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시한(Robert Sheehan)
-캐릭터:
네이든(Nathan) in <미스핏츠(Misfits)>(영국 E4)
클라우스(Klaus) in <엄브렐러 아카데미(The Umbrella Academy)>(Netflix)
* 두 작품 모두 1,2 화 정도의 내용만 언급했으나, 핵심적인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활원에서 나오자마자 마약을 사러 간다. 약에 취한 채로 아버지의 장례식에 간다. 아버지의 방을 뒤져 물건을 훔친다. 맴버들이 회의하는 동안 주방에서 술을 꺼내 마신다. 다른 사람의 치마를 훔쳐 입는다. 들키자 시원해서 그랬다고 태연히 말한다. 죽은 아버지를 불러내려고 난리를 치다 유골함을 쏟는다. 모두, <엄브렐러 아카데미>(Netflix) 1화에 나온 넘버4, 클라우스의 행동이다. 마약을 받고 깡총 뛰며 발을 맞대고, 등뼈가 없는 듯 휘청거리며 걷고, 표정을 끊임없이 익살맞게 오만가지로 바꿔 댄다.
같은 음악을 듣고 아카데미 맴버들이 따로 춤을 추는 장면은, 각자의 성격을 드러낸다. 그루비하게 리듬을 타는 앨리슨,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디에고, 딱딱하고 어설프게 움직이는 루터. 가장 독특하고 매력적이었던 건 바냐의 몸짓이었으나, 클라우스도 만만치 않다. 아버지의 유골함을 끌어안고 춤인지 뭔지 모르겠는 동작으로 흐느적거린다.
클라우스의 이런 캐릭터성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십년 전 시즌1을 발표했던 영국 드라마 <미스핏츠>(E4)를, 네이든이 하차한 후 많은 사람이 끊은 걸로 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그 네이든을 맡았던 배우가 바로 클라우스의 로버트 시한이다. 클라우스를 보며 네이든이 상당히 겹쳐 떠올랐다. 오, 이런, 로버트 시한은 여전했다.
네이든이 사회봉사 명령을 받게 된 까닭은 ‘땅콩을 훔쳐 먹어서’다. 정말 그다운 죄목이다. 사회 복지 시설에서도 변함없이 공짜 스낵을 위해 자판기를 흔들어댄다. 그냥 흔드는 게 아니다. 끝을 양손으로 잡고 표정은 있는 대로 찌푸린 채, 있는 힘을 다해 자판기와 함께 몸을 앞뒤로 마구 흔든다. 사람이 자판기를 흔드는 게 아니라, 자판기가 사람을 흔드는 모양새다. 당장 무너져 밑에 깔려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이렇듯 네이든은, 좀 말려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쓸데없는 행동에 힘을 사용한다. 쓸데는 없는데 보고만 있어도 웃긴 원맨쇼. 전부 각본에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연기인지 실제인지 구분하기 힘든, 로버트 시한의 자연스럽고 능청스러운 표정과 동작이 네이든의 매력을 완성하고 높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네이든을 연기할 때 로버트 시한은 몸을 가볍게 쓴다. 힘을 적게 대충 쓴다는 게 아니라, 힘없이 가벼운 몸을 무리해서 쉴 새 없이 움직인다는 말이다. 사회복지사가 이상해진 것을 본 후 문에 빗장을 지른 그는, 동그란 눈에 두려움을 가득 묻히고 새되게 까진 목소리로 빠르게 말한다. 문에서 쿵 소리가 난 후 도망칠 때도 그냥 움직이지 않는다. 눈을 크게 떠서 얼굴 전체를 확장시킨 것 같은 표정을 하고는, 발작적으로 팔을 휘저으며 방정맞게 뛰어간다.
그는 말도 가볍게 쓴다. 진지하게 말하는 순간에도 적절치 못한 언어선택과 쓸데없는 비유, 지나치게 풍부한 표정으로 아무도 자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만든다. 거짓말도 그냥 하지 않는다. 온갖 감정과 묘사를 섞어 연기하고, 마무리로 멋진 척까지 하는 그를 모두가 질린 듯 바라본다. 쟤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든 걸까.
처음 본 순간부터 사이먼을 ‘Weird Kid(이상한 애)’로 부르며 집요하게 괴롭히고, 특정 집단을 혐오하는 발언을 해도 결국 네이든을 버릴 수 없는 건, ‘캐릭터로서’ 봐 줄 수 있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악의가 없었다 해도 누군가에게 폭력이 된다면 잘못된 게 맞고, 실제로 주변에 있었다면 당장 관계를 끊었을지도 모르지만, 허구의 인물에 대한 평가는 현실 세계에서와는 좀 달리 하고 싶다.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는 건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서다. 후에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대단히 뉘우치거나 개과천선하지는 않는다. 화장실 문이 부서져 있고 벽에는 피가 묻어 있는 걸 보고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고치는 것도 빠른 것 뿐 이다.
여자애들을 분배하느니 뭐니 하는 시대착오적이고 징그러운 소리를 해도 그냥 귀엽게(.......) 짜증나는 정도다. 드라마 캐릭터이기 때문이고, 이야기를 쓴 사람이 그것을 ‘헛소리’로 설정해 말하는 인물을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했다는 의도가 분명히 보여서다. 하지만, 네이든이 사실 본인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만큼 못돼먹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 아니 그런 인간조차 못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슨 말을 하고 계획을 세우건, 네이든은 여자를 ‘가질’ 능력도 없고, 그만큼 지배하기 좋아하거나 가부장적이지도 못하다. 그냥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소리를 허세처럼 늘어놓는 것에 불과하다. 멘트는 엉성하고 표정은 순수하다. 스스로가 모르기 때문에 더 한심하고 우습다. 하지만 네이든을 연기하는 로버트 시한은 알고 있다. 아마 상당 부분 배우 본인과 비슷할 것 같기도 하다(사고방식 말고 성격이). 로버트 시한은 기꺼이 웃음거리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리고 그렇게 망가지기를 주저하지 않음으로써 관객의 마음을 얻는다.
그런 네이든이 상처받았거나 외로움을 느낄 때, 혹은 미안하거나 감동받았을 때, ‘익살맞지 않은’ 얼굴을 보여주는 순간, 관객의 마음에는 폭풍이 몰아친다. 그는 아무 생각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쉽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데, 그만큼 빨리 미안해한다. 하룻밤을 보낸 여성이 초능력 때문에 젊은 모습으로 잠시 변한 노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지만, 나중에 다시 찾아와, 옛 앨범을 쥐고 잠들어 있는 그녀를 보고 미안함에 눈물을 글썽거린다.
나름 속 깊은 면도 있다. 처음엔 엄마 애인을 못살게 굴어 쫓겨났지만, 나중엔 엄마의 행복을 위해 친구들과 아파트를 얻었다고 거짓말한다. 그렇게 사회 복지 센터에 숨어 사는 네이든은, 안쓰러워할 틈도 없이 밝다. 그 아무 생각 없는 밝음이 짠하다. 웃는 얼굴이 아프다. 물론 곧 회복하고 원래의 정신없는 네이든으로 돌아갈 것을 알지만, 숨겨진 얼굴을 보기 전과 후에 느끼는 감정은 다를 수밖에. 로버트 시한은 빠르고 자연스럽게, 인위적으로 짜내는 느낌 없이 네이든의 ‘다른’ 면을 드러냈다가, 다시 감춘다.
네이든이 ‘나름 방황하는 청소년’, 이라는 클리셰적 설명을 붙여 줄 수 있는 인물이라면, 클라우스는 오랜 시간 동안 그렇게 살아온, 좀 더 근본적으로 타락한, ‘어른’ 같지 않은 어른이다. 마약, 담배, 술 등 가능한 모든 물질에 중독된 구제불능의 인간인데, 작품 속에서 가장 인기 많은 캐릭터 중 하나다. 왜지? 객관적으로 훨씬 바람직하고 폼 나는 수식어를 지닌 맴버들도 많은데? 매력의 구성요소는 근육질의 몸과 석고 조각상 같은 얼굴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클라우스와 로버트 시한은 보여준다. 초반 등장하는 아카데미의 성인 남성은 셋, 루터, 디에고, 클라우스다. 무게 잡는 루터와 디에고를 비웃듯 클라우스는 대놓고 풀어지고 망가진다. 결국 몸싸움을 벌이는 둘을 보고는 담배를 문 채 웃어댄다. 이 장면을 본 관객이 과연 심각한 표정으로 주먹질을 해대는 두 남자가 멋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닐 거다.
‘종말이 다가오는데 약 빨 생각밖에 안하냐’는 넘버5의 핀잔에, 클라우스는 ‘배도 고프다’고 자랑스럽게 답한다. 항상 온갖 것에 취해 헤롱헤롱 제정신이 아니지만, 그러한 상태 자체로 세상을, 무게 잡는 심각한 인간들을 비웃는다. 세상 망하라는 태도로 망가진 모습은 꽤나 매력적이다. 2화에서 자해공갈을 하는 모습을 보면, 폭소가 터지는 동시에 왠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네이든의 과장된 거짓말 스토리텔링이 떠오르기도 한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들쭉날쭉한 수염, 아이라인인지 다크써클인지 구분하기 힘든 시커먼 눈가, 기다란 목걸이와 퍼 목도리, (앨리슨에게서 훔친)하늘거리는 치마에 맨발까지. 미디어에서 비호감의 상징으로 몰아가기도 하는 패션 아이템을 걸친 모습이 오히려 특이한 방향으로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넘버5가 돈을 주고 아빠인 척 해달라고 하자 가장 좋은 옷이라며 치렁치렁한 블라우스를 입는다. 클라우스는 스스로를 원하는 대로 꾸미고 훌륭하게 소화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기존의 남성성을 깨뜨린다. ‘연기’는 완벽하게, 옷은 화려하게.
초능력을 갖고 태어나 수퍼히어로로 길러진 아카데미 맴버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났다. 무법자 자경단 역할을 하는 디에고나, 배우가 되어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앨리슨처럼, 시간여행에 갇혀 있던 넘버5를 제외하면 모두 과거를 피하거나 합리화하기 위해 ‘무언가’를 한다. 클라우스의 선택은 약물중독-자기파괴다. 겉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즐거워 보이지만, 어쩌면 그 멍청함은 괴로움을 숨기기 위한 가면이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덜덜 떨고, 일어나자마자 담배를 찾는다. 안쓰러워할 새도 없이, 도둑질을 잡아떼는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웃게 된다. 허나 웃음 끝이 어쩐지 쓰다. 그가 말했듯, ‘맨 정신으로는 견디기 힘들어서’ 자신을 망가뜨리는 방법을 ‘택한’ 것이 느껴져서다. 위악, 될 대로 되라는 시니컬한 유머, 의도된 멍 때림으로 고통을 숨긴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캐릭터지만, 클라우스의 고통은 네이든에 비해 훨씬 어둡고, 복잡하고, 꼬여 있다. 굳이 설명을 붙여본다면, 로버트 시한이 나이가 들고 경험과 경력이 쌓임에 따라 캐릭터 표현의 범위가 넓어졌다고 할 수도 있겠다. 연기의 깊이도 달라졌고, 시간의 ‘무게’가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무게 잡지 않아 좋다. 그를 잃어버리지 않은 기분이다. 그래 나 어디 안 갔어! 라고 안심시켜주는 것 같다.
네이든과 클라우스 모두, 얄미운데 정이 가고, 찌질한데 매력이 넘친다. 등장하는 것만으로 작품의 분위기를 B급으로 전환시킨다. -긍정적인 의미로. ‘B급’이 ‘급이 낮다’는 뜻이 아닌 건 다들 알 테니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보면 무슨 말인지 느낌이 올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다 초능력 판타지물인데, 갖고 있는 초능력을 봐도 멋이라곤 없다. 죽었다 살아나는(그마저도 시즌이 끝날 때가 돼서야 밝혀진다) 네이든, 죽은 사람을 불러오는 클라우스. 아니 정정한다. 능력 자체는 충분히 ‘멋’있게 그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인데, 사용하는 모습에서 캐릭터의 성격이 묻어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게 된다. 촐싹대며 모든 것을 가볍고 멋없게 만든다. 그 ‘멋없음’이 바로 네이든과 클라우스의 멋, 로버트 시한의 멋이다.
이전에는 배우나 뮤지션 등에 대한 글을 쓰는 동안, 좋아서 하고 있더라도 한구석은 부담되고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별로 그런 게 없었다. 로버트 시한이 내 무의식에게 괜히 무게 잡지 말라고 말해준 것만 같다. 글은 완성도가 좀 떨어졌을지도 모르겠으나, 로버트 시한의 연기는 ‘가벼운’ 그대로 완벽하다. 맡은 캐릭터의 성격이 상당히 비슷한 두 작품에서만 봤을 뿐이지만, 굳이 다른 얼굴이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다. 방정맞은 네이든이 나간 <미스핏츠>에서는 이전의 막나가는 재미도 나가버렸고, 온갖 물질에 중독된 클라우스는 <엄브렐러 아카데미>에 중독되는 이유다. 솔직히 <미스핏츠>나 <엄브렐러 아카데미>가 아주 잘 만든 작품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허나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로버트 시한과 그가 완성한 캐릭터에게 만큼은, 호불호에 상관없이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