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윤경
<딸에 대하여>(2023, 이미랑)
<경아의 딸>(2022, 김정은)
<저 ㄴ을 어떻게 죽이지?>(2021, 서지환)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우연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클립을 보았다. 우영우가 최수연을 “봄날의 햇살”에 비유하는 영상이었다. 맥락을 모름에도 왠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영우가 나열하는 그들의 역사가 수연의 물기어린 눈동자에 전부 담겨 있어서였다. 거기서도 하윤경은 웃음기 없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꽤나 낮간지러운 소리를 적으려고 한다. 그동안 화면 속에서 만난 하윤경은 내게 있어, “봄날의 햇살” 보다는 ‘한겨울의 햇살’에 가까운 존재였다.
<딸에 대하여>, 정은의 집 문앞, 쌓인 박스 옆에 공손히 앉아 있는 레인이 카메라에 들어왔을 때, 영화를 관람하는 내내 그에게 마음이 쓰이리란 것을 직감했다. 세 사람의 상호작용보다는 정은의 상황/심리 변화로 전개되는 이야기, 그의 딸 그린과 함께 객식구가 된 레인의 첫인상은 염치없고 되바라져 보이기도 한다. 정은이 ‘허락’하지 않는 ‘그린’이라는 이름을 자꾸 사용하는 그의 대사는 정은과 관객에게 불편한 긴장을 남긴다. 그러나, 정은이 화면에서 나가자 레인이 ‘더’ 보인다. 그는 ‘조금만 참으라’고 어르듯 말하는 그린에게 ‘우리만 참냐’고 던진다. 비난도 핀잔도 아니나 흘려듣기는 힘든, 분명하고 간결한 딜리버리다. 이와 더불어 레인의 복잡해 보이는 낯빛을 접한 관객은 그에 대한 비호감(이 있었다면)을 걷어내게 된다.
지난 몇 년간 그린과 자신의 주거비와 생활비를 부담해 온 레인은 어느날 갑자기, 애인의 (호모포빅한) 엄마 집에 얹혀 지내게 되었다. 그린의 말만 믿고, ‘괜찮을 줄 알고’ 살러 들어왔는데, 환대는커녕 인사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힘이 쭉쭉 빠지고 화도 날 법한데, 그는 별다른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다. 숨기고 눌러두는 것도 아니다. 레인은 연기를 하기보단 격식을 차린 솔직함을 내보이는 편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적응하고 서로 배려하는 방법을 조율하고자 하는, 건강한 해결사의 태도가 비친다.
레인이 아니었다면 <딸에 대하여>를 별로 잘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정은의 삶을 초근접샷으로 따라가는 영화, 그린과 레인에 대한 그의 몰이해도(후에 태도가 달라지지만) 클로즈업되어 참기 힘들 때가 있었다. 딸인 그린보다 자주, 정은과 마주치며 이런저런 무례를 겪는 레인, 그에게 이입해 상처받을 법한 장면에서 오히려 그에게 위로받았다. 혐오섞인 말을 뱉는 정은이 부끄러워졌다가, 차분히 대응하며 먼저 다가가곤 하는 레인에게 반하기를 반복했다. 상대의 적개심을 반사하는 대신 고요하게 흩뜨리는 레인, 변명 대신 설명하는 레인, 용서 대신 양해를 구하는 레인,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는 레인. 부드러운 동시에 단단한(진실로 그렇다) 그의 존재감을 하윤경은 체화했다. 무엇을 별로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되었다.
작품 리뷰에도 반농담으로 적었는데, 레인은 거의 ‘매닉 픽시 드림 퀴어’인 듯 모범적이다. ‘참하고’ 예의 바른데다 요리와 청소, 돌봄까지 능숙하게 수행하며, ‘퀴어는 행복할 수 없다’고 여기는 정은을 친절히 설득하기까지 한다. 영화는 인물을 닮은 담백한 톤으로 그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그리는데, ‘그건 이쯤 해두고 레인의 상태가 정말로 괜찮은지 살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기도 했다. 허나 대부분의 삐딱한 생각들은 하윤경이 정리해주었다. 제희의 장례식에서 그린과 나란히 상주를 서는 레인에게 하늘하늘한 페이즐리 팬츠를 입힌 연출 의도가 궁금해지다가도, 그 까닭모를 이질감을 소화하는 하윤경의 곧은 실루엣을 보며 자연히 납득하게 됐다. 그럼에도 남아 있던 석연찮음은, 하윤경의 인터뷰를 읽는 동안 해소되었다.
“(……)레인이 이렇게 자기 중심을 단단히 세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유를 했을지, 자기 삶은 물론 타인에 대해서도 얼마나 깊은 고민과 배려를 거쳤을지 생각해보게 됐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자신과 타인을 깊이 고찰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 하윤경, 2024.08.28. 인터뷰: 김소미 [씨네21]
하윤경은 보다 앞서 공개된 작품에서 레인과 닮은 데가 있는 역할을 맡았던 적이 있었다. 레인은 일상이 흔들릴 수도 있을 환경에서 무덤덤하되 무심하지 않게 자신을 유지하고 타인을 살폈다. <경아의 딸>, 연수가 지켜온 일상은 그를 겨냥한 범죄로 인해 파괴되나, 그는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는 인물이 사건 전후를 프로세싱하는 과정을 넘겨짚지 않고 세세히 응시하려 애쓴다. 그것이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닿을 수 있었던 핵심에는, 역시 인물을 넘겨짚거나 단정하지 않는, 조심스럽되 방어적이지는 않은 하윤경의 표현법이 있었다.
연수는 일단, 무표정으로 담는다. 무게 잡는 교장의 미소지니적 언어를 담고, 빈 교실에서 연애하는 두 학생의 모습을 담는다. 엄마의 집에 아직 남아 있는 제 방을 담는다. 그 사이 연수의 시선은 종종 멎어 허공을 향하는데, 속내는 짐작키 어렵다. 오프닝, 경아의 핸드폰 화면 속에서 밝게 웃던 그는, 더욱 알기 어려웠다. 연수는 엄한 톤으로 남학생을 먼저 보낸 후, 여학생을 불러내 친근하게 툭툭 말을 걸며 잡담을 한다. 그 온도차는 화면에 맛을 더하고 캐릭터를 드러낸다. 그때 생각했다. 연수는 아마도 멋진 사람이겠구나, 그리고 하윤경은 보통 배우가 아니구나.
전 애인 상현이 등장하자 연수는 살짝 굳는다. 주로 참고 숨겼던 속내가 점차 드러난다. 마주보는 상현과 연수는 둘 다 울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울먹임의 종류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상현은 홀로 끝냈어야 할 실연의 아픔을 전 애인에게 들이미는 중이다. 연수는 공포에 질려 있다. (“기사님, 잘 부탁드려요.”: 택시기사가 ‘듬직한 남자친구’의 보호로 인식하는 상현의 말, 그 속뜻은 ‘나 너네 집 어딘지 알아’다.) 하윤경은 눌러담거나 폭발시키는 대신 연수가 느끼고 겪은 바를 정갈한 형태로 꺼내 상대와 관객에게 직선으로 건넨다. 상현에게 분명하게 이별 의사를 전할 때, 조심하라는 엄마를 향해 눈을 똑바로 뜨고 토로할 때, ‘이 집에 오면 숨이 턱턱 막힌다’고 짐짓 가볍게 투덜댈 때, 관객은 연수를 조금 더 알게 된다.
사건이 벌어진 후 연수는 바로 울부짖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당황하고 겁에 질려, 자신에게 닥친 이 끔찍한 일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채로, 할 수 있는 행동을 한다. 상현을 찾으려 시도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핏기 없는 얼굴로 출근하고, 평소대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안부를 묻는 동료 교사 앞에서, 연수는 무너진다.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완전히 편치 않은 상대 앞에서 눈물이 쏟아지고 마는 그 상태를 하윤경은 말없이 전했고, 카메라는 연수를 배려하듯 클로즈업을 피했다.
영화는 사건의 전개를 좇기보단 연수가 거기 대응하며 그 후를 살아가는 모습을, 또한 그와 단절되었던 경아가 자신과 딸에 대한 이해를 거쳐 재연결을 시도하기까지의 단계들을 따라간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직접적인 언어를 사용하지만, 주로 비언어적 표현의 포착을 통해 연수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그는 아마 후회하거나 자책했을 것이고, 상당한 우울감을 겪기도 했을 테다. 이를 짐작케 하는 것은 주로, 사소해 보이는 장면의 깊이를 체화하는 하윤경의 낯빛과 몸가짐이다. 상대의 눈치를 살피는 눈, 끝을 흐리는 말씨- 연수의 변화를 하윤경은 피부에 그대로 입는다. 오디오만으로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며 편안하게 집중하던 연수는, 카메라를 켜고 제 얼굴이 화면에 떠오르자 굳는다. 코미디 쇼 비디오를 보며 웃던 그의 입꼬리는 데이터 클린 업체에서 전화가 걸려오자 순식간에 내려간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감히 안다고 할 수 없을 마음을, 하윤경은 엿볼 수 있게 한다. 엄마에게 선을 긋는, “예민하게 반응”하며 온라인 강사를 그만두는, 탄원서를 부탁하려고 만난 친구에게 ‘그거 나 아니’라고 거짓말하는 그의 심정을. 목구멍까지 끌어올렸다 누르기를 되풀이했을 말을 달칵,하고 삼켜버린 순간 연수가 끌어내려졌을 장소를.
범인이 발뺌하면 처벌이 어렵고, 실형이 나오더라도 인터넷에 불법으로 공개된 영상은 피해자가 다 ‘알아서/꾸준히’ 정리해야 한다. 주변인들조차 피해자를 조롱하고 탓하는 게 현실이다. 영상을 동의 없이 퍼트린 상현, ‘팬이에요’라고 전화를 건 남자, ‘그런 거 찍는 애들 이해가 안 된다’던 연수의 친구들. // 경아에게 수 년에 걸쳐 폭력을 행사해 온 남편과 그것이 경아의 탓이라고 소문을 낸 이들, 경아를 보고 수군거리는 동네 남자들. 영화는 그-각자 존재하나 결국 서로 연결된 악의들, 그리고 ‘악의 없는’ 행위들-을 드라마틱하기보단 일상적이나 결코 가볍지 않은 톤으로 정확하게 짚는다. 연수 혼자만의 일이 아님을 고발하고 설명하는 것은 영화의 몫이나, 당사자에게 쏟아진 피로하고 괴로운 세상을 감정적으로 설득하는 것은 하윤경이다. 거기 맞서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 역시 하윤경이고.
‘자책 좀 그만하고 엄마 인생을 살라’는 연수의 말은 과거 어느 시기의, 어쩌면 현재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다시, 그것은 경아에게 하는 말이다. 연수는 폭력에 노출된 환경에서 자신만이 아니라 엄마의 정신건강까지 챙기며 성장해 왔다. 아빠가 엄마에게 행사한 일들은 연수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경아는 그 점에 대해 별로 생각해보지 않은 듯했다. 그 문장은 연수에게서 경아에게로, 연수 자신에게로, 다시 경아에게로, 그리고 관객에게로 향한다. 하윤경의 딜리버리에는 그런 힘이 있다. (<딸에 대하여> 속 그린이 기자들에게 하는 말이나 연수가 상현의 모친에게 하는 말처럼) 작가가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가 비치는 대사가 아니더라도, 아주 사적인 무언가를 포함하고 있더라도, 관객이 그것을 영화 밖에서 곱씹게 하는.
경아의 딸인 연수의 다양한 톤과, 정은의 딸이 아닌 레인의 일정한 톤, 거기 드리워진 일관성을 소화하는 하윤경은 과연 여러모로 멋졌다. 그들을 응원하고 더 나아가 존경하게 만들었다. <경아의 딸>과 <딸에 대하여> 모두 영화적 허용을 피하고 모녀가 맞닥뜨린 현실과 그들의 진심을 전하는 데에 집중하는 편이었다. 바람직한 극사실주의이나, 견디기 힘든 순간이 자주 찾아왔던 것도 맞다. 영화로부터 멀리 떨어져 움츠러들고 싶어질 때마다, 하윤경이 나를 다시 영화에(세상에) 닿게 했다. 한겨울, 문을 열고 나가게 만드는- 눈밭에 내린 햇살 한 줄기처럼.
서늘하고도 따스한 리얼리즘 속, 배우의 깊이를 가늠해보게 되는 역할로 만났다가, 연극적으로 짜여진 세계 안에서 목격한 하윤경은 일관되고도 신선했다. 사실 시간순으로 가장 먼저 접했던 (사실2: 첫인상은 오브젝트로 관람되다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들여다보게 되는 <소셜포비아> 속 민하영이었다.) <저 ㄴ을 어떻게 죽이지?>는, 내가 하윤경을 기억하게 한 작품이었다.
장르를 활용하고 비트는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 서사보단 인물들의 욕망과 ‘살의’가 향하는 지점을 살피는 재미가 상당하다. 외부와 고립된 듯 보이는 산속 저택, 이곳은 직원들이 하늘하늘한 블라우스를 입고 귀에 무전기를 끼운 채 정성스레 사냥총과 권총을 닦는 세계다. 이야기는 고용인인 하윤을 따라간다. 그에게선 됨됨이보단 욕망과 비밀이 먼저 보인다. 할 일은 않고 사모님 몰래 그의 남편과 말그대로 ‘노는’- 전형적이고 드라마틱한 캐릭터성을 지닌 동료 지영, 하윤의 시선은 그에게 머무르곤 한다. 눈을 흘기고, 비음 섞인 음성으로 비꼬고, 뱃심으로 소리를 내지르고, 이내 ‘머리끄댕이’를 잡아채고 마는 그 솔직한 적의. 그러나 짜증이나 불호, 질투로 읽혔던 그 언행의 정체는 후에 밝혀진다. 다소 간지러운 ‘반전’을 그대로 수용하게 한 것은 하윤경이었다. 단순한 대사도 사연있게 들리도록 해주는- 차분하게 매혹적인 목소리, 점차 불안복잡해지는 눈빛과 일그러지는 미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절묘한 반응들. 카메라는 하윤의 순간들을 영리하게 포착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지영보다는 ‘사모님’과의 케미스트리였다. 선글라스를 끼고 우아하게 누워 있는 사모님의 ‘호랑이스러움’과, 그 곁에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서서 머뭇거리거나 놀라거나 싱긋 웃는 하윤의 ‘토끼스러움’은 환상적으로 맞물렸다. 그뿐이 아니다. 청재킷에 부츠 차림으로 장총을 든 하윤경, 웃음기 없이 눈알을 부라리며 퉁명스러운 효과음을 틱틱 내뱉는 하윤경, “손치워, 이 xxx야!!”라고 시원하고 절박하게 외치며 총을 겨누는 하윤경… 30분 남짓의 러닝타임 동안 영화가 하윤경의 여러 가능성과 매력을 조각조각 탐구하는 듯했고, 이 작품의 가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느꼈다.
<딸에 대하여>로 돌아온다. 레인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자동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스크린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을 보고 멋지다, 취향이다, 예쁘다, 스타일리시하다… 말고, ‘아름답다’는 단어를 떠올린 것은 꽤나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과연 하윤경은 이목을 사로잡는 외모와 음성을 지녔으나, 그 이야기는 아니다. 배우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총체적인 미에 가까웠다.
이미랑 감독으로부터 “차분한데 마냥 어둡지만은 않고, 밝은데 마냥 들뜨지만은 않는 내 모습”이 레인과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는 하윤경, 그에겐 레인, 연수, 수연, 하윤-과 같이, 부드럽게 발음되는 이름이 어울린다. 그러나 그가 아름다운 까닭은 유하고 고와서가 아니다. 원하는 것을 감추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진심을 꺼낼 줄 아는 하윤, 제 삶을 침범하고 해친 그림자를 차근차근 헤쳐 나가는 연수, 꽉꽉 채운 내면의 빛을 꺼내 타인을 감싸는 레인. ‘메소드를 지향하기보단 역할과 거리를 둔다’고 본인이 말했음에도, 인터뷰 몇을 읽으며 하윤경은 아마 그들을 닮았으리라는 짐작을 해버렸다. 그의 인물들은 잔잔한 수면 아래 무언갈 가득 품고 있다. 하윤경은, 인물 고유의 속성을 저대로 쌓을 역량을 지닌, 그 됨됨이를 부풀려 전시하지 않고 은은히 흐르게 두어 아우라로 드리울 수 있는 배우다.
+ 인터뷰 인용
“(……)꾸준히 독립영화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도 확고했는데, 오히려 드라마로 유명세를 타면서 내게 독립영화 캐스팅 제안이 덜 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괜한 노파심이 잠시 들 정도였다.”
“세상의 소외된 지대를 보는 작가적 시선이 살아 있다는 점이 좋다. 아무래도 같이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더 짙고 배우로서도 시도의 폭이 좀더 넓어진다. 독립영화 현장에 있을 때마다 ‘아, 내가 이래서 연기를 좋아하게 된 거지’하고 새삼 자각하게 된다.”
- 하윤경, 2024.08.28. 인터뷰: 김소미 [씨네21]
“꾸준히 독립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내는 하윤경, 배우로서 유명세보다 연기 피드백에 대한 갈증이 있었음을 고백하는 하윤경 [한겨레], 이러니 어떻게 안 좋아하겠나. 그가 ‘연기에 대한 애정을 상기할 수 있는’ 작품들을 앞으로도 자주 만났으면 하고 바란다.
* 주 참고 인터뷰
https://cine21.com/news/view/?mag_id=1057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