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배웁니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제모름 Apr 04. 2019

쳐진 눈에 담긴 만화경 (1)  

애드리언 브로디(Adrien Brody) 


 


<피아니스트>(2002)를 본 사람이라면, 스필만의 슬프게 쳐진 눈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를 맡은 배우의 독특하고 우울한 분위기와 섬세하다 못해 처절한 연기도. 나 또한 그랬다. 그리고 얼마 후, 켄 로치 감독의 <빵과 장미>(2000)를 보다 샘이 등장했을 때, 괜히 속은 기분이 들었다. 자유롭고 재수없고 능력 좋은 카사노바 노동운동가 샘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물 흐르듯 구르는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며 능글맞게 웃는다. 표정의 종류부터가 다른 스필만과 샘을 모두 완벽히 소화해낸,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를 받기 전 이미 켄 로치의 눈에 들었던 이 배우의 이름은, ‘애드리언 브로디’다.
 


<피아니스트>(2002) 스틸컷.


길고 마른 몸, 뾰족한 얼굴, 움푹 꺼진 큰 눈과 쳐진 눈썹, 두드러지게 크고 높은, 살짝 비뚤어진 코. 이 요소들의 조합이 이루는 애드리언 브로디의 분위기는 외형적인 묘사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신체 부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우울하고 섬세해지거나, 자상하고 부드러워지며, 권위적이고 날카롭게 변하기도 한다.
 
이제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그의 연기와 매력을 묘사해보려고 하는데, 참고할 작품을 나열해 보니 워낙 많아서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1. 캐릭터 자체가 ‘특별한’, 특이한.
 
-영화:
<빌리지(The Village)>(2004, 감독: M. 나이트 샤말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The Grand Budapast Hotel)>(2014, 감독: 웨스 앤더슨)
<다즐링 주식회사(The Darjeeling Limited)>(2007, 감독: 웨스 앤더슨)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2011, 감독: 우디 앨런)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웨스 앤더슨이 감독한 2016 H&M 크리스마스 에디션 커머셜에 출연한 애드리언 브로디.


먼저 드미트리, 피터, 노아, 달리. 캐릭터 자체가 특이하다. 비주얼도, 성격도, 눈에 띈다. 특징이 강해서 때로는 입체적인 감정을 보여주기보단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드는 기능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연기도 중요하지만, 이 경우 타고난 외모가 캐릭터 표현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애드리언 브로디는 본인의 신체조건을 효과적으로 사용해 연기한다. 때에 따라 연극적으로 눈을 크게 뜨거나, 팔다리를 휘젓기도 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연극적’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 캐릭터 중 하나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의 드미트리다. 웨스 앤더슨의 작품엔 동화적이고 연극적인 부분이 많다. 배우들은 디렉터가 완벽하게 꾸며놓은 무대 위에서 절제된 동작과 말투로 연기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경우 주인공과 악당의 역할까지도 완전히 구분되어 있다. 실제로 살인과 폭력을 저지르는 것은 윌렘 데포의 조플링이지만, 그는 드미트리의 손발일 뿐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비열해 보이는 드미트리는, 죽은 어머니의 재산을 차지하는 것을 가로막는 자는 누구든 없애 버린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등장하는 씬은 몇 되지 않지만, 인상은 강렬하다. 솟은 머리와 콧수염, 각 잡힌 까만 의상은, 긴 팔다리와 이목구비가 두드러지는 뾰족한 얼굴에 완벽하게 어울려, 보기만 해도 머리털이 곤두서는 악당의 비주얼을 만들어낸다. 애드리언 브로디는 표정을 크게 변화시키기보다는, 찰나의 경련 같은 것을 활용해 자세하고 능숙하게, 연극적이기는 하나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주연급의 존재감을 남긴다. 항상 이마와 눈에 힘을 줘 권위적인 성격과 예민한 신경을 표현하며, 말할 땐 코를 찡그리거나 으르렁거리기도 한다. 항상 소락대기를 빽빽 지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강약조절을 하며 상대를 위협한다. 드미트리가 멋대로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에 익숙한, 그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확실히 드러나는 순간이, 변호사와 대면하는 장면이다.


일단 돋보이는 것은 연출이다. 인물을 가운데에 둔 대칭적인 화면 구도로, 마주보고 앉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여주며 절제된 스릴을 불러일으킨다. 반복되는 대사 ‘agreed’와 ‘not agreed’가 긴장감을 더한다. 긴장의 끈은 드미트리에게, 그를 연기하는 애드리언 브로디의 손에 있다. 변호사의 말을 정자세로 들고 있다가, 나직한 말투로 회유한다. 몇 번을 되물어도 상대가 동의하지 않자, 얼굴을 미묘하게 떨며 일그러뜨린 후 벌떡 일어나 뒷짐을 지고 성큼성큼 걸어가며 언짢은 듯 단어만 툭 뱉는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드미트리는 제대로 겁을 줄 줄 아는 무서운 인간이다. 허나 어딘가 허술하다. 첫 등장에서부터 ‘fruit(동성애 성향을 가진 남성을 비하하는 속어)’라며 구스타브를 욕하던 그는, 다음 순간 ‘우리 엄마 건드렸다면 가만 안 둔다’고 위협한다. 상대가 그 ‘모순’을 걸고 넘어지자 허를 찔린 듯 잠시 멈추었다가, ‘But you’re a bysexual(그치만 넌 양성애자잖아)’이라고 다시 말한다. 금방 지나가는 찰나에, 클로즈업된 얼굴에 빈틈이 보인다. 애드리언 브로디는 짧은 순간도 대충 넘기듯 연기하지 않는다. 광대와 눈을 살짝 찌푸린 채, 눈알을 빠르게 굴린다. 그 표정이 상당히 희극적이다. 그리하여 궁지에 몰려 변명을 생각하듯 조용히 지나가는 몇 초는, ‘악당’ 드미트리의 허술한 매력포인트가 된다.
 

마지막 추격씬에서는, 드미트리의 악당적 면모와 희극적 얼굴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서둘러 6층으로 가려는 아가사를 보고, 힘 있게, 그러나 다급하지 않게 ‘Hold it(기다려).’이라 말하고는,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Six(6층).’라고 낮게 깔아 뱉는다. 애드리언 브로디는, 캐릭터성이 강한 인간을 연기할 때도 목소리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다만, 가끔 아주 긁거나 내리 깔 때가 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렇다.


마침내 그림을 든 아가사 옆에 선 드미트리는, 손만 움직여 그림을 스윽 찢는다. 그 동작이 느리고 능숙해 소름이 돋는다. 역시 에너지를 많이 쓰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겁 주는 방법을 잘 아는 인간이다. 아가사가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닫으려는 보이를 손만 들어 제지하고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내린다. 뒷짐은 드미트리의 시그니처라고나 할까. 상체와 고개를 살짝 굽힌 채, 시선은 올려 다가가는 상대에게 고정시킨다. 그 상태로 천천히 걷기만 해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아가사에게 걸어오는 장면은 관객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하지만, 팬들에겐 최고의 움짤을 선사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아가사가 뛰어가자 그제야 눈을 크게 뜨고 으르렁거리며 쫓아 달린다. 긴 코트가 휘날리는데, 오히려 우습다. 드미트리의 까만색 긴 코트는, 천천히 걸을 때는 폼을 더해주지만, 달릴 때는 거추장스러워 방해가 된다. 표정도 마찬가지다. 걸을 때 여유와 긴장이 섞여 폼 나던 얼굴은 희극적으로 일그러진다.


결국 드미트리는 범죄 사실이 들통나고 재산 분배도 받지 못한다. 장렬한 최후도, 강렬한 라스트 씬도 없다. 어디론가 도망갔다는 신문기사 한 토막으로 갈무리된다. 드미트리의 역할은 그 정도다. 애드리언 브로디는 그가 작품의 어느 부분에서 드러나야 하는지를 잘 파악해, 폼 나는 부분과 폼을 구기는 부분을 적절히 구분해 연기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다즐링 주식회사>(2007). 아무래도 ‘limited’는 ‘주식회사’가 아니라, ‘특급열차’로 번역되어야 적절했을 것 같다.


웨스 앤더슨의 세계에서 애드리언 브로디의 모습은 특별한 캐릭터성을 지니는데, 그 비주얼과 특징은 매번 다르게 변화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확실한 악당이었던 그는, <다즐링 주식회사>(2007)에서 예민하고 시니컬하고 이기적인 척 하는, 그러나 사실 정이 많고 정이 가는 둘째 피터의 얼굴로 분한다. 피터는 첫 번째 파트에 언급된 다른 작품들에 비해 평범한 인물이지만, 웨스 앤더슨의 작품을 연결지어 쓰고 싶어 이쪽으로 분류했다. 웨스 앤더슨의 세계 속에서는 ‘평범한’ 사람도 특별하게 그려진다는 말도 맞다면 맞고.


<다즐링 주식회사>(2007)


대부분의 영미권 감독들이 그렇듯, 웨스 앤더슨 또한 오리엔탈리즘이 포함된 시선으로 인도를 그렸다. 전통 복장을 한 ‘아름답고’ 젊은 인도 여성 승무원과의 러브스토리를 비롯해, 현지 주민들을 그리는 방식에서 대상화의 뉘앙스가 있었다. 허나 조금 다른 톤이 느껴졌다. 오리엔탈리즘은 어쩌면 감독 본인이 아니라 휘트먼 삼형제의 마음 속에 있다. 작품은 오히려, 현지 문화를 어설프게 소비하는 백인 남성들을 비웃는다. 양복을 입고 이마에 빨간 점을 찍은 채 흔들리는 식당차에 앉아, 똑같은 약국 봉투를 어수선하게 펼쳐놓고 진통제며 근육이완제를 들이키는 형제들의 모습은 우습다. 치렁치렁한 꽃목걸이를 걸고 각 잡고 기도하려다 말다툼을 벌이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인도를 관광하는 게 아니라, 인도 사람들과 관객이 그들의 우스꽝스러움을 관광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그 웃음의 정점에 피터가 있다.


정거장에 내린 피터는 신발이며 바구니며 이것저것 사제끼다가, 마지막으로 독사를 산다. 그리고 객실에서 잃어버린다. 팬티바람이면서 선글라스, 안대, 목걸이까지 걸치고, 뱀이 도망쳤다며 ‘조용히 난리’치는 피터는, 안쓰럽고 없어보인다. 애드리언 브로디는 티내지 않고 덜덜 떨며 눈치보는, 그 순간에도 선글라스만큼은 사수하는 피터의 내적 난리법석을 맛깔나게 연기한다.


삼형제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첫 부분의 짧은 장면이 이들의 관계와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형제들을 불러모은 프랜시스는 본론을 꺼내기에 앞서 주절주절 인사말을 늘어놓으며 동생들에게 ‘I love you.’라고 말한다. 프랜시스는 쓸데없는 자부심이 있어 괜히 권위적이고 싶어하지만, 정신없고 허술해 실패한다. 그에게 진심은 별로 중요치 않다. 맏형이라는 역할에 도취되어 그냥 스스로 뱉는 말을 믿어버린다고 할까. 형의 갑작스런 사랑고백에 대한 피터와 잭의 답은 다르다. 피터는 나도 사랑한다, 고 되돌려주는 대신, ‘Thank you.’라고 답한다. 형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냥 ‘고맙다’고 퉁친다. 프랜시스가 본인도 모르게 위선적이라면, 피터는 위악적이다. 빈말을 못하는 것 이상으로, 부러 시니컬하게 말한다. 사랑이 있다고 해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잭의 답은 ‘I love you, too.’다. 정이 많고 감정을 잘 표현하는 그는 (아마)진짜로 형들을 사랑한다. ‘나도 사랑해.’는 인사말에 대한 답인 동시에 진심을 담은 애정표현이다. 잭은 둘 사이에 감정의 다리를 놓아주는 사랑이 넘치는 막내 역할을 하다 결국 자기를 들먹이면서까지 싸우는 형들에게 지쳐 후추 스프레이를 뿌린다.


<다즐링 주식회사>(2007)


피터는 예민하다. 두통에 시달려 약을 달고 산다. 커다란 선글라스는 샤프한 얼굴 선을 돋보이게 하고, 밝은 색 양복을 입어도 마르고 긴 팔다리는 두드러진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주무르면 꽤나 신경질적으로 보이는데도, 마냥 뾰족하게 곤두서 있는 느낌은 아니다. 미간은 대부분 찌푸리고 있고, 눈을 크게 뜨는 일은 거의 없다. 걸음걸이는 건들건들 느릿느릿. 달고 사는 담배는 덤. 허세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특징들인데, 피터에게선 그보다는 ‘만사 귀찮음’이 느껴진다.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하지 않고 싶어할’ 것 같다. 나른하고 낮은 목소리로 시니컬한 말을 중얼거리면, 보는 이조차 힘이 쭉 빠진다.

 

하지만 피터가 ‘정이 없거’나 ‘세상이 귀찮은’게 아니라, ‘정을 숨기고’ 있다는 것은 쉽게 드러난다.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기뻐하기는커녕 침울한 표정을 하고 특유의 절망적인 말투로 전하는 피터는, 어딘가 겁에 질려 있다. 정을 주고받는 것이, 싫다기보단 ‘익숙하지 않고’, 정들 존재가 늘어나는 것이 두려워 보인다. 잭이 쓴 이야기를 다 읽고 ‘이거 슬픈 얘기지?’ 라며 쓸데없는 태클을 걸고는, 태연한 척 화장실로 가 다시 읽으며 운다. 눈물을 마구 훔치지도, 큰 소리로 엉엉 울지도 않는다. 가만히 서서 눈을 내리깔아 손에 든 종이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눈물을 떨어트린다. 애드리언 브로디의 과장되지 않은 제스처는 피터의 성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효과적인 ‘피식’을 자아낸다.


<다즐링 주식회사>(2007)


기차에서 쫓겨나 강가를 지나다 아이들의 보트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가장 먼저 달려가는 것도 피터다. 줄에 엉킨 아이를 구하려다 자신도 죽을 뻔 했던 위험했던 상황에서, 아이의 목숨을 살리지 못했다며 스스로를 탓하는 피터의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다. 애드리언 브로디는 가만히 있어도 슬퍼 보이는 눈에 물기를 머금고 울음을 막으며 간신히, 입을 경련하듯 움직여 말을 뱉고는 꾹 다물기를 반복한다.
 

삼형제가 아이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장면이 슬로우모션으로 담길 때, 비로소 선글라스를 벗고 두 손을 모은 채, 건조하게 슬픈 얼굴로 앞장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피터의 굽은 등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영화의 시작에도 출발한 기차를 달려 잡아타는 피터의 모습이 슬로우모션으로 담겼었다. 미처 타지 못한 노신사(빌 머레이다.)를 슬쩍 보고 선글라스를 내리는 얼굴이 시선을 끈다. 슬로우모션은 배우의 신체와 동작, 얼굴의 구석구석을 관객이 자세히 잡아내도록 돕는다. 애드리언 브로디의 것처럼 자세하고 차분한 연기는, 느린 화면을 통해 색다른 느낌으로 돋보인다.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내리까는 작은 움직임은 물론, 선글라스를 잡은 길고 섬세한 손가락과 굽은 어깨에까지 캐릭터와 감정이 묻어난다.


<다즐링 주식회사>(2007)


아무래도 선글라스는, 관객이 후반부에 피터의 눈에 집중하게 하려는 장치 같다. ‘아빠를 못 잊어서’ 유품인 선글라스를 끼고 다닌다는 잭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을 것 같다. 그리고 또 어느 정도는, 감정이 드러나는 눈을 숨기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과거 아버지의 장례식날 피터는, 평소보다 약간 높고 흥분된, 그러나 여전히 차분한 톤으로 카센터 주인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전한다. 눈은 힘이 들어가 파랗고 분명하게 떨린다. 코는 빨갛고 뺨은 긴장되어 있다. 수리중인 차를 탄다며 휘적휘적 돌아다니는 모습은 초반부와 거리가 있지만 통일성도 있어, 결국 차를 다시 돌려놓자고 말하는 순간의 진정된 톤이 어색하지 않다.
 

만사 귀찮아 보이던 피터가 앞뒤 안가리고 행동하는 순간은 이렇듯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사실 누구보다 여리고 정에 휘둘리기 쉬운 사람이라서, 부러 숨기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의 장례식날 밤 생각에 잠겨 담배를 물고 있는 얼굴, 남편의 죽음이나 아들들보다 더 큰 힘이 중요하다는 엄마의 말을 들을 때의 다 포기한 듯 멍하고 슬픈 얼굴을 보면, 아 <다즐링 주식회사>는 휘트먼 삼형제의 이야기지만, 굳이 주인공을 한 명 꼽으라면 피터겠구나 싶다. 영화의 중요한 맥을 잇는 짧은 장면에는 항상 애드리언 브로디의 얼굴이 있었다.



산에 오른 삼형제, 또 홀로 팬티바람의 피터가 어설프게 마임하듯 몸을 늘리며 깃털에 기를 불어넣는 모습은 역시 작품의 ‘피식’을 담당하는 장면 중 하나다. 또한 배우 애드리언 브로디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본인의 신체를 여러 방식으로 잘 활용할 줄 안다.
 

<다즐링 주식회사>(2007)



재미있게도 오웬 윌슨이 주연한 <미드나잇 인 파리>(2011)에서 애드리언 브로디가 까메오로 등장한다. 오웬 윌슨의 길은 여전히 정신없게 말이 많아 프랜시스와 비슷한 데가 있는데, 애드리언 브로디의 달리는 피터와는 아주 다른 분위기를 풍겨서, 두 배우 사이의 케미도 확 바뀐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그의 ‘마임스러운’ 동작을 짧지만 진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살바도르 달리가 등장할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지팡이다. 기다란 지팡이가 길을 향해 까딱거린다. 카메라는 지팡이를 천천히 따라가 들고 있는 사람에게 멈춘다. 까만 정장에 빗어 넘긴 머리카락, 힘을 줘 더 크게 보이는 눈과 잘 다듬어진 콧수염이 화면에 들어오면, 그에게 살바도르 달리를 맡긴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확신이 든다.   


거세게 끊어지는 영어 발음은 스페인 사람인 달리를 연기하기 위한 기본이지만, 애드리언 브로디의 입에서 나오면 그 이상의 효과를 낳는다. 달리를 표현할 때 그는 두 가지 목소리를 쓴다. 웅변하듯 배에 힘을 줘 낮은 목소리를 울리게 하는 경우, 비음이 약해지며 음색이 똑바르고 강렬해진다. 다른 하나는 비밀스럽게 속삭이는 말투다. 중간은 없다. 극과 극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2011)


달리는 자꾸 모든 주제를 현재 자신의 관심사인 코뿔소로 귀결시킨다. 전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옛 파리를 표현하는 화면의 기본적인 색감 때문에 더 붉은 기가 도는 얼굴은, 열정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에 취한 사람의 것 같다. 술이나 약 말고, 환상이나 영감에 말이다. 입을 과장되게 구기며 단어 하나하나를 강조해 말하고, 눈을 엄청 크게 떴다가 가늘게 실눈을 뜨기도 하며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손을 마임하듯 휘저으며 그 눈으로 따라간다. 마치 자기에게만 보이는 코뿔소를 만지듯. 손끝이 곧 외계인과 교신할 것만 같다.
 

길이 고민을 털어놓자, 예술가들은 그 이야기에 자신의 방식을 연결짓는다. 만 레이는 “나는 사진이 보여.”라고, 부뉴엘은 “나는 영화가 보여.”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메라에 잡힌 달리는, 손을 쫙 펴고, 활짝 뜬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속삭인다. “I see…….a rhinoceros(나는 코뿔소가 보여).” 아 이런 매력적인 기승전코뿔소. 다른 사람들의 ‘보인다’는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달리의 ‘보인다’는 진짜로 눈 앞에 보인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존재 자체가 초현실주의적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2011)


예술사 속 아티스트들의 드높은 이름과 그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 때문에, 작품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을 꼽으라면 힘들 것 같지만, 내 경우 선택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애드리언 브로디의 섬세하고도 강한 표정과 동작, 독특한 비주얼은, 실존 인물 살바도르 달리와 닮았으면서도 다른 개성이 있는, ‘<미드나잇 인 파리> 속 달리’라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작품의 주인공은 길이지만, 장면의 주인공은 살바도르 달리, 애드리언 브로디였다.



<빌리지>(2004)


애드리언 브로디가 맡은 또다른 종류의 ‘특별한’ 캐릭터는, <빌리지>(2004)의 노아 퍼시처럼 사회적으로 ‘부족하다’ 고 여겨지는 사람이다. 그에겐 종잡을 수 없는 순수함이 있다. 마임스러운 손짓을 하지만 달리의 것과는 다르고, 타인을 해쳐도 드미트리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빌리지’는 작품의 제목이자 이야기의 무대다. 숲을 경계로 바깥세상과 떨어져 있는 마을의 사람들은, 숲에 ‘입에 올리면 안 되는’ 괴물들이 살고 있다고 믿으며 격리된 공동체를 이루어 산다. 노아 퍼시는 정신지체가 있는 젊은 남자다. 두 번째 파트에서 설명할, 주로 성숙하고 진지한 인물들을 맡는 경우와 확연히 다르다. 체계적인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주로 손짓과 표정을 통해 의사소통한다. 아이 같은 행동이 큰 키와 어른스러운 얼굴과 대비되어 묘한 느낌을 준다. 더벅머리에 대부분 벌리고 있는 입, 헤헤거리는 웃음소리가 노아를 완성한다. 숨바꼭질을 하다 갑자기 찡그리는 얼굴 같은 것이 매력포인트다. 그의 순수함은 때로는 하얗게 무해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되고, 작품의 흐름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다.


노아의 시선이 카메라를 향하는 일은 별로 없다. 항상 어떤 것-이를 테면 벌레나 베리-에 고정되어 있다. 아이비와 루시우스가 이야기할 때 혼자 뭔가에 정신이 팔려 돌아다니다가, 주머니에서 베리를 꺼내 아이비의 손에 쥐어 준다. 앉을 때는 어깨를 굽히고, 팔에 힘을 준 채 손을 모은다. 상대와 눈을 맞추지 않고, 입을 벌리고 웃으며 눈치보듯 슬쩍 보거나, 자신의 손이나 땅을 본다. 루시우스가 심각한 목소리로 ‘불길한 색’ 이라고 경고하지만, 노아는 허허 웃으며 아까 모으고 있던 손을 완전히 펴지 않은 채 짝짝 박수를 치고 부끄러운 듯 얼굴을 묻는다. 아이비와 루시우스의 표정은 어둡고, 장면에 흐르는 분위기는 불길하지만, 노아는 즐겁다. 이렇듯 노아는 혼자 다른 공기를 두르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채, 화면속에서 배경처럼 돌아다닌다.  
 

<빌리지>(2004)

 


감독은 의도적으로 노아를 화면의 주변에 배치해, 자주 존재를 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연출은 이후의 폭력적인 행동에 관객이 겪는 감정의 동요를 극대화 하는 효과를 낳는다. 무해한 ‘배경’ 같았던 노아가 루시우스를 해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두 손을 가져다 댔다.


루시우스를 찾아온 노아는 울상을 지은 채 안절부절못한다. 손가락을 뒤틀어 입에 물고,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한 채 이리저리 눈을 돌린다. 노아도 아이비에 대한 감정을 쉽사리 드러내지 못하지만, 그 방식은 의도적으로 절제하는 루시우스와 다르다. 표현이 서툴러 속에 담긴 것을 꺼내지 못해 점점 차오르다 흘러 넘친 것 같다. 어른스러운 루시우스는, 노아의 생각을 짐작해 묻는다. 말 없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노아와, 가만히 서서 말을 이어가는 루시우스가 대조되며, 루시우스의 차분한 대사를 중심으로 긴장감이 흐른다. 안정된 표정의 루시우스와 불안한 노아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번갈아 화면에 잡힌다. 노아가 화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다. 마른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 되자, 이상하게도 아이처럼 보이는 동시에 갑자기 늙어 보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루시우스의 얼굴에 멍한 충격이 묻어난다. 카메라는 수직으로 방향을 틀어 두 사람의 몸을 비춘다. 한 사람의 손에 들린 칼이 다른 이의 배에 찔려 있다. 노아가 루시우스를 찌른 것이다.
 

<빌리지>(2004)


노아의 표정에는 폭력적인 분노가 없다.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칼을 뽑아 테이블에 던지듯 놓은 후, 손을 입에 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칼을 슬쩍 집어 들고 서둘러 집을 나가려고 한다. 그릇을 깨뜨린 후 어른에게 혼날 것을 걱정하는 아이 같다. 칼을 챙긴 것은 객관적으로 보면 ‘살인도구를 숨기는’ 행위지만, 노아에겐 말 그대로 눈앞의 잘못을 감추는 것에 불과해 보인다. 벌어진 모든 일은 ‘그 상황에서 노아가 할 법한’ 행동이지만, 결코 그에게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헤헤 웃으며 벌레나 베리를 손에 담는 것이 자연스러운 노아라면, 질투심에 사람을 찌르는 노아는 부자연스럽고 그답지 않다. ‘범죄자’라기 보다는, 미성숙한 감정에 지나치게 충실하게 행동해 사고를 저지른 아이에 가깝다. 물론 그 상태가 행위의 무게를 덜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노아의 입장에서 서술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애드리언 브로디의, ‘부자연스러움을 연기하는 자연스러움’은, 관객이 노아의 입장에서‘도’ 생각하게 한다. 복잡한 감정이 들게 해 판단을 불확실하게 만든다. 헌데 바로 그 순간, 고개를 숙이고 왔다갔다 하던 노아는, 몸을 굽히고 루시우스를 한 번 더 찌른다. 그 때 두 번째 충격이 온다.
 

작품은 반전을 마지막에 한 번에 몰아서 터트리지 않고, 천천히 구체적인 복선과 근거를 쌓아 간격을 두고 하나씩 보여준다. 이러한 구성은 반전이 관객에게 단순한 충격을 안기는 것을 넘어, 고민과 사유를 던지는 데에 도움을 준다. 사실 숲 속 괴물은, 더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던 마을 원로들이 만든 이야기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교육’을 흡수하지 않은 존재인 노아가, 연극을 위해 만든 괴물 옷을 입고 숲에 들어갈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어쩌면 노아도 어리석은 보호의 희생자다. 비극을 겪은 사람들이 앞으로의 비극을 막기 위해 꾸며낸 거짓은, 또 다른 비극을 불러왔다. 원로들이 유토피아로 만들고 싶었던 ‘빌리지’는 디스토피아가 되어가고 있었다.
 

죽어가는 루시우스를 구하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 아이비에게 괴물이 으르렁거리며 다가간다. 쫓고 쫓기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비의 공격에 괴물은 구덩이로 굴러 떨어져 크게 다친다. 망토가 벗겨지자 노아의 얼굴이 드러난다. 태어나 처음 ‘죽음’의 예감을 겪는 노아의 얼굴에는, 고통과 절망 보다는 의문과 불편함이 담겨있다. 그는 낑낑대고 으르렁거린다. 이를 드러낸 채 구기는 입은 맹수의 것에 가까워 보이지만, 크게 뜬 그렁그렁한 눈은 겁에 질린 토끼 같다. 그러다 그대로 숨이 멎는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한 상태에서 죽는 모습은, 저질렀던 일들과는 별개로 안쓰럽다.  


<빌리지>(2004)


결국 아이비는 약을 가지고 돌아오고, 원로들은 진실을 밝히기로 결정하며, 마을에는 희미하지만 희망이 보인다. 그러나 노아는 이 세상에 없다. 작품이 끝나도 죽어가는 노아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은, 애드리언 브로디의 연기 덕이다. 인물에 대한 클리셰나 평가를 거부하고 ‘노아’ 그대로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루카 틸다 다코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