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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May 04. 2019

엄태구가 그리는 ‘어른’의 얼굴

엄태구



<잉투기>(2013, 감독: 엄태화)
<어른도감>(2017, 감독: 김인선)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Feat. 엄태화의 단편들: <유숙자>(2010), <하트 바이브레이터>(2011), <숲>(2012)



얼굴선도, 목소리도 강하다. 엄태구의 부리부리한 눈과 각진 턱선, 쉰 듯 허스키한 목소리는 상업영화에서 특정한 이미지로 쓰이기에 적합했다. 북한 요원(<은밀하게 위대하게>), 일본 순사(<밀정>), 계엄군(<택시운전사>)처럼, 제복을 입고 외모에 ‘어울리는’ 기능적 역할을 맡으며 선이 굵은 연기로 시선을 끌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빠져든 엄태구의 얼굴은, 각 잡고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보다 섬세하고 여린 것이었다.
 

<유숙자>(2010)


엄태구의 섬세한 얼굴을 가장 먼저 영상에 담아낸 것은, 그의 형 엄태화 감독이었다. 단편 <유숙자>(2010)에서 그는, 남의 집에 숨어 사는 그림자 같은 존재를 동생의 얼굴을 통해 그린다. 일반적으로 이입하기 힘든 특수한 캐릭터이기 때문에 더욱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를 자세히 짜서 해야 했을 것이다. 섬세한 연기로 유명한 영국 배우 벤 위쇼의 그루누이(<향수>)가 떠오르기도 한다. 몇 가지 일상적인 동작과 눈빛만으로 이야기를 이끄는 엄태구의 연기가, 한정된 공간과 간단한 서사만으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엄태화의 연출과 만나, 짧고 강렬한 작품이 탄생했다.  
 

‘평범하게 멋진’ 엄태구가 궁금하다면, 엄태화 감독의 다른 두 단편, <하트 바이브레이터>(2011), <숲>(2012)을 보면 된다. 이 작품들에서 엄태구는 류혜영과 함께 친구와 연인의 경계에서 호흡을 맞춘다. 편협하게 요약하면, 둘의 관계로 주인공의 질투를 유발하는 역할이다. 기능적인 조연이지만, 두 배우 각자의 개성과 독특한 케미는 옅어지지 않고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엄태화는 특별한 두 배우를 그 정도로 소비하고 끝내지 않는다. <잉투기>(2013)에서 엄태구와 류혜영의 역할과 케미는 보다 깊고 복잡하다. 각자의 인물에 집중해, 관계와 캐릭터가 상호작용하게 만든다.



<잉투기>(2013)


무엇이 내 발을 잡아끌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 <잉투기>를 보러 극장에 간 스스로를 두고두고 칭찬한다. 잊을만하면 다시 찾아보게 되는, 내가 엄태구를 발견하게 해 준 고마운 작품이다. 글러브를 끼고 링 위에 올라 있는 스틸컷을 보고, 오 너무나 외모와 잘 어울리는 강하고 ‘마초적인’ 역할일 거라고 짐작했다면 틀렸다. 태식은 서른이 되도록 엄마 집에 살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댓글로 싸우기나 하는 잉여다. 속에는 아이가 들어서 있는, 겉만 어른이다.


자신의 얼굴이 인터넷에 비웃음거리로 돌아다니는 것을 본 태식의 눈은 여리게 흔들린다. 눈물이 흐르자 ‘어 시바’ 하고 중얼거리며 슥 닦는다. 어떤 감정 자체에 익숙치 않은, 약해 보이기 싫어 몸에 밴 행동이 오히려 우습게 보인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내적 성장이 어딘가에 멈추어 있는 사람의 것이다. 이렇게 평가하듯 태식의 상태를 설명하고는 있지만, 나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현대를 사는 젊은이 대부분의 한구석에는, 태식이 숨 쉬고 있다. 극단적이지만 현실적인 스토리를 통해 감독은 그 작은 태식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태식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게 하는 것은, 엄태구의 연기다.



<잉투기>(2013)


영자는 정말로 강하기 때문에 굳이 ‘척’ 할 필요가 없다. 온몸에 자신감이 감겨 있는 영자와 달리, 태식에겐 일종의 서투른 보호막이 있을 뿐이다. 제스처와 말투는 ‘척’으로 가득하다. 건들건들 걸어 다니고, 인상을 쓰고, 노려보고, 말끝마다 욕을 섞는다.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원래 엄태구의 것이라는 건 알지만, 태식과 만나니 꼭 일부러 꾸며낸 것 같다. ‘척’ 하는 것이 다 티 나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을 숨기지 못한다. 죽고 싶냐? 너 뭐야. 장난까지 마. 그 새끼 어딨어. 따위의 상투적 협박들이 태식의 입에서 나오면, 보잘것없어 오그라들지조차 않는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에는 힘을 잔뜩 주고 있지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여유가 없어서다.


센 척하지 않을 때도, 태식의 표정과 행동은 어딘가 어색하다. 툭툭 단어만 던지며 완성되지 않은 문장으로 대화한다.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큰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본다. 근육질의 어깨를 굽히고 모자 쓴 머리를 푹 숙인 채 터벅터벅 걸어 다닌다. 어느 정도는 맞은 후유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본래의 태식과 아주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잉투기>(2013)


태식은 관계 맺는 데에 서투르다. 어떻게 해야 사람의 호감을 사고 유지시키는지 전혀 모르며 신경 쓰지도 않는다. 스스로를 방에 가두고 홀로서기를 무한대로 미룬다. 인기를 얻으려고 ‘여자 꼬시는’ 방법이나 읊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나니까 챙기지’ 따위의 말로 태식을 팔아먹는 준형 밖에는 의지할 사람이 없다. 관장이 다른 사람과 연습시키려 하자 준형을 부르는 태식은, 영락없이 보호자를 찾는 아이 같다.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다 괜히 성질을 내며 나가버린다. 따라 나온 준형에게 ‘왜 씹냐’며 괜히 투정 부리는데, 삐진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버티고 서 있다.


트라우마를 겪는 태식을 연기할 때 엄태구의 몸은 긴장되어 어정쩡한 경우가 많다. 허공에 매달린 볼과 눈싸움하면서 엉덩이를 뒤로 빼 힘을 주고 있다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움츠리고는, 아무것도 안 한 척 몸을 돌린다. 눈앞에 사람이 다가오기만 해도 빛의 속도로 몸을 웅크리며 주저앉는다. 자기가 먼저 한판 뜨자고 해 놓고는, 맞는 게 두려워 주먹을 머리에서 떼지 못한다. 언뜻 보면 호랑이를 닮았지만 사실은 토끼 같은 눈을 하고 눈치 보는 태식의 모습은 이상하게 자연스러워, 웃기면서도 안쓰럽다.  



태식의 긴장이 풀려 있을 때는 주로 혼자 있을 때다. 나사가 빠진 듯 몸을 늘어뜨리고 입을 벌리고 있다가, 멍한 눈을 졸린 듯 깜박인다. 긴장하지 않으면 무기력하다. 그 사이의 여유나 자연스러움이 태식에겐 잘 없다. 무기력한 눈에 싱크대가 들어오자, 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도꼭지를 죽일 듯 노려보다 온 힘을 다해 꽉 잠근다. 집에 들어온 엄마가 열리지 않는 수도꼭지와 씨름해도, 흘낏 보기만 하고 모른 척 물을 마신다.


이렇듯 태식은, 자기 맘대로 안 될 것들을 애초에 시도하지 않고, 사소한 것들에 목숨 걸며 하루하루를 허비한다. ‘괜찮기 위해’ 영자가 강해지고 무뎌지기로 했다면, 태식이 택한 것은 ‘하지 않기’다. 말 그대로 ‘잉여’다. 작품은 태식을 변호하지도, 섣불리 비난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엄태구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잉투기>(2013)


말 대신 편지를 쓴 태식은, 그것을 읽는 엄마가 있는 방문을 뚫어져라 보다가, 문이 열리자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린다. 엄마가 말하는 동안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반응도 없이 열심히 밥을 먹는다. 물로 밥을 꿀꺽꿀꺽 넘기고 발을 질질 끌며 방으로 들어가려다, 몸을 반쯤 돌리고 어정쩡하게 서서, 역시 눈은 거의 마주치지 않고 고개만 돌린 채 툭 던지듯 말한다. “엄마 근데 우리가 언제부터 같이 살았어? 한 집에 산다고 같이 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내 생각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 있지 않은, 그냥 자기 생각 그대로가 담긴 말이다. 굳이 감정을 과하게 싣지 않고 ‘태식처럼’ 담백하게 말해서 대사가 더 뼈에 와닿는다.



<잉투기>(2013)


<잉투기>에서 핵심  하나는, 앞에서 언급했던 류혜영과 엄태구의 케미다. 태식은 고등학생인 영자에게 연애감정을 느끼고, 객관적으로 보면 성추행이라고 규정될  있는 행동까지 한다. 작품은 영자가 태식을 때리고, 태식이 열심히 사과를 ‘시도하는 것으로 사건을 넘기지만, 문제 삼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그들의 관계에서 힘을 쥐고 있는 것이 영자이기 때문이다. 영자의 말대로 애초부터 갑은 영자, 을은 태식이었으며, 물리적인 힘은 물론 어느 면으로도 태식은 영자를 이길  없다. ‘아저씨와 고등학생 여자애라는 말은 그들의 관계를 반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다음으로, 태식이 영자를 대하는 눈에 ‘그런 뉘앙스 없었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분명 태식의 행동은 잘못됐지만, 성이나 사랑에  눈뜬  대의 호기심 같은 것에 가깝다. 엄태구는 서른 살이   태식의 속에 들어있는 어린아이를 충분히 보여준다. 류혜영과 엄태구의 케미는 영자와 태식의 특수한 관계를 돋보이게 , 상황의 옳고 그름을 딱히 흐리지 않으면서도, 이후의 전개가 틀어지지 않게  준다. (물론 불편했지만, '영자와 태식이라면 괜찮다' ‘이해정도는 가능하다.) : [2024 덧붙임 : 잊고 있다 생각났는데 이거 아무래도  괜찮다. 영화 평점 내려야겠다.]


멋지게 복수하려고 했던 젖존슨이 자살했다는 걸 알게 된 태식은 (또) 뜬금없게도 영자의 집에 들어와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영자가 무시하자 뒤에서 껴안으려고 한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가택침입에 강제추행 범죄가 되겠지만, 말했듯 태식은 영자의 상대가 되지 않고,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저 우스운 상황에 불과하다. 고백하는 표정이나 껴안는 자세는 엄청나게 어설프다. 매만 벌 뿐이다. 결국 태식은 특유의 어정쩡한 자세로 울며 말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챙김 받고 싶었다고.” 하지만 영화는 코미디 톤을 완벽하게 유지한다. 울고 소리 지르다 영자에게 물린 태식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 엄태구는 완전히 태식의 입장에서 연기함으로써 웃음을 유발한다. 태식에겐 비극이지만 관객에겐 희극으로 느껴지도록. 하지만 한구석은 짠하다. 이미 엄태구의 연기가, 보는 이의 마음에 태식의 자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잉투기>(2013)



아무나 붙잡고 때린 태식의 행동을 변호해 줄 말은 없지만, 말했듯 이건 코미디다. 마지막까지도 어정쩡한 폼으로 겁먹고 도망 다니고, 얻어맞으면서도 주먹을 부릅뜬 눈으로 쳐다보는, 달려온 영자를 보고 바보처럼 헤헤 웃는 “우주최강 찌질이” 태식의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센 척만 하지 깡은 없는,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는, 결핍된, 찌질하고 소심한, 자존심만 센, 태식을 수식할 비호감의 언어는 무수히 많다. 하지만 정이 가고, 놀랍게도 공감된다. 엄태구는 내면에 있는 어린아이를, 전혀 ‘어리지’ 않은 얼굴에 감쪽같이 입힌다.


<잉투기>(2013)




여기 또 하나의 ‘애어른’이 있다. <어른도감>(2017)의 황재민이다. ‘연기’란 걸 못해 필사적으로 센 척을 하지만 다 티 나는 태식과 달리, 다채롭게 스스로를 꾸며내는 인물이다. 재민은, 등장하는 시간은 많지만 ‘주인공’ 이라기엔 조금 애매하다. 작품의 시선이 경언의 것이기 때문이다. 속내가 드러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어떤 형태의 인간’으로 대상화된다. 관객은, 의심하거나 증오하거나 약간 의지하는, 경언의 시선으로 재민을 보게 된다.


<어른도감>(2017)

 
재민은 ‘나쁜놈’이다. 여자들을 상대로 사기를 쳐 돈을 뜯어내며 근근이 살아가는 ‘제비’다. 이것저것 말아먹어 별명이 ‘국밥’이다. 뭐 사연은 있었지만, 그게 이야기의 중심은 아니다. 맨날 ‘으른은 이렇게 하는 거야’ 따위 소리를 하지만 사실 경언보다 철이 덜 든, 무늬만 어른이다.


초반부 경언을 대하는 재민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고 친절하다. 슬금슬금 기어들어와 요리와 집안일을 하며 ‘어른인 척’ 은근히 어필하는 모습은 너무나 능숙하게 친절해서 의심스럽다. 엄태구는 허스키하고 센 목소리에 높고 부드러운 톤을 입히고, 소리를 완전히 내뱉지 않는 발성을 사용해 능글맞게 상냥함을 ‘연기’하는 사기꾼을 ‘연기’한다. 동사무소 직원에게 사탕을 먹어도 되냐고 묻는 애교 섞인 말투와 눈웃음이 그에게 그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점희를 비롯한 여자들 앞의 재민은 초반부 경언을 대할 때와는 조금 다른 연기를 펼친다. 수줍음과 느끼함을 적절히 섞고, 뻔한 멘트를 뻔뻔하게 날린다. 코미디 톤이지만 전형적인 것은 아닌 엄태구의 담백한 목소리는, 능글맞은 말을 해도 크게 소름 돋지 않게 하는 효과를 준다. 엄태구가 탁월하게 활용하는 것 중 하나가 눈썹이다. 태식을 연기할 때 힘이 팍 들어간 채로 고정되어 있던 눈썹은, 거짓으로 상대를 살살 구슬리는 재민의 것이 되어, 쉴 새 없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캐릭터의 성격과 상태를 드러낸다.


<어른도감>(2017)


자신보다 윗세대를 상대로 사기를 치며 말과 행동이 늙어버린 재민은, 어른이 아니라 소위 ‘아저씨’와 ‘어린애’의 애매한 경계에 있다. 점희 아버지의 팔순 잔치에서 노래를 부르며 온갖 끼를 부리며 애쓰는 모습은 영락없는 ‘아저씨’지만, 속은 영상에서 땀 흘리며 춤추던 노란 머리 어린애 그대로다. 그에게 ‘어른’이라는 말은 어린이를 속여먹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보험금을 떼먹고 나서 붙잡힌 후의 재민은, 여전히 스스로의 범죄를 합리화하지만, 더 이상 경언 앞에서 만큼은 어른인 척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만남은 아니지만, 함께 지내면서 친밀감이 쌓이고 긴장이 풀려 서로 놀려먹기도 한다. 아이큐가 143이라는 경언에게, ‘키가?’라고 농담을 던진 후 신나서 익살맞은 얼굴로 소리 없이 웃다가, 경언이 삐죽거리며 돌아보자 표정을 심각하게 바꾸며 시치미를 뗀다.  


<어른도감>(2017)


재민이 속 없어 보이는 건, 슬픔이나 외로움을 허허거리며 넘겨버리기 때문이다. 어린 척, 아무 생각 없는 척을 하며 아픈 곳을 감춘다. 경언으로부터 형이 죽기 전 노란 머리를 보고 서성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먼저 일어나야지~” 라며 장난스럽게 밥그릇을 들고일어나는 모습은, 애써 아무렇지 않아 더 아파 보인다. 꽃게집에서 일하다 지쳐 경언이 하던 것처럼 손에 글자를 써서 먹다가, 직원이 “재민이 뭣 먹냐.”라고 묻자 “외로움이요.” 라며 능청을 떤다. 그 능청스러운 쓴웃음에 재민이 진짜로 견뎠을 외롭고 추운 밤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어른도감>(2017)



재민과 경언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어른과 어린이, 삼촌과 조카지만, 태식과 영자처럼 겉보기와는 다른 성격의 관계다. 비즈니스적 ‘친구’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점희에게 정체를 들킨 재민은 열네 살짜리 애와 애처럼 싸운다.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애매하게 화낸다. 마음 같아서는 뭐라도 집어던지고 싶지만, 상대는 어쨌든 중학생이다. 잘 타이르려는 시도는 하는데, 이번에도 말아먹었다는 절망, 같잖은 배신감 등등이 섞여 감정이 솟아오른다. 큰 소리를 내면서도 억누르다가 결국, ‘왜 한 번도 삼촌이라고 불러주지 않냐’는 둥, ‘고아니까 불쌍해서 옆에 있어 준 거’라는 둥 이를 악물고 내질러 버리는 재민의 말은, 완전히 상처받은 애의 것이다. 돈 때문에 여기 온 거 아니냐는 말에 상처받는다는 건, 적어도 이제는 경언이 재민에게 돈벌이 수단 이상의 특별한 존재라는 뜻이다.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린 재민의 뒤에 대고 경언은, ‘지도 고아면서!’라고 소리친다. 재민과 경언은 그런 사이다. 동등한 위치에서 똑같은 말로 싸우는, 미운정 든 친구.
  

중간중간 경언이 지나간 자리를 보는 재민의 아련한 눈은, 그가 과시함으로써 숨겨버린 약간의 진심을 드러낸다. 언덕을 올라 별을 보는 장면은 솔직히 좀 작위적이었으나, 진지함을 웃음으로 넘겨 버리는 재민과 그를 연기하는 엄태구의 얼굴은, 너무 신파로 흐르지 않도록 작품의 톤을 조절했다.


<어른도감>(2017)



재민은 계속 도망치기만 한다. 집을 나오고, 돈을 들고 튀고, 마지막 순간에도 경언을 엄마 집 앞에 버린 후 차를 타고 가버린다. 나름대로는 ‘경언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사실 이기적이고 비겁한 행동이다. 도망쳤는데 경언이 다시 보고 싶었고, 그런데 마침 기름이 떨어졌다. 달려내려 온 경언을 본 재민은 놀람과 의아함으로 얼어버리지만, 눈가에 반가움이 숨어있다.


돈은 언제 갚을 거냐는 경언의 말에 약간 실망한 듯 시무룩해지며 혼나는 아이처럼 쭈뼛거리다가, 이어지는 문장들에 다시 마음이 펴진다. 짐짓 무심한 척 “내가 널 왜기달려!”라고 툴툴대지만, 기쁨이 은은하게 묻어난다. ‘내가 멈춰 있는 건, 차가 멈췄기 때문이지 널 기다리느라가 아니’다. 재민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상황이 떠미는 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따라온 경언을 밀어내지는 않는다. 이후 “나랑 내려갈래?”라고 묻는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시고, 자신 없이 흔들리는, 그러나 진실된 마음이 담긴다.  


<어른도감>(2017)


아무것도 시원하게 해결해주지 않은 채 영화는 끝난다. 경언이 엄마를 만난 건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자잘한 것까지 말하면- 경언이 점희에게 진실을 말했다는 ‘오해’는 풀린 건지, 왜 재민과 함께 사기 치고 다니는 형은 재민과 튈 타이밍을 맞추지 않아서 점희가 의심하게 만든 건지, 배신하고 혼자 날라버린 건지 뭔지. 하지만 생략은 감독이 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작품에서 말해 주지 않은 부분이 좀 찝찝하게 느껴지기는 하나, 큰 문제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재민과 경언의 관계가 이어지는 데에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었고, 규정하기 힘든 두 사람 사이를 표현하는 엄태구와 이재인의 연기가 집중을 잃지 않게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경언은 끝까지 재민을 삼촌이라고 부르지 않고, 눈물의 상봉 따위는 없으며, 둘이 앞으로도 함께 지낼 수 있을지 확실한 결론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두 사람은 비로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되었고, 경언은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닌 까닭으로 재민을 곁에 두기로 ‘선택’한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황재민은 ‘나쁜놈’이다. 사기 치고, 도망치고, 형 사망보험금을 조카에게서 떼먹기까지 하고. 경언이 지나치게 똑 부러지는 아이였기에 그나마 덜 나쁜 놈이 될 수 있었던 거다. <잉투기>가 태식을 그릴 때 그랬듯, <어른도감> 또한 재민의 흐름을 따른다. 태식과 재민을 합리화하는 것은 캐릭터 스스로이지, 작품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일말의 이해와 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적절한 정도의 감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엄태구의 얼굴이다. 찌질하고 한심해지기를 주저하지 않음으로써, 별로지만 정이 가는 인간을 드러내고 감정적으로 설득시킨다.


<어른도감>(2017)



엄태구의 외모는 완전한 ‘어른 남자’의 것이지만, 연기를 통해 겉만 어른이고 속은 '애'인 사람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입는다. 외모는 섬세한 표현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엄태구의 이미지 강한 얼굴과 목소리는, 연기로 ‘극복’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표정이 그려질 특별한 캔버스다.


엄태구라는 배우가 점점 알려지고 있어서 기쁘다. 그가 앞으로도 종종 독립영화에 출연하기를 바란다. 독립영화는, 태식이나 재민처럼 다양한 성격을 지닌, 엄태구의 담백하고도 다채로운 얼굴을 드러낼 캐릭터를 건네줄 것이니까 말이다.


<어른도감>(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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