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2024)
- 리뷰까지는 못 되는 메모
<대도시의 사랑법>(이언희, 2024)
Feat. 원작 ‘재희’
* 위 작품들의 장면과 결말 포함
소설 ‘재희’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모든 아름다움이라고 명명되는 시절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재희는, 이제 이곳에 없다.” (p.68)
책 <대도시의 사랑법>은 네 편의 연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재희’,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대도시의 사랑법’, ‘늦은 우기의 바캉스’. 그 끝에 화자 ‘영’이 맺었던 관계들은 어긋나거나, 금이 가거나, 추억이 되거나, 추억도 못 된다.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그중 ‘재희’를 다루며, 방향성을 틀어 일종의 ‘해피엔딩’을 바라본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관람했을 때와는 달리(줄리언 반스가 촘촘하게 직조한 원작의 메시지를, 영화의 뒤집힌 엔딩이 흐려놓았다고까지 느꼈다.), 각색 의도를 납득할 수 있었다. 이 선택으로 인해- 포만감을 느끼며 흐뭇하게 극장을 나선 관객들이 재희와 흥수를 돌이키게 되었다면, 또한 (말하자면) ‘헤테로베이팅에 걸린’ 일부 관객의 편견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면, 내 취향쯤이야 잠시 접어두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영의 ‘재희’에서 재희의 재희로
소설 ‘재희’의 전반부를 읽으며, 재희는 영미 시트콤 속 여자 주인공의 ‘그런 게이 친구’의 변주 혹은 풍자(“토큰 스트레이트 프렌드” -타오, <하트스토퍼>) 같아 재미있다고 여겼던 기억이 있다. 과연 그는 판타지인 듯도 했다. 남자와 키스하는 영(영화에서는 ‘흥수’.)의 등짝을 때리며 폭소하는 재희. 제 집 창문까지 기어 올라온 범죄자를 발로 걷어차는 재희. 고나리질하는 산부인과 의사의 진료실에서 자궁 모형을 들고 달려나가, 따라나온 간호사에게 하소연하다 번호를 따고 마는 재희. 그가 영을 아웃팅했음을 고백하는 장면을 읽으며, 재희는 그럴듯한 판타지가 아닌 입체적인 인물임을 씁쓸하게 실감했었다.
이언희 감독과 김고은 배우가 구체화한 재희는 여러 모로 원작의 재희를 닮았으나, 더욱 깊다. 그럴 수밖에. 소설에서 재희는 오로지 영에 의해서 서술되었던 반면, 영화의 재희는 흥수와 공동 화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와 함께 영화는 자연히 그가 여성으로서 겪는 폭력과 그것을 프로세싱하는 과정을 상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한다. 혼자 사는 여성을 노린 범죄나 원치 않은 임신을 마주한 상태의 공포는 원작에 담겨 있지 않았다. 한국에서 (“조신하지 않은”) 젊은 여성으로 사는 고단함은 김고은의 탁월한 전달력을 거쳐 적절하고 설득력 있게 표현된다. 대학교 단톡방 사건이나 재희를 가스라이팅한 마마보이 남친 서사 역시 의도적인 첨가였던 듯한데, 잘 녹아들었다.
원작에 재희의 시선이 부재했던 것은, 한계보단 특징이라고 본다. 근거는 박상영 작가의 첫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 순서대로 실린 두 단편이다.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에는 ‘김’의 시선에서 바라본 연인 ‘소라’가 있다. 이어지는 ‘부산국제영화제’는 그 속편 격으로, 소라의 시선에서 바라본 소라를 담고 있다. 처음 읽을 당시, 뻔해 보이는 사건과 인물 해석이 화자와 함께 뒤집히는 방식에 감탄하며, 소설은 단지 허구적 사건의 잘 짜인 나열이 아님을 새삼스러워했다. 단순히 한 스토리의 두 버전은 아니었고, 각각 그리고 연결되어 존재하는 작품들로 다가왔다. 이는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개의 진실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와도 조금 다르다. (어느 순서로 읽든 김보다는 소라가 궁금해질 테니.) 우리는 겪어 이미 알거나 기꺼이 알고자 하는 세계 만큼을 보게 되는 법이다. 재희-영의 다이내믹은 소라-김의 것과는 (당연히) 한참 다르다. 영화가 짚듯, (한국에서는 특히 더) 아웃사이더인 그들에겐, 서로에겐 없는 각자의 소수성이 있고, 각자의 특권이 있다.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좇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원작 p.46)라는 문장을, 영화는 흥수와 재희 모두의 입장에서 풀어낸다. 이언희 감독은 어쩌면, 박상영 작가가 재희를 화자로 둔 ‘영’이라는 작품을 이 연작에 끼워넣었다면… 이라는 상상을 각색의 출발점으로 삼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만의 짐작이다.
씁쓸한 위트에서 달콤한 판타지로
원작의 재희는 결국 “네 룸메이트 지은이는 고양이야?”라고 물어본 남자와 결혼한다. 그는 재희와 영의 관계를 끝까지 ‘이상하다’고 여기지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재희 말에 따르면 그는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해주’는 남자, 재희와 영은 ‘재희가 바람을 피우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반농담으로 걱정한다. 재희는 영에게 결혼식 사회를 부탁하지만, ‘관례대로’ 신랑의 친구가 사회를 보게 된다. 식이 끝나고 홀로 그들이 살던 집으로 돌아온 영은 냉동실에 있던 블루베리 봉지를 꺼낸다. 거기엔 보라색 얼음 한 조각만이 남아 있다. 재희와의 시절과 20대는 갔고, 그들의 관계는 전같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영리하게도 별볼일없는 약혼자를 두 인물로 쪼개 드라마틱한 캐릭터성을 부여했고, ‘지석’을 통해 데이트 폭력 이슈를 다룬다. 지석과의 이별 후 재희는 (흥수와의 관계를 포함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현실에는 없을 법한 남자와 결혼한다. 식에서 흥수는 메시지틱한 가사를 담은 댄스곡을 축가로 부르며 ‘끼’를 마음껏 발산한다. 영화의 엔딩 역시 텅 빈 집에 홀로 돌아온 흥수의 순간이지만, 톤은 사뭇 밝다. 냉동 블루베리는 한 그릇 가득 남아 있다. 그것을 입에 물고 흥수는 소설의 첫 문장을 적는다. 소개팅을 해주겠다는 재희의 전화를 받고 피식 웃는다. 20대는 끝났지만 재희와의 관계는 변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또 다르게 ‘우리’일 것이다.
짐작해 보면, 감독은(& 보편 관객의 수요를 예측했을 제작자들은) 재희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좀 더 멋진 사람으로 그려지기를, 본인과 더 어울리는 짝을 만나기를 바랐던 듯도 하다. 재희가 더 나은 대접을 받기를, 그들의 우정이 더 명확하고 끈끈하기를, 이 안 로맨틱한 사랑의 결말이 공허하고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보단 얼얼하고 달콤하게 가슴을 채우기를.
재희의 아웃팅과 흥수의 커밍아웃
원작의 현실적 비터스윗함을 따스하고 드라마틱한 판타지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재희는 더 영화적으로 멋지게 변했다. “내가 나인 채로도 충분하다는 걸 알려 준 한 사람”이라는 문구는 각색에서 추가된 것이다. (물론 쌍방향으로 적용되는 표현이지만, 재희가 했던 말을 흥수가 나중에 돌려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흥수가 과에서 게이라고 소문날 위기에 처했을 때 센스있게 연막을 쳤던 재희. 몇 년 후 실수로 아웃팅을 하고 사과하지만, ‘너는 끝까지 숨기고 살 거냐’고 뼈를 찌르며 말다툼을 마무리하는 재희. 취향과는 별개로 내가 영화를 보며 가장 의아했던 순간이 이쯤이었다.
자신의 성적 지향이 알려지는 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흥수와 달리, 원작의 영은 딱히 클로짓은 아니었다. 재희는 남자친구의 질문공세를 받다 ‘지은이가 사실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임을 실토한다. 이를 전해들은 영은 “나의 비밀이 재희와 그 남자의 관계를 위한 도구로 쓰였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원작 p.52)고 서술한다. 영화는 아웃팅 상황과 ‘배신감’을 조금 달리 다룬다. 재희는 흥분한 지석과 이미 한 대 맞은 흥수 사이에서, 어느 정도는 흥수를 보호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얘 게이’라고 말한다. 영화가 아웃팅의 심각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허나 이후 두 사람의 대화가 재희가 흥수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마무리되면서, 꼭 상황의 원인이 ‘흥수가 클로짓인’ 데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들었다. (영화는 수호와 흥수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대하는 태도를 꾸준히 비교했다.)
이후 지석은 집에 무단침입해 재희를 폭행하고, 흥수는 도망간 지석을 잡아 폭행한다. 파출소에서 지석은 ‘저 여자가 바람을 피우고 동거하면서 남자가 게이라고 거짓말을 했다’고 토로하고, 경찰은 그것이 사실이냐고 묻는다. 재희는 흥수의 눈치를 본다. 흥수는 성적 지향을 공개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다행히 그는 마지못해 떠밀려서가 아니라 기꺼운 선택으로 게이임을 밝히는 것처럼 보였고, 다행히(2) 혐오반응 대신 취객의 박수와 경찰의 ‘인정’(….)을 받는다. 그의 커밍아웃이 상황의 ‘해결책’으로 작용하는 이 ‘아름다운’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약간 혼란스러웠지만… 일단은 다행이었다. 너무나 여러 번의 다행이 있었다. (내가 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다. 흥수는 수호와의 관계를 정의하기 힘들어했지만, 대학 축제에서 성소수자 동아리 부스를 부수는 혐오세력들을 보고 즉각 대응하기도 했다. 저도 모르는 새에 흥수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이 의문이 해소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확실히,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속 다니엘 오의 “흉물”스러운 영화와는 다르다. 평범하게 잘 살고 잘 노는 퀴어가 등장하는 영화. <딸에 대하여>가 그랬듯, <대도시의 사랑법> 또한(개인적으로 아쉬웠던 점은 제쳐두고), 한국에 꼭 필요했던 작품이라고 느낀다.
+ 더 사적인 메모들
- 역시 ‘대도시의 사랑법’ 보다는 ‘재희’가 더 적합한 제목이라고 생각하지만(영과 규호의 이야기가 없잖아.), 아무래도 좋다. 박상영 작가님이 제목을 잘 지은 탓이지 뭐. (아니 근데 ‘재희’가 밋밋하면 ‘블루베리와 담배’ 이런 걸로 하지… 너무 예술영화 같아서 안되었으려나)
- 영화가 영의 “화를 내야 할 상황에 누구보다 크게 웃는”(원작 p.34) 버릇을 살리려고 애쓴 게 보여서 좋았다.
- 흥수가 박상영 작가 기사 읽는 이스터에그 의도 이상으로 기뻤고 이상하게 웃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