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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an 22. 2019

미로같은 매력, 미츠시마 히카리

미츠시마 히카리



* 일본어로 ‘미로’는 ラビリンス(Labyrinth)다. 미츠시마 히카리가 MONDO GROSSO 와 작업한 곡 제목이기도 하다.

-드라마:
<콰르텟>(channel J)
<감옥의 공주님>(CH W)

-영화:
<시체 전문 처리반: 스머글러>(2011, 감독: 이시이 카츠히토)
<악인>(2010, 감독: 이상일)

-뮤직비디오: MONDO GROSSO - ラビリンス(Labyrinth)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행록>(2016) 한국 개봉을 기념해 미츠시마 히카리에 대한 글을 쓰려고 검색을 돌렸다가 놀랐다. 그가 ‘걸그룹’ ‘폴더5’의 맴버로 데뷔했고, 현재도 활동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였다. 아이돌 출신 연기자에 대한 편견은 있게 마련이다. 경력을 알기 전 작품을 통해 먼저 봐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다. 알았어도 감탄하기는 마찬가지였겠다. 그의 연기가 내 색안경을 깨부쉈을 것이 분명하다. 이 글은 <우행록>에 대한 긴긴 기대평이자 기대를 가볍게 뛰어넘을 미츠시마 히카리에 대한 헌사다.



<우행록>(2016) 포스터.



미츠시마 히카리의 얼굴은 선이 고운 편이다. 동그란 눈과 오똑한 코, 가는 턱선과 마른 몸매. ‘귀엽고 한없이 밝은 여성’, 혹은 ‘연약하고 순종적인 여성’ 전형을 연기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일본 드라마의 클리셰적 여성 캐릭터를 맡지 않는다. 항상 새로운 도전을 한다. 삶을 살아내는 속에서 자기 스타일을 잃지 않는 카리스마 있는 여성들을 자기 스타일대로 연기한다. 귀여워도 한없이 밝지는 않고, 연약해도 순종적이지는 않다.

아직 <러브 익스포져>(2008)를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2010년 이후 본격적으로 쌓아온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눈이 가는 부분은 영화보다는 드라마다. <그런데도 살아간다>(Fuji TV), <우먼>(NTV) 등 작품성 있는 드라마를 택해 묵직한 감정연기로 인정받은 후, 비교적 최근의 작품들을 통해서는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연기도 연기지만, 이 글에서는 그만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캐릭터들을 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콰르텟>(channel J)


2017년 방영된 <콰르텟>(channel J)에서 그는 사카모토 유지가 만든 캐릭터를 세 번째로 연기한다.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로 유명한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는, 클리셰에 사로잡히지 않은 현실적이고도 매력적인 캐릭터를 이야기에 적절하게 녹인다. 다소 무거웠던 <우먼>, <그런데도 살아간다>에 비해 <콰르텟>은 비교적 밝다. ‘비교적’이라고 한 까닭은 이 작품 역시 현실의 차가움을 덮지는 않기 때문이다. 재능 있는 주인공이 조력자를 만나 난관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보통의 예체능 드라마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악기를 연주하는 주인공 넷은 천재가 아니다. 이혼, 짝사랑, 홈리스, 재능리스 등의 ‘불행’을 ‘해결’한다기보다는 ‘떠안고’ 살아간다. 아직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면서.

네 명의 캐릭터가 극을 이끌어간다는 특징은 사카모토 유지의 다른 작품 <최고의 이혼>(Fuji TV)을 떠올리게 한다. <콰르텟>의 네 인물들 또한, 어디서 본 것 같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각기 다른 성격과 매력으로 서로를 돋보이게 하고 극을 활기차게 만든다. 미츠시마 히카리의 '스즈메'는, 이에모리와는 편안하면서도 톡톡 튀는 에너지를, 짝사랑하는 벳푸와는 풋풋하고 아련한 분위기를, 초반의 마키와는 미묘한 긴장감을, 후반의 마키와는 안정된 유대감을 이끌어낸다.


<콰르텟>(channel J)


그의 아이 같이 해맑음은 세상을 몰라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힘든 현실에 눌려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스스로를 지키는 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가끔 들지만-스즈메는 녹록치 않은 세상을 겪으며 그 방법을 터득한 사람으로 보인다. 미츠시마 히카리의 얼굴은 천진한 어두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살기 위해 타협하지만 어떤 선을 넘지 않는다. 초반에는 마키 남편 어머니의 사주를 받아 마키를 감시하지만, 정이 들며 금방 마음을 돌리고 미안해한다. 의도적으로 친해지려고 살갑게 대하는 사이사이에 진심이 보인다. 즐거워하거나 난처해하는 표정들은 그가 남을 속이기에는 너무 정이 많고 여린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모두에 대한 애정과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얼굴에 드러나는 사람이기도 하다.


<콰르텟>(channel J)


스즈메는 자주 눈치를 본다. 자신 없는 듯 수그러드는 말투로 이야기하지만 가끔 시적인 표현을 툭툭 뱉을 때는 주변의 공기를 다른 무언가로 채우는 것 같다. 연주를 시작할 때는 울림을 느낀다면서 양말을 벗고, 긴장은 ‘간질간질하다’라고 말한다. 먹을 때는 오밀조밀한 손짓으로 음식에 집중하고, 양반다리를 한 채 뒤로 자빠져 잠들기도 한다. 자주 욕실 슬리퍼를 신고 거실로 나와 이에모리에게 핀잔을 듣기도 한다. 그럴 때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고멘나사이....’라고 중얼거리며 어른에게 혼나는 아이처럼 머리를 숙인다.


스즈메의 언어와 행동은 아이처럼 직관적이고 감각적이다. 미츠시마 히카리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부담스럽거나 오그라들지 않는 적절한 선에서 이를 표현한다. 연기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다. 반쯤 잡아 아무렇게나 묶은 어중간한 단발머리, 헐렁한 멜빵바지와 후드 아래 신은 커다란 신발, 항상 물고 있는 커피우유, 춥거나 부끄러우면 종종 빨개지는 코와 볼은 스즈메를 완성한다.


<콰르텟>(channel J)



스즈메를 보면 알 수 있듯, 옷과 헤어, 메이크업은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감옥의 공주님>(CH W)에서 미츠시마 히카리는 단정한 짧은 머리와 어두운 색의 제복을 입은 ‘와카이 센세’의 모습으로 등장해, <콰르텟>에서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감옥의 공주님>(CH W)


<감옥의 공주님>은 ‘아줌마’ 클리셰를 그대로 가져간다. 대책 없음, 기술에 대한 무능함, 막무가내 행동, 가끔 등장하는 ‘반전’ 능력. 모든 것을 극복하는 모성. 성별에 대한 편견에 휩싸여 있지만 그 아마추어 같은 ‘아줌마’들이 ‘미남’ 악당을 즐겁게 이긴다는 설정과,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캐릭터 각각의 매력으로 어느 정도 단점을 승화시킨다. 와카이 후타바는 이 ‘아줌마’들 사이에서 성별 클리셰가 가장 덜한 캐릭터로, 그들을 이끌고 통제하는 기둥 역할을 한다. 숏컷의 ‘남성적인’ 여성 관리자 전형에 포함된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미츠시마 히카리의 연기가 이겨낸다. 고운 얼굴에 떠오르는 단호한 표정과 가는 몸에서 나오는 절도 있는 동작은 외형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고 극에 몰입하게 만든다.


<감옥의 공주님>은 다소 터무니없게 극적인 작품이다. 코미디와 감동을 섞으려다 작위적인 전개를 낳아버린다. 그냥저냥 재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주위에 추천해 주고 싶지는 않을 정도라고 할까. 하지만 와카이 후타바가 나오는 장면들만큼은 여기저기 보여주고 싶다.


<감옥의 공주님>(CH W)


초반 이타바시 고로의 비서로 있을 때, 함께 소파에 앉아 오니기리를 먹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이타바시 고로를 맡은 배우는 누구와 있어도 성적 긴장감을 일으킨다는(제가 한 말입니다.) 이세야 유스케인데, 긴장감은 있었으나 성적인 느낌이라곤 전혀 없었다. 표면상 갑은 이타바시 고로지만, 사실상의 중심은 와카이에게 있다. 대화의 맥을 이끄는 것도, 강약을 조절하는 것도 그다. 비밀을 쥐고 전략적으로 위장해 들어가 있는 상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교도관으로 일할 때의 와카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깍듯하지만 권력이나 위계에 대한 굽힘은 없다. 강자에겐 강하게 대응하고, 약자는 강한 태도로 보호한다. 원칙보다 자신의 판단을 중요하게 여긴다. 옳고 그름에 대한 구분이 확실한 동시에 융통성이 있다. 미츠시마 히카리는 툭툭 끊어지는 칼 같은 말투와 강약 조절이 정확한 발성으로 와카이의 직업과 성격을 표현한다. 와카이 센세가 호령할 때면,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감탄하게 된다. 아마 교도관을 연기하기 위해 따로 연습을 했겠지만, 소리를 효과적으로 쓰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와카이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며, 가끔 막무가내로 보일 정도로 자기주장이 강하다. 짜증내듯 화내기도 하고, 아무에게나 까칠하게 대하기도 한다. 허나 미츠시마 히카리의 밀어붙이는 연기는 와카이를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제멋대로지만 멋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 틈으로 갑작스레 보여주는 개구진 웃음이나, (없는 척 하지만 사실은 많은) 정 때문에 울컥하는 표정 같은 요소들은 관객을 무장해제 시킨다.


<감옥의 공주님>(CH W)



와카이 센세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은 <시체 전문 처리반: 스머글러>(2011)의 ‘치하루’를 떠오르게 한다. 야쿠자 두목인 남편의 죽음을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젊은 사모님. 그는 무작정 객기를 부리며 나대는 것이 아니다. 거친 남자들을 휘어잡을 전략과 배짱을 갖고 있다.


<시체 전문 처리반: 스머글러>(2011)


치하루는 주연은 아니다. 등장 자체를 이야기가 반 이상 흐르고 나서 한다. 헌데 그 등장부터가 인상적이다. 울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며 주위를 압도한다. 괴력이나 험상궂은 외모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치하루가 화면에 잡히면 그 장면은 치하루의 것이 된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상대의 기를 누른다. 목소리를 굳이 깔거나 까지 않아도 건조하게 툭툭 뱉는 말투 때문에 차갑고 무섭게 들린다. 언뜻 와카이와 비슷하게 들리지만 끝이 가늘게 떠 있어 더 냉정한 느낌을 준다. 와카이에게 뜨거움과 차가움이 공존한다면, 치하루는 뼛속까지 차가울 것 같다. 곧은 자세와 주머니에서 잘 빼지 않는 손, 새침하지조차 않은 시니컬한 표정. 말을 할 때는 상대를 똑바로 보는데, 제압하려는 듯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는 여리고 착해 어중간한 태도로 남들의 눈치를 보며 아무에게나 잘 해 주는 주인공 기누타와 대비된다. 기누타가 건네는 타코야끼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장면은 치하루의 캐릭터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과거나 사연은 작품 속에 나오지 않지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어쩌면 살아남기 위해- 유지하는 냉정한 태도를 스스로의 말로 설명한다. 기누타와 치하루는 언뜻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그 대립으로 서로를 보완한다. 치하루의 차가움 덕에 기누타는 더 따뜻해 보이고, 기누타의 어중간함 덕에 치하루는 더 분명해 보인다. 두 배우의 연기는 서로를 내리누르지 않고 돋보이게 한다.


<시체 전문 처리반: 스머글러>(2011)


차갑기만 할 것 같았던 치하루 역시 와카이 센세처럼 귀여운 면을 보여주며 반전매력을 남긴다. 기누타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 유유히 쓰레기통으로 걸어가 타코야끼를 꺼내 먹는 모습을 보면, 그의 차가움이 어느 정도는 계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먹는 동안에도 절대 서두르지 않고 츤데레같이 뚱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포인트다.


<시체 전문 처리반: 스머글러>(2011)



그는 <악인>(2010)에서 ‘희생양’으로 소비될 때조차 자신의 흔적을 확실하게 남긴다. 두려움을 느낄 때 오히려 악을 쓰며 상대를 강하게 협박하는 것은 감정적으로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나오는 반응 중 하나다. 허나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전형적인 피해자의 것은 아니다. 미츠시마 히카리라는 배우를 아는 나 같은 사람은 좋아하는 상대와 있을 때 나오는 수줍은 표정 같은 귀여운 디테일을 찾아내겠지만, 극 전체로 보면 요시노는 결코 호감형 캐릭터는 아니다. 그는 나오는 장면 내내 관객의 마음에 비호감을 불어넣는 연기를 한다. ‘전형적이지 않은 피해자’ 요시노는, 관객을 감정의 동요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사이 고민의 늪에 빠트린다.



<악인>, <시체 전문 처리반: 스머글러>에 이어 미츠시마 히카리가 츠마부키 사토시와 함께한 <우행록>이 얼마 전 한국에서 개봉했다. 츠마부키 사토시로 광고하고 있지만, 나는 그보다 미츠시마 히카리에 끌렸다.(츠마부키 사토시도 좋아한다. 남들에게 없는 표정을 지닌 대단한 배우다. 그에 대한 글도 쓰고 싶다.) 예고편에서 슬쩍 나온 얼굴만 봐도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이번에도 예상을 깨는 캐릭터로 등장해 츠마부키 사토시와 독특한 케미를 만들어낼 것 같다.


<우행록>(2016) 스틸컷.




글을 마치기 전, 다시 미츠시마 히카리를 ‘배우’라는 단어 하나로는 정의할 수 없음을 언급해야겠다. 일본의 유명 프로듀서 MONDO GROSSO 와의 작업 ラビリンス(Labyrinth)를 보면, 그가 단순한 ‘아이돌’이 아닌 ‘뮤지션’임을, 아니 다양한 분야가 가능한 아티스트임을 알 수 있다. 밤의 도시를 몽환적인 색감으로 담은 화면 속에서, 밝은 색의 스타일리시한 옷을 입고 움직이는 그를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따라간다. 걷고, 가볍게 뛰고, 뒤를 돌아보며 웃거나 빤히 응시하고, 머리카락을 흩트리거나 장난스레 물건을 건드리는 모습 전부가 자연스럽다. 흐느적거리면서도 절도 있는, 춤이라기보다는 ‘몸짓’에 가까운 동작이 그 사이에 녹아들어 있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공간 자체와 교감하는 것 같다. 깔끔하고 신비로운 목소리로 내는 음은 안정적으로 악기의 소리와 조화를 이루며, 영상의 분위기와도 탁월하게 어울린다. 음악과 영상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뛰어난 감각이 베이스가 되었겠지만, 미츠시마 히카리가 자기만의 스타일을 뿜어내는 베테랑 아티스트였기에 이 정도의 결과물이 가능했을 것이다.


미츠시마 히카리의 얼굴은 분장과 연기에 따라 카리스마 넘치게도, 해맑게도, 신비롭게도 변한다. 연기는 안정적이라기보다는 ‘스타일이 있다’. ‘자기 스타일’을 각자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클리셰라곤 없는 캐릭터를 연기하거나, 클리셰적인 면이 있더라도 연기로 개성 있게 바꿔낸다. 예상대로 흘러가 안정을 주기보다는 어디로 튈지 몰라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겉모습만으로는 속을 예측할 수 없는 ‘미로’같다.


https://youtu.be/_2quiyHfJQw

ラビリンス(Labyrinth) 뮤직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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