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나이(Bill Nighy)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2003, 감독: 리처드 커티스)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The Best Exotic Marigold Hotel)>(2011, 감독: 존 매든)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완벽한 방법(Sometimes always never)>(2018, 감독: 칼 헌터)
<런던 프라이드(Pride)>(2014, 감독: 매튜 워처스)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입을 헤 벌리고 봤지만, 이제와 보니 말도 안 되게 유치한 작품 <러브 액츄얼리>(2003). 그래도 가끔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휴 그랜트의 소심한 유머와 어설픈 댄스, 그리고 영화 내내 흐르는, “I feel it in my finger”로 시작하는 올드한 박자의 노래, 아니 그보단 그 노래를 부르는 ‘팝스타’ 빌리 맥의 촌스런 제스처다.
빌리 맥에겐 독립적인 플롯이 있지만, 영화 속 TV에 등장하면서 다른 플롯 안 인물들 각각의 일상에 스며들기도 한다.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존재 랄까, ‘스타’라서 배경이 된다. 본인이 실없어짐으로써 다른 이들이 그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웃게 만든다. 작품을 처음 볼 때는 지나치더라도, 끝나면 자꾸 떠오른다.
일단 목소리를 들어 본다. 평소에 말할 때는 뭔가 낀 듯 클래식하게 감미롭다. 흔한 보이스는 아니다. 비음을 부러 많이 섞고, 발음도 약간 흘려준다. 노래할 땐 곧고 담백하고 허스키하게 변해, 다른 느낌으로 귀에 꽂힌다. 아 이 사람, 목소리를 잘 쓰는 배우다. 이제 납득이 좀 간다, 그가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데비 존스였다는 것이.
다음은 움직임이다. 엄청나게 화려한 셔츠에 나팔바지를 입고, 뚝뚝 끊어지는 동작으로 팔을 휘저으며 노래한다. 의자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는 줄 알았는데 서서 굽히고 있는 것이었다니. 꼭 속은 기분이 들어 어이없다. 틀릴 때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시니컬하게 욕을 뱉는다. 방송에선 한결 같이, 본인의 노래를 잔뜩 깎아내리면서 장난스럽게, 마치 경련을 하듯 리듬을 탄다. 뭔가 강조할 때는 꼭 어깨부터 얼굴 전체를 떨어 준다. 괜히 무게 잡는 듯 진지하게 말을 시작했다가 눈을 익살맞게 커다랗게 뜬다. ‘캐릭터’ 같은 느낌도 든다.
라디오 인터뷰를 할 땐, 삐딱하게 앉아서, 걸걸한데 톤이 약간 높은 목소리로, 일부러 미움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투덜대곤 껄껄 웃는다. 아니 그런데, 얼굴에 주름이 가득 잡히도록 웃는 게 좀 상큼하다. 본인의 의도나 매니저의 걱정과는 달리, 위악이 매력이라는 점이 ‘문제’다. 마이웨이로 막나가며 비호감을 자처하기 때문에 결국 호감을 사는, 본투비 스타 스타일이다. 여기에 츤데레라니, 끝장이다. 매니저에게 찾아가서 아닌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잠시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예의 그 촌스러운 팔 쭉 뻗기 동작을 하며 눈을 막 피하고 웃었다가 말았다가 쭈뼛쭈뼛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어쩔 수 없이, 괴상하게 사랑스럽다.
물론 이 흥 많고 자기 자랑인 척 자기 파괴적인 농담을 일삼는 할아버지도 마음에 들었지만, 이후 이 방정맞음이 싹 걷힌 상태의 빌 나이를 화면 속에서 몇 번 목격하며, 그 느릿한 리듬에 중독되고 말았다. 그중 하나가 더글라스다. 로맨틱하기를 거부했던 빌리 맥과 달리, 본인은 전혀 의도치 않았고, 그 형태도 매우 어설프지만, 날숨마저 로맨틱한 인물.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2011)로 향하는 영국 사람들이, 공항 의자에 일렬로 앉아 있다. 더글라스는 꼬고 있는 다리 위에 신문을 놓고, 머리가 아픈 듯 손을 이마에 짚거나, 가끔 고개를 슥 들어 주위를 본다. 이블린이 자리를 찾아 헤매다, 앞을 아주 가까이 지나자, 곧바로 다리를 풀고 옆의 짐을 내리며, 순전히 그 순간의 호의만이 담긴 눈빛으로 응시하며 앉으라는 눈짓을 보낸다. 그 후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떨군다. 그 일상적이고 별 것 아닌 일련의 행동으로, 빌 나이는 더글라스의 무관심한-그러니까, 사심 없는/ 부담스럽지 않은/ 상대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자동으로 의식하는- 매너를 드러낸다. 섬세한데 까다롭지는 않을 것 같은 분위기다.
초반 더글라스에겐 기본적으로 멍하게 우울한 향기가 풍긴다. 아내 진의 긴긴 말에 반응을 하지 않다가 이름을 부르면 그제야 텅 빈 눈으로 슥 보고, 사람이 바글바글한 곳에 도착하자 머리가 아픈 듯 세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는다. 만성적으로 피로하고 나사가 하나 빠진 사람 같다. 버스 안에서 옆사람이 권한 음식을 받아먹으며, 질겁하는 진에게 아무 생각 없는 얼굴로 ‘뭐 어때’하는 시선을 보낼 때부터, 그의 표정은 펴지기 시작한다. ‘펴진다’고 하긴 했지만, 드라마틱한 변화는 아니다. 인상을 쓰는 대신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이마를 짚고, 탁했던 눈이 미세하게 반짝이기 시작한 정도다. 빌 나이는 무표정을 그대로 두고 그늘만 걷어내, 지침에서 편안함으로 바뀐 상태를 드러낸다.
방에 새가 있다고 중얼거리고, 아내가 문을 열어 새 떼가 날아가자 눈을 찔끔 감고 몸을 움찔하는 사람. 더글라스는 항상 ‘ummm’으로 말을 시작하거나, 더듬듯 첫 단어를 반복한다. 말하는 와중에도 다음 말을 생각하는 듯 쉼이 잦다. 그 버릇과 애매한 표현 때문에 가끔 상대가 잘 알아듣지 못한다. 자신을 내세우는 대신 슥 지나가거나 어정쩡하게 서 있는다. 그러나 그만의 리듬으로 상대를 배려한다. 이블린의 스토리를 듣거나 그레이엄과 동행할 때, 별말 없이 조용히 지켜보는 것 만으로, 그냥 옆에 가만히 있는 것 만으로 위로가 된다.
아내 진처럼 노골적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진 않지만, 본인도 깨닫지 못하는 감정이 무의식 중에 드러난다. 진에겐 무뚝뚝하진 않은데, 의욕 없이 대한다. 관심이나 사랑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익숙한 애정은 있으나, 관계에 차갑고 불편한 기류가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항상 반쯤 포기한 채 마지막 회복의 시도를 하듯, 자상하지만 우울한 말투로 뭔가를 제안하거나 설득한다. 가끔 서글픈 눈으로 바라본다. 이블린을 대할 때는 다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약간 어색해하면서도 소년처럼 툭툭 순수하게 스스럼없이 장난치고, 다리를 굽히며 해맑게 폭소하고, 괜히 아는 척을 했다가 멋쩍게 머리를 쓸기도 한다. 아내와 있을 때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수도꼭지를 고치고는, 애처럼 신나 하면서 이블린에게 총총 달려온다. 길고 마른 팔다리를 휘젓는 폼이 약간 풍선 인형 같아서 덩달아 웃음이 나온다. ‘NO DRIP!’ 을 반복하며 하하하 웃고, 하이파이브하자고 손을 폈다가 곧바로 부끄러운 듯 내리며, 원래의 톤으로 돌아와 우물거린다. 진이 오자 놀란 듯 ‘Darling!’ 하고 외치고는, 바로 다가가 이 들뜸을 이어 자랑을 시작하는데, 여기서 더 못 있겠다는 진의 말에 굳어버린다. 진이 쏟아내다 울기 시작하자, 머뭇머뭇 나지막하게 달랜다. 따라 울고 싶은데 참는 것 같다, 둘 다 무너지면 안 되니까. 진이 펑펑 울 때보다, 더글라스가 그렁그렁한 눈을 잠깐 허공에 둘 때 더, 마음이 아프다.
이블린을 달랠 때는 그 망설임이 없다. 곧바로 진심에서 우러나와 꼭 안아주면서, 사심 없는 공감의 얼굴로 함께 슬퍼한다. 진이 그 순간을 깨트리자, 날카로운 표정으로 응시한다. 방으로 들어와, 차분하게 대항하다가, 전에 없던 탁하고 강한 톤으로 참았던 것을 쏟아낸다. 꼿꼿하고 뻣뻣하게 서서 단어 하나하나를 힘들게 뱉는데, 갈수록 숨이 차오르다 거의 울먹일 지경이 된다. 화를 내곤 있지만 상대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본인이 위태로워 보인다. 말을 다 마치자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가쁜 숨을 고르며 입을 오물거린다.
딸이 성공해서 돌아가기로 했다고 기쁘게 말하는 진 옆, 더글라스의 어깨는 유독 구부정해 보인다. 손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다.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리고는 있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고, 눈은 아무와도 맞추지 않는다. 어두운 분위기에서 혼자 들떠 말하는 진 옆에 앉아 침울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메지가 ‘조용히 하자’고 하자, 꼭 잘했다는 듯- 눈썹을 살짝 치켜뜨며 시선을 주고 입을 움직였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 애매하고 자잘한 움직임이 절묘하다.
차를 타려는 진과 혼자 걷겠다는 이블린 사이에 머뭇거리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더글라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눈은 보이지 않지만, 벌리고 있는 초조한 입이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결국 그는 차에 오른다. 그러나 공항에 가는 택시에 타기 직전, 지갑을 두고 왔다면서 휘적휘적 호텔로 돌아간다. 얼굴이 꼭 화난 듯 단호하다. 이블린이 없다는 말에, 잠깐 정지한다. 늘 그렇듯, 꼭 말을 더듬듯 움직임을 늦춘다. 차에 돌아와 아내 옆에 앉아, 간단한 변명을 하며 멋쩍게 웃는다. 생각하듯 내리깔아 허공을 응시하는 눈 때문일까, 착 가라앉은 것을 애써 높이는 목소리 때문일까, 분명 웃음인데, 슬프다.
용기가 없어서 선택을 포기한 건 아니다. 더 이상 연애 감정은 없지만, 여전히 진이 더글라스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빌 나이가 여태껏 쌓아 주었기 때문이다. 막힌 길에서, 아내가 헤어지자고 하자, 더글라스는 일단 거부한다. 짐짓 하는 거절이 아니라, 진심이다. 허나 진이 밀어붙이자, 얼떨떨한 상태로 굳는다. 입을 벌리고, 눈썹을 치켜뜬 채, 얼굴 근육이 전체적으로 약간씩 위로 당겨진 것 같은 상태로. 표면적으로는 '진이 더글라스를 버리는' 상황이지만, 사실 '스스로 버려지는' 것에 가깝다. 진의 말처럼, 이미 끝났으나 더글라스의 일관된 노력으로 유지해왔던 관계다. 진은 낡고 헤진 끈을, 놓지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 매듭지은 것이다.
그렇게 더글라스는 홀로 휘적휘적 호텔로 돌아와, 이블린 앞에 또 어정쩡하게 팔을 굳힌 자세로 선다. 특유의 리듬대로, 더듬거리고, 여러 번 쉬며, 대답하고, 묻는다. 분명 두 사람의 표정엔 별 변화가 없고, 대화도 일상적이지만, 천천히 차오르는 게 느껴진다, 드라마틱하게 오바하는 소니의 사랑 고백과는 비교도 안 되게 설레는 공기가.
로맨틱하면 또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행복의 단추를 채우는 완벽한 방법>(2018), 알란은 아기자기한 연출과 딱 어울리는 멋쟁이 할아버지다. 그는 뚜렷한 마이웨이를 고수한다. 과시하고 다니지는 않는데, 결국 모두가 자기 룰을 따르게 만든다. 그 방식이 매우 은근하고 젠틀해서, 결국 이 사람에게 말렸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도 이상하게, 기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항상 우울한 말투로 천천히 농담인지 뭔지 잘 모르겠는 말들을 차근차근 늘어놓거나, 레터링 기계를 가지고 온 집안에 규칙과 이름을 붙인다. 아들 입장에선 숨이 막혔을 수도 있겠지만, 관람하는 입장에선 좀, 로맨틱하다. ‘침대를 빌려 줘서 고맙다’고 손자 방 천장에 붙여 놓고는, 바로 밑 침대에서 모른 척 자고 있는 할아버지라니.
기본적으론 까다롭고 예의 바르고 젠틀한 알란은, 은근히 염치없을 때가 있다. 스스로 염치없음을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어 상대가 알아서 받아들이게 한다. 아들 집에 애인을 데려와서 함께 샤워까지 한 것을 들키고도 아무렇지 않아 한다. 까만 반팔을 입고 하반신엔 수건을 두른 채 방문에 기대 있는 폼이 매우 없어 보이는데,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재치 있게 조잘조잘 말을 늘어놓기 때문에 그 페이스에 말려들게 된다. 눈썹을 찍 올리고 입을 꾹 다문 ‘내가 뭘’ 하는 특유의 얼굴로 말이다. 그러면서도 적당히 하고 그만 둘 줄 아는, 그리고 항상 재미있을 준비가 돼 있는 태도. 그게 아들의 약을 올리지만, 며느리와 손자가 자신을 편안하게 대하도록 만든다.
‘중국에서 누가 게임을 하다 죽었대’ 이야기를 자꾸 꺼내는 등 잔소리를 늘어놓아도, 고리타분한 꼰대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은근히 슥 주제를 밀어 넣는 빌 나이만의 뉘앙스 때문이고, 알란의 ‘행동거지’ 때문이다. 손자가 게임 하는 건 걱정하면서, 본인은 손자 컴퓨터를 빼앗아 하루 종일 낱말 게임을 한다. 게임에 열중해 있는 알란의 모습-무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거나 핸드폰에 고개를 박고 있는 빌 나이-자체가 흥미롭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울려 퍼지는 효과음과 ‘안 어울리게 어울린’다. 화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며 한 단어를 칠 때마다 손가락을 야무지게 놀리고, 가끔 눈썹을 치켜올리거나 기지개를 켠다.
왜 알란은 하루 종일 게임을 해도 중독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걸까. 본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통제하는 뉘앙스 때문일까. 숙소에서 만난 남자를 조심스럽게 추켜올리며, 아무렇지 않게 돈내기로 끌어당기고, 이겨먹는 와중 단어를 차분히 하나하나 설명한다. 사기꾼 같이 뻔뻔하진 않으나, 은근히 얄밉다. 눈치가 매우 빠르면서 없는 척한다. 그렇게 돈을 따고 혼자 밖에서 게임을 하다, 마침내 그 ‘이상한’ 심리를 아들에게 고백한다 -“내가 지면 그 시신이 마이클일 것 같았다고!” 땅을 보며, 마침내 목구멍에서 밀어내듯. 그러니까, 게임하는 알란에게 중독의 분위기가 없었던 건,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모습 한구석에, 잃어버린 아들을 끊임없이 떠올리는 그의 마음속 쓸쓸한 공기가 맴돌아서였던 걸까.
시신이 아들의 것인지 확인하러 가는 알란은 잔뜩 긴장해 있다. 몸을 움츠리고 괜히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떨리는 소리로 건넨다. 아들이 아닌 것을 확인하자 문을 벌컥 열고, 건조하고 무관심하고 당연하다는, 그러나 약간 들뜬 투로 ‘그럴 줄 알았어’라고 휙 말하곤 휙 나가버린다. 작품 내내 그런 태도로 마른 어깨를 살짝 움츠리고, 눈썹을 약간 올려 주위를 살피며, 시치미를 떼고 속이 별로 읽히지 않는 얼굴로 있다가, 물에 젖어 오들오들 떨며 겨우 털어놓는다. 힘주어 말하지만, 격하게 소리를 지르지는 않는다. 울먹이듯 감정을 토하다 그마저 절제한다. 여전히 발음 하나하나 정확하게, 차근차근 뱉는다.
빌 나이는 항상 그렇다. ‘나 여기 있어’ 하면서 막 표출하고 각인시키지 않는데, 존재를 남긴다. 그의 느릿느릿한 페이스를 따라가게 된다. 포스터부터 그랬다. 차에 탄 채 뚱하게 이쪽을 보고 있는 빌 나이의 얼굴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의 제목이 적혀 있음에도, 결국 극장으로 가게 만들었다.(역시, 원제는 달랐다, ‘Sometimes Always Never’.) 그리고 거기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톤으로,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다 어느새 마음을 푹 적셔버렸다. ‘캐스팅을 잘했다’ 정도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빌 나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런던 프라이드>(2014)의 클리프를 볼 때도 마음에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었다. 위원회 총무라는 다이의 소개와 함께, 그는 처음 등장한다. 큰 키와 뻣뻣한 어깨, 표정도 말도 별로 없어서, 의도와는 상관없이 무게를 잡는 듯 보인다. 간단한 환영 인사 후, 방을 나가던 클리프는 뒤를 돌아보고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고개만 끄덕 하고 나간다. 그의 나이나 젠더, 직책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꺼리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든다. 물론 곧 틀렸음이 밝혀진다. 클리프는 다이나 션, 헤피나처럼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밝게 웃어 줄 수 있는 살가운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뿐이다. 어쩌면 벅차서 울어버릴까봐 자제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항상 한 박자 느리지만, 속은 따뜻한 사람이다. 헤피나가 게딘을 놀릴 때 시치미 떼고 있다가 허허허 하고 호탕하게 웃는, 미적지근한 장난기. 파티에선 조용히 있다가 술에 약간 취해 ‘모두 우리 집 가서 2차 하자’고 어슬렁어슬렁 말하는 수줍은 정.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 때문이었을까, 처음에는 촌장 이미지 같기도 했는데, 그렇지도 않다. 나서서 주목받으려고 하는 대신, 조용히 거들기만 한다. 말 자체를 별로 하지 않고, 하더라도 딱히 멋들어지게 하진 않고, 그러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앞에서 연설하고 많은 사람들과 한꺼번에 어울리는 것보다는, 조용히 이야기를 듣거나 한 사람 씩 만나 챙기는 것이 익숙해 보인다. 존재를 마구 어필하지는 않지만, 가끔 강한 감정을 나직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광부들을 잡아가는 경찰차를 향해 으르렁거리거나, 옛날이야기처럼 시작해서, 남동생이 죽은 이야기를 털어놓고, 마가렛 대처에 대한 울분을, 입을 부들부들 떨면서 토로하기도 한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다. 클리프는 드라마틱한 효과를 내려고 감정을 과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화와 슬픔이 전부 진짜임이 보여서, 그냥 예의 제스처로 넘기지 않고 숨죽이고 귀 기울이게 된다.
클리프는, 마을 위원회 핵심 인사들이 런던에 갔을 때 도둑질하듯 이루어진 회의에서,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한다. ‘도둑들’은 그의 페이스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먹을 꾹 쥐고 몸이 굳어 머뭇거리다가, 야유를 받으며 그대로 털썩 앉고 만다.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는 LGSM을 보며, 착잡하고 미안한 듯 또다시 고개를 푹 숙인다. 그건 클리프의 탓이 아닌데. 별 움직임 없이 그늘 가득한 뺨과 등이, 속상하다.
클리프는 헤피나가 잼을 발라 건네주는 빵을 자르며, ‘내가 더 잘했어야 했다’고, 느릿느릿 털어놓는다. ‘빵을 자르며’라고는 했지만, 말과 동작은 한번에 한 가지 씩만 한다. 빵을 쥐고, 몇 단어를 뱉고, 다시 천천히 칼질을 한다. 목소리는 숨을 거의 못 쉬고 있는 듯 탁하게 끊어진다. 후회가 목까지 차오른 것 같다. 헤피나가 ‘빵이나 똑바로 자르라’고 하자, 조그만 칼을 열심히 놀리다가, 별안간, 톤의 변화 없이 나직하게, ‘나 게이예요’라고 고백한다. ‘알고 있었다’고 하자, 표정으로만 깜짝 놀라 옆을 보며 정지한다. ‘1968년부터 알고 있었다’는 헤피나의 말에, 숨을 파 뱉으며, ‘그렇군요.’ 하고 답한다. 다시 빵을 보았다가, 고개를 돌려 뭔가 말하려는 듯했다가, 그냥 조용히 주름지게 미소 짓고는 빵에 집중한다. 표정 변화도 말도 거의 없는데, 왠지 다 알겠는 기분이 든다. 드라마틱하지 않은데, 넘치는 진심이 그대로 드러난다. <런던 프라이드>에는, 눈물이 차오르는 포인트가 꽤 많다. 대개는 조를 따라 속이 타거나 벅차서 정신없이 울게 된다. 이 장면에선 아무도 울지 않지만, 볼 때마다 혼자 숙연하게 눈이 빨개진다.
천천히 식빵을 잘라서는 어딘가 어설픈 형태로 접시에 늘어놓는 할아버지의 이미지. ‘주인공’은 아니지만, 클리프가 나오면 그의 페이스대로 시간이 흐른다. 항상 한 박자 쉬고 시작하는, 느리고 가지런한 리듬, 미지근한 온도, 엷은 회색빛. 나름의 독특한 멋이 있다.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LGSM 멤버들과, 얼핏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다가 끝내 환상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승리해 탄광으로 가는 길, 찾아온 조를 보고 주먹을 담백하고 야무지게 그러나 감격이 묻어나게 툭툭 치는 모습을 보며, 클리프가 여전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항상 그렇게 그 자리에 있었고, 있을 것 같다.
마지막 웃음 포인트를 그에게 넘긴 것은, 탁월한 배치였다. 넘겨짚어 ‘이상하셨겠어요’라고 말을 붙이는 기자에게, 아주 차분하게, ‘왜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하냐’고 묻고는, 한쪽 눈썹을 일부러, 조금 뻣뻣하게 쭉 치켜올린다. <러브 액츄얼리>에서는 짓궂게 자연스러웠던 그 동작이, 다른 느낌으로 약간 어색하게 발현되는데, 그대로 매력적이다. 그러고 보니 빌리 맥일 때의 연기 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 느린 리듬으로 그 방정을 표현하다니. 독보적이다. 그 눈썹과 함께, 그를 영원히 grandpa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큰 키, 마른 몸, 어딘가 휘적거리는 듯한 걸음걸이, 크지 않고 단추처럼 반짝이는 눈, 위로 찍 올라간 눈썹, 꾹 다문 얇은 입술. 고집스러운 인상인데, 어딘가 ‘다르’다. 보통 수준으로 적당히 고정관념이 박힌 가부장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더라도 그 방향이 살짝 틀어져 있다. 독특하고 감수성이 있는, 얘기를 하면 통할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알란처럼- 고지식하지만 꽉 막혀 있지는 않고, 뻔한데 지겹지 않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시답잖지만 불편하지도 않은 농담을 할 것 같다. 어디까지나 상상이지만, 그럴듯하다. 근거는 빌 나이의 연기 스타일이다. 무슨 말이든 담백하고 아무렇지 않게, 들을람 듣고 말람 말고 하는 뉘앙스로 늘어놓고, 감정도 스크린에 마구 토해 내는 대신, 천천히, 조용히, 차근차근 내려놓는다.
<Sometimes Always Never>의 오프닝으로 돌아간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누군가 우산을 들고 텅 빈 해변에 서 있다. 저 뻣뻣한 뒷모습은 분명, 빌 나이다. 등에 ‘Of course, this is Bill Nighy’라고 적어놓은 것 같다. 아들과 통화를 하다가, 그대로 천천히 아이스크림 차로 가서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데, 왜 ‘여기도 카푸치노를 파냐’는 말이 그렇게 웃긴지 모르겠다. 아니 알겠다, 빌 나이, 그 이름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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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나이의 캐릭터들이 사는 세계가 있었으면 한다. 상상을 했다. 한적한 마을 오래된 바, 스크래블 게임을 하다가, 알란은 클리프를 놀려 먹으려고 하고, 클리프는 알란이 모르는 탄광 용어를 조용히 늘어놓고, 결국 승부를 내지 못한 채 둘 다 허허 웃는다. 물론 더글라스는 이블린과 인도에서 연애하느라 바쁘다. 빌리 맥은, 술을 한 병 들고 늘어지게 의자에 기대 구경하며 낄낄대고 있다. (평소 유튜브는 음악 감상과 배우 인터뷰 관람 용으로만 쓰는데, 빌 나이가 이런 유튜브 하면, 나 진짜 구독해서 맨날 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