에 나오면 흥미롭고 그렇지 않으면 딱히 생각나지 않도록, ‘없어 보이게’ 레녹스를 표현한다. 허세 부리면서 있는 척 건들거리는데, 또 소심해져서 끝까지 센 척하진 못한다. 끌리는 여자 앞에서는 성적으로 위축되어,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부릅뜬 채 말이 없어진다. ‘복사 게임’을 하는 장면에서 잔뜩 굳어 긴장한 얼굴은 귀여울 지경이다.  


<필스>(2013)


차 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는 브루스와 레녹스의 자세는 다르다. 브루스는 완전히 몸을 돌린 채 고개를 약간 숙이고 눈을 똑바로 치켜뜬다. 이를 드러내며 상대를 들었다 놨다 놀려먹는다. 휘둘리는 레녹스는 고개만 돌려 턱을 살짝 들고 긴장과 동경이 섞인 눈으로 상대를 옆으로 본다. 심리가 얼굴에 다 드러난다. 범죄자가 들어간 모텔 문 앞에서도, 긴장해서 숨을 크게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가 옆을 돌아봤다가 문을 두드리려고 팔을 들었다가 멈칫한다. 문이 열리자, 잔뜩 힘이 들어간 몸을 쭉 펴 배를 내밀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폼을 잡고 상대를 똑바로 내려다본다. 일부러 권위 있는 척하는 자세다.  

브루스와 함께 협박 수사를 할 때는, 죽이 척척 맞는다. 강자인 채의 흥분 같은 것이 섞여 나름 차분하고 능숙하고 재치 있게 주거니 받거니 한다. 제이미 벨은 내내 비슷한 톤으로, 설정상 깊거나 복잡하지 않은 레녹스의 심리를 적절히 흥미롭게 드러낸다. 브루스의 실제 상황과 상태가 점점 드러나는 장면에서, 그를 대하는 위화감을 첨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필스>(2013)


덧붙이면, <필스>에 댄스 장면이 등장하는데, 뒤이은 글에 설명할 <필름 스타 인 리버풀> 속 글로리아와 피터의 댄스처럼 사적이고 로맨틱하고 중요한 씬은 아니고, 그저 형사들이 잔뜩 취해서는 클럽에서 막 노는 모습의 일환으로 지나가듯 나온다. 헌데 제이미 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레녹스의 성격을 춤에 그대로 드러낸다. 뭔가 열심히 몸을 놀리며 스스로 멋지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은데, 어설프다. 입을 벌리고 엉덩이를 어정쩡하게 뒤로 뺀 채 팔다리를 휘적거린다. 추는 춤의 종류는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피터는 프로, 레녹스는 아마추어도 못 되는 느낌이다. 실제로 여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춤을 췄던[interviewmagazine.com], 타고난 댄서이자 배우인 제이미 벨은, 춤을 출 줄도 알고, 못 출 줄도 안다. 어쩔 수 없이 빌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허나 다시 말해야겠다, 빌리는 제이미 벨의 시작이었으나, 시작일 뿐이었다.  


<필스>(2013)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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