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런 건 안되냐’고.
-배우: 마린 백트(Marine Vacth)
-감독: 프랑수아 오종(Francois Ozon)
-영화:
<영 앤 뷰티풀(Jeune et jolie)>(2013)
<두 개의 사랑(L’amant double)>(2017)
Feat. <프란츠(Frantz)>(2016)
* <영 앤 뷰티풀>, <두 개의 사랑>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 <프란츠>의 전개에 대한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란츠>(2016)의 주인공은 프란츠가 아니다. 그를 죽인 애드리언과 사랑에 빠진, 약혼자 안나다. 주된 소재는 애드리언과 안나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지만, 둘 사이 관계의 맺음이나 끝맺음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안나 자체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안나의 상태와 감정, 욕망에 중심을 두고 찍어, 몇십 년 전을 배경으로 클래식하면서도 현대적 흐름에 맞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 감독의 이름은 프랑수아 오종, 여성의 욕망을 다양한 방법으로 가장 잘 드러내는 남성 감독 중 하나다. 사실 <프란츠>는 ‘오종스럽지’ 않은 오종 작품으로 꼽히기도 한다. 대개 그는 정석적인 여성 중심의 서사보다는, 어딘가 빗나가 보이기도 하는 다양한 상상력을 스크린에 털어놓는다. 가끔은 ‘왜 이런 건 안되냐’고 묻는 것 같기도 하다. 비교적 최근의 작품 둘에서는 신인 배우 마린 백트의 얼굴을 통해 젊은 여성의 욕망과 공허를 나타냈다.
<영 앤 뷰티풀>(2013)은, 제목이 묘사하듯 ‘젊고 아름다운’ 이사벨의 이야기다. 하지만 밝고 에너지 넘치는 톤으로 청춘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내지는 않는다.
이사벨은 대부분 무표정이다. 마린 백트의 표정이 풍부하지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 가족들이 생일을 축하해 줄 때는 감격에 겨워 울기도 하고, 입꼬리를 쭉 올려 옆사람을 향해 웃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홀로 다른 표정으로 돌아온다. 카메라는 지하철이나 버스, 승용차 뒷좌석에 앉아 가만히 흔들리는 이사벨의 얼굴을 종종 담는다. 입은 꾹 다물고 있고, 눈은 무언가 생각하듯 내리깔고 있다가 올려 멍하게 허공을 응시한다. 학생들이 랭보의 시를 돌아가며 읽는 장면에서 마지막 순서로 칠판 앞에 선 이사벨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짧은 구절을 읊고는 다 시시하거나 귀찮다는 듯 휙 돌아 카메라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사벨은 말할 때 고개를 많이 흔들거나 제스처를 사용하지 않고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본다. 대사나 몸짓보다는 눈빛만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마린 백트의 순수하고도 통달한 듯 묘한 눈빛은, 관객을 설득시킨다. 어떻게 보면 당돌을 넘어 오만하지만, 그 티없는 당당함에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해변에서 처음으로 섹스하는 이사벨은, 남자 밑에 깔린 자기 자신을 관람하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감독은 이를 눈에 보이는 초현실적 형상, 즉 또다른 이사벨의 모습으로 나타낸다. 그 환상 속 이사벨은 현실의 이사벨을 권태롭게 연민하는 눈으로 내려다본다. 어쩌면 열 일곱의 이사벨은, 이처럼 자신을 비롯한 모든 인간들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기분이었는지도, 세상이 엄마가 일부러 꺼내 놓은 콘돔처럼 귀찮고 가소롭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사벨이 성매매를 하는 까닭을 작품은 정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호기심’이라는 단어로 함축하기에는 부족하다. 돈이 필요했다거나, 가정이 화목하지 못해 집에 있기 싫어서라거나, 어떤 트라우마 때문이라거나 하는 ‘문제의 원인’이 없다. 문제가 그녀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사벨이 ‘몸을 팔기’ 시작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보자. 애초에 눈 앞에 놓인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가 택할 수 있었던 가장 ‘흥미로운’ 길은 무엇이었을까.
스스로의 진술과 달리, 성매매를 하며 겪은 일들이 이사벨에게 결코 긍정적인 자극만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돈을 내고 여성의 몸을 사려는 남성들은 대개, 한 번의 섹스라는 구체적인 행위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여성의 감정과 육체를 지배하려고 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사벨은 남자들의 지배욕을 채워주며 그들을 지배한다. 말을 들어주며 고개는 끄덕이지만, 눈으로 비웃는다. 젊은 남자애들을 겪어 본 결과 시시했으니까, 나이가 좀 많으면 재미있으려나 했는데, 다른 방식으로 시시하다. 새아빠와 엄마 친구까지 포함한 세상 남자들은, 이사벨에게 있어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흔들림 없는 이사벨의 눈은 ‘영 앤 뷰티풀’ 하지 못한 남자들, 고상한 척 하는 그들의 추잡한 비밀을 담는다.
남자가 죽고 모든 것이 들통난 후 엄마에게 안겨 엉엉 울기도 하지만, 그 후에는 다시 원래의 얼굴로 돌아온다. 경찰에는 ‘흥미로운 경험’이었다고 진술하며, 정신과 치료를 받으라는 엄마의 말에 ‘내 돈은 어쨌냐’고 묻고, 상담을 받으러 가서도 ‘내가 번 돈으로 상담비를 내면 되겠다’고 차분하게 말한다. 허나 차가운 언어는 일종의 자기방어적 위악이다. 카메라는 ‘모든 게 재밌었다’고 말하는 이사벨의 입과, 죽은 남자를 기억하는 눈을 클로즈업해 잡는다. 비록 만남 자체는 불평등하고 어긋난 방식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르지만, 서로에게 일종의 위로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다 그를 젠틀한 사람으로 기억하며 비로소 눈물을 흘리는 이사벨의 무너진 입가가 말해준다. 죽음의 경험은 이사벨의 마음에 선 하나를 그었다.
허나 죽은 남자는, 그의 아내와 이사벨을 연결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이사벨은 빼 두었던 핸드폰의 유심을 끼우고, 다시 성매매를 시작하는 대신 죽은 남자의 아내 알리스를 만난다. 이사벨이 비웃음이나 권태 혹은 어떤 목적 없이 대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눈치를 보지만, 적대감 대신 같은 여성으로서의 동질감과 부러움의 제스처를 보내는 알리스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다 남자가 죽은 방으로 올라가 나란히 침대에 눕는다. 알리스와 함께 누워 있는 이사벨은, 가장 이사벨 다워 보인다. 샬롯 램플링의 탁하고 날카로운 눈과 아름답게 샌 머리카락은, 마린 백트의 동그랗게 뜬 빛나는 눈, 화장기 없어 더 앳되어 보이는 뺨과 묘한 케미를 이룬다.
깜박 잠들었다가 깨어 혼자 남은 것을 깨달은 후의 몽롱한 얼굴은, 복합적이고도 단순하다. 이제 아무래도 좋아. 그녀처럼이라면, 늙는 것도 괜찮겠어. 아, 나는 열 일곱 그대로 아름다워도 괜찮구나. 말로 표현한다면 이런 것들이 될 것 같고, 아닐 수도 있고. 프랑수아 오종이 직접적인 대사 대신 마린 백트의 눈빛과 희미한 웃음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은 교훈을 새길 필요 없이 그냥 흐름을 느끼면 된다. 다음 문장들에 ‘어쩌면~모른다’를 이어 사용한 까닭이라고 변명해본다. 어쩌면 이사벨은 언젠가 소모될 젊음의 흔적을 여기저기 남기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이사벨이 독립된 인격체로서 존재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다른 방식을 찾기를 바랄 수는 있지만, 결코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배우는 캐릭터의 감정을 관객이 알 수 있도록 얼굴에 입히지만, 항상 확실하고 분명하게만 표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 꺼풀 숨겨야 하는 경우도 있고, 캐릭터 스스로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여러 감정의 경계에 있는 경우도 있다. 감독의 의도나 인물의 배경, 이야기의 맥락에 따라, 또 배우의 연기 방식과 끌어내는 감정의 토대에 따라, 같은 상황 설정이라도 수없이 다양한 갈래의 표정이 나온다. 감독은 이사벨이 모든 것을 드러내지는 않기를 원했을 것이고, 마린 백트의 분위기와 연기는 감독이 의도한 방향대로 캐릭터를 표현했다.
몇 년 후 프랑수아 오종은, 다른 면으로 강렬한 작품<두 개의 사랑>(2017)에서, 다시 한 번 마린 백트의 얼굴로 중심을 잡는다.
<두 개의 사랑>의 클로에는, 이사벨의 티 없이 오만한 순수함과는 다른 것을 가지고 있다. 이사벨이 자란 모습 같기도 한데, 그녀의 무표정에 그늘과 미세한 흔들림이 더해져 어두운 쪽으로 풍부하다. 배우도 캐릭터도 더 많은 일과 감정을 겪은 상태이기 때문일까, 마린 백트 특유의 분위기가 그대로 묻어나면서도 복잡하고 깊어졌다.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설득하고 전개에 집중력을 부여한다.
시작은 클로에가 긴 머리를 짧게 자르는 장면이다. 프랑수아 오종의 작품에는 이처럼 별다른 배경음악과 대사 없이 일상의 소리만을 건조하게 담는 장면이 종종 있다. 관객이 숨을 죽이고 긴장하게 만든다. 머리를 빗어내리는 소리와 서걱거리는 가위 소리만이 허공을 채운다. 긴 머리카락이 가리고 있던 얼굴은, 미용사의 가위질과 함께 드러난다. 그늘진 눈가와 꽉 다물려 있는 핏기 없이 매마른 입술은 아픈 사람의 것 같다. 눈은 멍하게 내리깔려 있다가 어느 순간 힘이 들어가며 카메라를 응시하는데, 꼭 무너져 내리기 직전 마지막 힘을 내 버티고 있는 듯 하다.
작품 속 클로에는 한 가지 모습만 보여주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으며 변한다. 초반의 클로에는 힘 없고, 불안하고, 건조하면서도 축축해 보인다. 툭 건드리면 눈물을 쏟을 것 같다. 폴을 찾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목소리는 탁하게 쉬어 있다. 빠르고, 흔들린다.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가다가, 마지막 순간 응시하는데, 도움을 요청하는 절박함이 담겨 있다.
몇 차례의 상담을 거친 후 폴을 대하는 클로에는 확실히 다르다. 얼굴에 생기가 돌고 눈은 자신감으로 빛난다. 말할 때를 제외하고 꾹 다물려 있는 입에는 웃음기가 있다. 이사벨이 떠오르게도 하지만, 그와도 다르다. 폴을 보는 클로에의 눈에는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 사랑 자체가 주제는 아니다. 제목에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고, 사랑이 이야기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맞지만, 폴, 그리고 그와의 로맨스와 섹스는 클로에가 스스로를 찾아가는 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폴과의 관계는 안정감을 주지만, 클로에는 곧 단순히 ‘생존’을 넘어, 만족, 즐거움, 욕망의 실현을 무의식중에 꿈꾼다. 폴을 사랑하지만, 섹스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그에게 비밀이 있다고 느낀다. 폴의 쌍둥이 루이가 나타나면서 아슬아슬했던 안정은 깨진다.
결말을 알기 전 루이의 존재는 폴의 비밀, 스릴러 장르의 소재, 이야기에 변수가 되는 인물이었지만, 작품을 다 보고 플롯을 이해하게 된 후에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사실 쌍둥이 형제가 있던 것은 클로에였고 그 사실을 모른 채 뱃속에 계속 품고 있었다는-) 클로에의 심리적/신체적 상태가 환상 속에서 구체적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 루이다. 비밀을 숨기고 있어 어딘가 찔리고 불안하지만, 원하는 것-특히 섹스에 관한 것-을 구체화시키고 실현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작품 내내 관객은 그 사실을 모르고 클로에의 환상을 보기 때문에, 그녀의 입장에서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루이의 방식을 거부하던 클로에는, 결심한 듯 찾아가 그를 안는다.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있는 루이를 웃음기 없는 굳은 표정으로 똑바로 응시하며 옷을 벗는다. 이때 마린 백트의 동작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으며, 정확하고 단호하다. 상대방을 유혹하려는 제스처가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하는 행동 같다. 자신의 만족을 위한, 상대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에 대해서 알아내고 싶기 때문에 하는. 비밀을 숨긴 채 루이와 폴 사이에서 갈등하는 클로에의 얼굴은 불안하지만 생기가 돈다.
루이는 폴의 정 반대다. 자상하기보다는 거칠고, 그래서 섹시하다. 클로에에게 폴이 주지 못했던 성적 만족감을 선사하고, 고양이를 싫어하는 폴과 달리 얼룩고양이 수컷을 키운다. 클로에가 루이와 나누는 대화는 폴이나 쌍둥이, 성적 욕망에 대한 것들이다. 루이는 클로에의 마음에 걸려 있는 것들을 건드리고 넓히는 존재다.
“어른이 돼서 알고 보니 태아 형태의 자기 형제를 몸속에 내내 품고 있었던 거야. 식인 쌍둥이.” 루이의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듣는 클로에의 얼굴은 초반부의 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멍하다. 무언가 아픔을 숨기고 있는 묘한 표정이다. 이처럼 작품 사이사이 카메라는 클로에의 ‘알 수 없는’ 얼굴을 보여주며 공간을 비워 놓는다. 그 빈 곳에 있는 듯한 마린 백트의 얼굴이 그것을 돋보이게 하는 연출과 만나, 후반부에 진실이 밝혀졌을 때 관객의 위화감이 덜하도록 설득력을 부여한다.
초반부 폴의 상담실로 돌아가보자. 클로에와 폴은 거리를 두고 앉아 있다. 클로에가 꿈 이야기를 할 때, 감독은 그 거리를 잘라내는 연출을 사용한다. 꼭 두 사람이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고, 말하는 클로에와 듣는 폴 사이에 심리적 간극이 좁아지고 성적 긴장감이 흐르는 것이 눈에 보인다.
이와 비교해, 루이의 상담실에서는 찍는 방법이 다르다. 역시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하지만, 카메라는 두 사람을 대칭적으로 잡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한 사람의 옆 얼굴과 상대방의 거울에 비친 상반신이 함께 나오도록 위치를 조정하고, 대사가 이어짐에 따라 초점을 이동한다. 그리하여 총 네 가지 형태의 화면이 나온다. 거울을 사용해 루이의 존재에 대한 복선을 심어주는 듯 하다. 앞의 것과 달리, 루이와 클로에 사이의 긴장감은 배우들의 표정과 카메라 구도 때문에 불분명하고 묘하다.
<두 개의 사랑>에는 이처럼 철저히 의도적인 연출이 눈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여성 성기가 움직이는 모습을 그대로 찍어 눈이나 입과 겹치도록 보여주는 실험적인 편집도 들어가 있다. 여성의 섹스가 대상화되는 게 아니라, 진짜 얘(버자이나)가 원하는 것을 찾아 따라가! 라고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누군가에겐 끝까지 보기 힘든 ‘괴작’이었겠으나, 다른 누군가에겐 새로운 영화적 경험이었을 것이다.
프랑수아 오종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캐릭터의 다양하고 복잡한 욕망과 엮어 보여주는 동시에, 그 욕망에 대한 상상력 자체를 표현하는 것에 비중을 둔다. ‘표준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개성이 확실한 마린 백트의 얼굴은, 프랑수아 오종의 역시 개성 확실한 이야기와 연출을 의도에 부합하도록 드러내는 핵심이다. 마린 백트라는 배우의 존재가 프랑수아 오종이 과감한 시도를 하는 데에 영감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작품에는 클로에가 미술관에서 일하는 모습이 종종 나온다. 말 없이, 가만히, 그림 사이에 앉아, 그곳에 있지만 마치 없는 듯한 상태로 존재한다. 어느 순간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뒤로 기대어 꿈꾸듯 눈을 감는다. 어려서부터 남들의 시선을 즐겼기 때문에 배우를 꿈꾸고 모델일을 했다는 그녀가, 이제 반대로 미술관에서 남들을 보는 일을 하며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거의 항상 다양한 형태로 긴장해 있거나 남들을 긴장시키는 역할을 하는 마린 백트의 얼굴이, 풀리고 무방비해지는 순간이다.
<두 개의 사랑>은 분명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정해진 결말을 향해 흘러가는 이야기지만, 그 ‘주제’ 하나로 요약할 수는 없다. 무언가를 말하는 수단으로 캐릭터를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겪는 순간들에 대한 존중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클로에라는 인물 자체와, 그녀가 환상을 겪으며 스스로의 치유와 만족을 향하는 과정도 중요하게 다룬다. 이 또한 그러한 성격의 장면이라고 느껴졌다.
두 작품 모두에서 마린 백트가 맡은 캐릭터의 설정 중 하나는 ‘미모’다. 헌데 그 ‘미모’는 남성과의 로맨스에 사용되는 등 대상화되기보다는, 행동이나 감정에 영향을 주는 요소가 되거나(이사벨), 딱히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클로에). 물론, 그의 얼굴이 미디어에서 그리는 ‘아름다운 여성’의 표준에 가깝다는 점이 캐스팅에 영향을 미쳤을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허나 그가 그 얼굴을 통해 보여주는 것, 프랑수아 오종이 찾아낸 것은 관성적인 아름다움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다. 꼿꼿한 상반신과 상대를 노려보듯 응시하는 눈, 꾹 다문 입은, 그의 캐릭터가 ‘예쁘고 말 잘 듣는 여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드러낸다. 마린 백트의 연기에는 프랑수아 오종의 연출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특별한 솔직함이 있다.
마린 백트의 연기와 프랑수아 오종의 연출이 앞으로도 다양한 감수성과 다채로운 욕망을 스크린에 불러오기를 바란다.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